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29
아주 대단한 힘을 가진 세력은 아니었으나, 불타는 복수심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처음에는 무시하던 피의 동맹도 제법 신경이 거슬릴 정도가 되자 토벌을 준비 중이라 했다.
“동맹이 그들을 쓸어버리려고 하면 신뢰의 연합이 움직이겠지. 아무리 그들이 연합을 탈퇴했다고는 해도 한때 동료였던 자들이 허무하게 죽는 것을 모른척할 수는 없겠지.”
그 말에 델피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휴전을 결의했다고 원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조금만 불이 붙으면 결국 전쟁이 재개될 것입니다.”
“복수자들도 그걸 알고 있겠지. 그러니 더욱 처절하고 더욱 잔인하게 죽기를 원하는 거야. 동맹이 그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할수록 신뢰의 연합이 전쟁을 재개할 가능성이 커지니까.”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영 껄끄러웠다. 정당한 복수였으나,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어렵게 만든 균형이 무너지면 안 되지. 내가 동맹으로 가서 조율해야겠네. 어찌 되었든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도록 해야지.”
테잔의 말에 델피노 역시 동의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성황청으로 향할 것이라 말했다.
“테잔이 동맹에서 조율한다면, 저는 성황청에서 연합을 막아 보겠습니다. 다행히 성자란 이름이 가볍지는 않아서 제법 도움이 될 겁니다.”
사실 성황청은 계속해서 델피노가 돌아오기를 원했다. 부디 성자께서 신의 뜻을 전하여 신성한 군대를 이끌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자가 계속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성황청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불편했을 것이다. 든든하게 호위를 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대로 행적을 알려 주는 것도 아니니 그저 노심초사할 수밖에.
“힘을 보태지는 못할망정 떠나려 하니 발걸음이 무겁군요. 하지만 곧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부디 조심하십시오. 기도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떠나기 전, 델피노가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이제 나도 신이 되었건만 대체 누구에게 기도한다는 말이오?”
“그도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 제 기도나 잘 들어주십시오. 혹시 이교도라고 무시할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룬이랑 잘 이야기해 보고 전달하겠소.”
델피노와 테잔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반은 남은 이들에게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둘러 움직여야겠소. 마리난 제국 내부 사정에 익숙한 자를 만나야지.”
그 말에 이레인이 기억을 더듬었다. 몇몇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긴밀한 사정을 알아내려면 제법 높은 신분이어야겠어. 남부 기사단장은 악마와 싸우러 떠났고, 라인하르츠 공작은 권력에 관심이 없지. 그러면 남은 건 마법사네.”
“그렇소. 우리는 오비도를 만날 것이오.”
* * *
보고, 해석하고, 감지하는 것이라면 대륙 제일이라는 백색 마탑의 가장 높은 곳. 온갖 보호 마법이 가득한 그 공간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늙은 몸으로 격무를 이어나가던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는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한 마디 주문을 읊지 않았음에도 막대한 마력이 움직이며 대마법을 토해 냈다.
우웅-
이곳은 백색 마탑의 심장부이자 오비도의 공방이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제법 집중했어야 할 대마법이 순식간에 나타나 침입자를 노렸다.
지독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스치는 바람마저 굳어 버릴 추위가 이름 모를 침입자를 노렸다.
푸쉬이이-
그러나 놀랍게도 오비도의 마법은 적을 처리하지 못했다. 세상을 얼릴 추위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며 흩어졌다. 오비도는 재빨리 다음 마법을 준비했으나 미처 뿜어내기도 전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 주변 가득하던 마력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탑의 중심에서 마탑의 주인을 찍어 누를 수 있다니, 오비도가 마른 침을 삼키며 눈동자를 굴리자 아이반이 손을 휘저어 먼지를 날리며 나타났다.
“미안하오. 이리 갑자기 찾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당신이 도저히 밖으로는 나오지 않더라고.”
“…아이반?”
“그렇소. 제법 오랜만이오.”
아이반이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자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두 눈을 끔뻑였다. 자신을 붙잡고 있던 기운이 사라졌음에도 한참이나 그 자세로 서 있었다.
“진짜 아이반이라고? 여긴 어떻게, 아니, 그건 대체……?”
오비도는 대륙 남부의 모든 마법사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백색 마탑의 주인이었지만, 감히 신의 진체를 눈앞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아이반을 만나기는 했으나, 설마 그사이에 필멸자를 벗어나 신격이 되었을 줄이야. 보지 못한 시간이라고 해봐야 십 년이 흐르고 백 년이 흐른 것도 아닐진대.
그는 진실을 꿰뚫는 현자의 눈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자네는……. 아니, 당신께서는 그, 정말로 초월자가 되신 겁니까? 필멸자를 벗어나 아득한 천상에 닿으셨단 말입니까?”
“편하게 말씀하시오. 새삼스럽게 신격이 뭐라고.”
아이반이 그리 말했지만 오비도는 전혀 편할 수가 없었다. 신과 대면하고 침착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하물며 이곳에 아이반 홀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레인이나 사나운 이빨은 예전에도 보았지만, 그 뒤에 가만히 서 있는 두 명의 여인은 영 낯설었는데, 아무리 봐도 필멸자 같지는 않았다. 정체가 무엇이냐고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초월자가 분명했다.
“크흠, 세상의 격이 선명한데 어찌 한낱 주문쟁이가 신을 뵙고 편히 말하겠습니까? 혹여 무례하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무례는 무슨, 나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소. 그저 힘 좀 강해졌을 뿐인데.”
필멸자가 신격이 된 것은 겨우 힘 좀 강해졌다고 표현할 수준의 일이 아니었으나, 본인이 그렇다면 오비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초월자였나? 힘을 숨기고 있다가 이번에 드러낸 건가?’
오비도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의 몸으로 신격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그동안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 더욱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칼 든 고블린이 마침내 신이 되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어쩌면 그 또한 진실이겠군. 허, 신격이라니. 필멸자가 신격이 되었다니.’
도대체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그 짧은 시간에 필멸자를 벗어나 신격이 될 수 있는 걸까? 대체 필멸자가 초월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였나?
그에 대해 한마디 조언을 들을 수만 있다면 지금껏 쌓아 올린 부와 명성을 모두 바쳐도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아이반이 탭 댄스 추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농담이라도 하면 오비도는 지금이라도 춤을 배우러 달려 나갈 터였다. 삐걱거리는 관절을 붙잡고 열심히 스텝을 밟겠지. 혹시 모르니까.
필멸자의 끝을 바라보고, 초월의 벽을 확인한 자들에게는 그만큼 절박한 것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갈무리한 오비도는 자세를 바로 했다. 비록 그는 신앙보다 세계의 법칙을 탐구하길 선택한 자였으나, 신격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의 태도가 극도로 공손해졌다.
“미안하지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이리 은밀하게 찾아왔소.”
“새겨듣겠습니다. 하문하시지요.”
238화 마지막 의무
아이반은 오비도에게 악마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지, 예전과 달리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물었다. 대악마가 소환되었으니 분명 그 영향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색 마탑은 본디 무언가를 감지하고, 분석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공간 마법에 능한 것도 결국은 그런 관측과 분석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악마가 소환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타나자마자 주변을 초토화하고 진격을 시작한 이전의 대악마와 달리, 이번에는 특별히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 없이 그저 침묵하고 있습니다.”
대악마의 등장에 바짝 긴장해서 살피고 있었으나,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이전보다 충돌이 줄었으면 줄었지, 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무언가 음모를 꾸미는 것은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국은 밀고 들어갈 힘이 없습니다. 대악마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불안하게 기다리는 것이 전부지요.”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힘이 전부 사라졌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반으로 쪼개진 제국은 더는 제국이 아니니, 남은 전력이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
전에는 전국의 뛰어난 자들을 모아 대악마의 목을 따겠다며 먼저 침투하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리 명령할 사람도 없고, 명령한다고 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둘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수십도 넘게 갈라져 있습니다. 대악마가 본격적으로 움직여서 또다시 멸망을 바라볼 때가 아니면 힘을 합치기란 어렵지요. 그러기에는 이미 서로 골이 너무나 깊이 생겼습니다.”
오비도는 그리 말하면서 쓰게 웃었다. 남을 비난할 것이 없이 본인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모두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대악마가 눈앞에 나타나도 그저 모른 척 기다리고만 있었다.
구심점이 사라지니 제국이 자랑하던 그 강대한 전력이 죄다 흩어져서 따로 놀고 있었다.
“그 지독한 것을 경험하고도 서로 헐뜯는 것밖에 하지 못하니, 이것이 인간의 못된 습성인가 봅니다.”
“하나로 뭉치지 못한다, 하나로 뭉치지 못한다.”
눈을 가늘게 뜬 아이반은 그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인간의 행동에 새삼스럽게 실망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리 분열이 심해진 게 혹시 악마의 음모가 아닐까 고민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분열이 점점 더 심해진다? 악마를 막아 낼 세력이 없다?’
어찌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간이 이성적이기만 한 동물은 아니라도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외면할 정도로 한심한가?
한때 대악마를 죽이겠다고 힘을 모았던 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몸을 사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뛰어들어 피를 뿌리던 자들이 눈치만 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누군가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인지 무척이나 의심스러웠다.
대체로 강한 힘을 가진 존재일수록 다른 이들을 하찮게 여겼다. 대악마 정도 수준이면 인간이 깔짝거리는 걸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겠지. 초월자가 필멸자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남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에 익숙한 악마라면, 이름마저 음습한 모략이라 불리는 대악마라면 능히 필멸자의 세력 판도마저 한 손에 올려 두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그리 열심히 악마 잔당들을 쓸어버렸는데, 대악마가 다시 소환되고서야 알아차리거나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를 위한 제단이 만들어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도 조금 의심스러웠다.
비록 비틀리긴 했지만, 태생이 이 땅의 신인 악신들은 유폐도 풀리고 차원 방벽도 무너졌으니 은밀하게 돌아오고자 하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근원이 마계에 있는 대악마는 차원 방벽이 무너졌다고 해도 은밀하기는 어려웠다. 하물며 마왕을 위한 제단마저도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의 추종자가 깊숙이 박혀 있군. 능히 남들의 눈을 속일 만큼 영향력이 강한 자다.’
아이반이 셀룬을 바라보자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의한다. 언제나 눈에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위험했지.”
“후보가 몇 없는데.”
“마지막까지 의심하라. 배신이 치명적인 것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아이반과 셀룬이 주고받는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오비도가 불경을 감수하며 물었다.
“정녕 배신자가 있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