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30
“확신할 수 없소. 신도 전능하지는 않더군.”
아이반은 확답을 내리지 않았으나 상황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세계의 법칙과 동화된 신격의 예감은 다듬어지지 않은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상황이나 조건을 제쳐 놓더라도 신격 둘이 그리 생각했다면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라는 뜻이다.
아마 직접 보면 확실할 터였다. 그러나 아이반은 배신자를 찾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대악마의 계획에 대항할 방법을 고민했다.
“저들이 제단을 만들었다고는 해도 소환이 쉽지는 않을 거요. 그만한 존재가 넘어오려면 거쳐야 할 것이 많지.”
차원 방벽이 무너졌고, 저들의 손에 세계 주권이 있으니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이 땅에 넘어오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는 해도 단번에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사이 얻을 것은 얻어야만 했다.
“마왕 크툴라스가 오기 전에 빠르게 움직입시다. 상을 엎지 못하더라도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 놓아야겠소.”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한 아이반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파멸의 마왕이 곧 넘어올 것을 알리고는 믿을만한 자를 은밀히 모으라고 조언했다.
초월자의 싸움은 결국 초월자에 달린 것이지만, 그렇다고 필멸자의 존재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니, 그들이 현명하게 움직일수록 파괴의 영향이 줄어들 터였다.
일행은 또 다른 자를 만나기 위해 움직였다. 엉망이 된 제국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서로 본인이 마리난 제국의 정통 황제라 주장하는 일 황자도, 이 황자도 아닌 라인하르츠 공작이었다.
그는 백 년이 넘도록 제국 최강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은 위대한 기사였고, 이미 권위가 무너진 황실보다 그의 말 한마디가 더욱 영향력이 컸다.
마리난 제국에서 힘으로 먹고사는 자들치고 라인하르츠 공작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가 황제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될지도 몰랐다.
물론 이미 필멸자의 끝자락에 닿은 그가 세속의 욕망에 휘둘리지는 않을 거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으니 더욱 그렇겠지.
“아직 필멸자를 벗어나지 못한 자는 그리 사는데, 나는 신격이 되어도 세속의 일을 벗어날 수가 없군.”
아이반이 한탄하며 중얼거리자 셀룬이 피식 웃었다. 그녀 역시 그리 살았기에 그 안타까움이 낯설지가 않았다.
성에 박혀서 수련이라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싶었더니 라인하르츠 공작은 지금도 가장 앞에서 악마를 쓰러뜨리며 지내는 중이라 했다.
그동안 큼지막한 곳은 악마의 잔당을 대충 밀어냈다고는 해도 아직 깊은 골짜기나 외딴곳,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미뤄 둔 장소에는 악마와 언데드가 넘쳐흘렀다.
일행은 라인하르츠 공작이 황금 사자 기사단을 이끌고 떠났다는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외부인이 군사 기밀을 제대로 알 수는 없는 법이라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전혀 엉뚱한 방향만 아니라면 초월자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영지의 버려진 요새. 살지도 죽지도 못한 인간을 장난감처럼 부리며 악마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황금 사자 기사단이 그 주변을 둘러싼 언데드 무리를 부수고 요새를 공격할 때, 일행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범한 기사단은 아니구나. 행동이 정확하고 힘의 낭비가 없다. 대단히 수준이 높아.”
달의 여신이 그리 호평하자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인하르츠 공작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자들이라 했소. 지난 몇 년간 그와 함께 실전을 경험했으니 더욱 날카로워졌겠지.”
예전에도 약한 자들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눈빛에서 뿜어지는 박력이 달랐다. 과장 좀 보태자면 언데드가 내뿜는 사기 가득한 푸른색 안광보다 황금 사자 기사단의 눈빛이 훨씬 더 서늘했다.
일행이 숨기고 있던 기척을 드러내니 일제히 창검을 돌리며 경계했다. 그 반응이 무척이나 민첩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빨리 움직인 자가 있었으니, 저 멀리서 악마의 가슴을 쪼개던 라인하르츠 공작이 빠르게 창을 쏘아 보냈다.
휘이익!
다섯 개의 창이 아군을 노리고 날아왔다. 아이반, 이레인, 사나운 이빨, 사브리나와 셀룬까지, 한 사람당 하나씩이었다.
그렇게 날아온 창은 심장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췄다. 일행이 막았기 때문이 아니라 라인하르츠 공작이 멈춘 것이다.
우웅-
다섯 창이 그대로 돌아가 라인하르츠 공작을 둘러싸고 빙글 돌았다. 뒷짐을 하고 있던 라인하르츠 공작이 표정을 굳힌 채 아이반을 보았다.
“···미래를 맡길 후배라 여겼는데, 그조차 한참이나 부족한 평가였군. 설마 신격이 되었을 줄이야.”
“귀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오. 그것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오.”
“내가 무엇을 했다고. 결국, 깨달음은 본인의 몫이지. 아직도 벽을 넘지 못한 자의 말이 도움이 되어 봐야 얼마나 되었겠나?”
오랜 세월 벽이 가로막혀 있는 그와 달리 겨우 몇 년 만에 초월자가 되어 버린 아이반을 바라보며 질투를 느낄 법도 했다.
그러나 라인하르츠 공작은 그런 감정 하나 없이 투명한 눈으로 축하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았기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공작께서도 진전이 있었나 보오. 반쯤은 벽을 넘은 듯한데.”
“한 발을 내민 것보다 그다음 발을 움직이는 것이 더욱 어려운 법이지. 내가 살아온 만큼 더 수련한다고 해도 벽을 완전히 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아.”
차원 장벽이 무너졌다. 꽉 막혀있던 천상의 길이 열리니 정체되어 있던 실력이 늘었다.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은 자신에게 남은 수명이 길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지금은 요원하기만 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지. 그러나 어쩌겠나? 반걸음이나마 맛보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네. 나는 오히려 남은 시간 얼마나 더 즐길 수 있을지 설레기까지 한다네.”
평생을 바라던 일이었다. 이제야 길이 보였는데 얼마 걷지도 못하고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이 어찌 슬프지 않겠나.
그러나 라인하르츠 공작은 그조차 즐거움으로 삼았다. 달고, 쓰고, 떫고, 매운맛을 모두 겪고서 이 자리에 왔으니 가슴에 품은 일말의 미련마저 과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겉보기엔 중년의 외모였지만 실상은 평범한 인간이 몇 번은 살고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세월을 겪은 노인이었다.
그는 모든 생을 걸고 한 길만을 맹렬히 달려올 만큼 열정적이었고, 그리하여 붙잡지 못한 것에 좌절하지 않을 만큼 성숙했다.
“항상 젊은 줄 알았거늘, 어느새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익숙한 나이가 되었어. 그걸 이제야 깨달았으니 나도 참 미련한 놈이었지.”
허허 웃는 그의 미소에 담긴 것이 정녕 무슨 감정인지 아이반은 알지 못했다. 너무나 무거웠으며, 너무나 가벼웠다. 그게 바로 필멸자를 넘어 초월자가 되었음에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인생의 무게일 것이다.
“신들께서 그저 놀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이신가? 대악마가 나타났음은 알고 있지만, 그 이상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른다네.”
본디 라인하르츠 공작에게 제국의 조율을 부탁하려 했다. 아무래도 대악마가 손을 뻗어 균형을 무너뜨리려 하니 그 음모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직접 나서기를 청하려 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인생을 마무리하는 그에게 차마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세속의 모든 것이 그에겐 의미가 없을 터인데, 제국의 조율이 다 무슨 소용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에게 괜히 짐을 맡기는 것 같아 불편하기만 했다.
“공작께 부탁할 것이 있소.”
아이반이 힘겹게 말을 꺼내자 라인하르츠 공작은 하늘을 바라보며 길게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하나가 되어 싸울 것이네. 어쩌면 그곳이 내 최후의 전장이 되겠어.”
살아있다면 신이 될 것이오, 죽는다면 영웅이 될 것이니 제국 최강의 기사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239화 무투가의 본산
“정녕 제국의 심장부에 어둠의 추종자가 숨어 있다면 결코 낮은 신분은 아닐 것이오.”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라인하르츠 공작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그 역시 헛된 생각임을 알고 있다네.”
세속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던 그였으나 제국의 은혜를 잊지는 않았다. 엉망이 된 제국을 바로잡고자 했으니 손에 피를 묻히는 것 정도는 각오했다. 다만 은혜를 갚기 위해 고귀한 핏줄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야심만만하게 쿠데타를 일으킨 둘째 황자가 서부와 북부를 지배하는 반쪽짜리 황제라,면 첫째 황자는 그보다 못한 처지였다. 동 마리난의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실상 권력은 크지 않고, 그의 장인이었던 마르티스 후작과 동부의 귀족들이 모든 것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통성은 있으나 방탕하고 무능하여 진심으로 따르는 자가 적었다. 제위에 올랐어도 그를 진정한 황제라 여기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 분노가 들끓었겠지.
그런 처지를 벗어나려면 뭐라도 해야겠지만 그게 악마와 손을 잡는 짓이었다면 참으로 슬프고 한심한 일이었다.
“첫째 황자는 무능하고 방탕했으나 포악하지는 않았다네. 전란이 없었다면 뒤에서 욕은 좀 먹을지언정 별 탈 없이 황제로 살았겠지. 그가 그리 변했다면 그 또한 암울한 시대의 탓이다.”
그러나 시대가 암울하다는 이유로 모든 타락과 변절을 용서한다면 그 또한 문제였다. 그런 어두운 시대에도 빛을 잃지 않는 자들이 있었고, 그런 자들을 위해서라도 단호해야만 했다.
“옛 주군의 핏줄을 내 손으로 죽이게 되다니, 내가 오래 살기는 오래 산 모양이야.”
순간 라인하르츠 공작의 눈이 아득해졌다가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 젊은 시절로 돌아가 자신을 붙잡아 주던 옛 황제를 보고 온 모양이다.
세속의 모든 욕망을 끊어 냈다 했지만 라인하르츠 공작은 정이 너무 많았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초월자로 가는 길이 더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신이 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자였다.
어쨌든 침묵하던 라인하르츠 공작이 몸을 일으켰으니 분열된 제국은 하나가 될 것이다. 그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끊어 낼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제국은 지금처럼 한심한 모습에서 벗어나리라.
그는 말년에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는 걸 마다치 않고 그 지저분한 정치와 전쟁의 구렁텅이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아이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초월자가 싸우는 전장에는 결국 초월자가 필요해. 그러니 추천할 자가 있네. 미련한 내가 반걸음이나마 벽 너머에 발을 내밀었다면 어쩌면 그자는 벌써 초월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
“그게 누구요?”
“바르투이. 내가 보았던 가장 강한 인간일세.”
라인하르츠 공작이 제국 최강의 기사라 불렸다면 바르투이는 최강의 무투가라 불렸다. 대륙에 있는 모든 무투가의 정점.
“세상의 많은 자가 그와 나를 호적수라 불렀으나, 실상 나는 그에 미치지 못하네. 단 한 번도 그보다 나았던 적이 없어.”
라인하르츠 공작 역시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라는 둥, 인간이 낳은 최고의 천재라는 둥 온갖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작 그는 바르투이가 진정한 천재라 여겼다.
“하나를 보면 열을 깨닫고 백을 만들며 천을 다루는 자를 천재라 부르지 않으면 뭐라 부르겠나? 필멸자를 넘어 초월자가 되어 버린 존재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아직도 나는 바르투이보다 무재가 뛰어난 자를 본 적이 없네.”
그건 놀라운 소리였다. 관심 없이 앉아 있던 셀룬과 사브리나마저 그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이반이야말로 재능의 정점이었다. 그 무엇을 익히든 초월에 이를 수 있는 재능이 아닌가. 심지어 스스로 신격이 되어 그것을 증명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아직 초월하지도 못한 자가 감히 신격을 앞에 두고 그보다 뛰어난 자를 언급하다니, 실로 불경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아이반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검신 카락취보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이오?”
순수하게 재능만 따졌을 때 아이반이 생각하는 최고는 카락취였다. 한낱 고블린으로 태어나 세상의 모든 자를 물리치고 마침내 검신이 되었으니 그보다 대단한 자가 누구란 말인가.
옛 용사로서 차원 방벽이 두꺼울 때 그것을 뚫고 신격이 된 달의 여신 셀룬도 놀랍지만, 그녀가 필멸자이던 시절은 보지 못했으니 카락취를 높이 칠 수밖에 없었다.
“그 고블린이 신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검신이라, 참으로 오만하고도 어울리는 신명이로군.”
예전에 카락취와 충돌한 적이 있었던 라인하르츠 공작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