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31
“고블린이 검신이 되다니 실로 놀라워. 그는 그럴 만큼 대단한 존재였네. 하지만 재능만 놓고 본다면 바르투이의 재능이 그보다 못할 것 같지는 않군.”
바르투이의 명성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라인하르츠 공작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알겠지. 그러나 바르투이의 재능이 그렇게나 대단할 줄은 몰랐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친구이기는 하지만 이맘때쯤이면 항상 본산에 머무르곤 하지. 그곳을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네.”
* * *
“천상은 파멸의 마왕이 넘어와도 이길 수 있다 여기겠지만, 나는 지금 전력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오.”
한 번 붙어서 패배했으니 어둠의 세력만큼 천상의 힘을 잘 아는 자들이 없었다. 그런 자들이 다시금 전쟁을 일으킨다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지.
천상은 그조차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아이반은 확신할 수 없었다.
“천상은 지난 대전쟁에 승리하고서 그 승리를 지나치게 만끽했소. 모든 것을 가지려 했으니 그에 반발하는 자들이 적지 않지.”
천상의 아홉 신격만이 전쟁의 승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이 기억하고 영광을 부르짖는 것은 아홉 신격이 전부였다. 그건 뭔가 문제가 있었다.
“드래곤이야 필멸자의 숭배엔 관심이 없는 존재니 그렇다 치고, 그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신격은 어찌 되었소? 그들을 기억하는 자가 얼마나 된단 말이오?”
한때 위대한 신격이었으나 신앙을 잃고 몰락한 존재가 적지 않았다. 그들이 과연 새로운 전쟁에서도 아홉 신격을 편들겠나?
“악신들이 하급 신격을 붙잡아 힘을 갈취했다는데, 과연 그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분명 그런 자들도 있었겠지만 자발적으로 합류한 자들도 적지는 않을 테지.”
천상의 아홉 신격은 분명 칭송받아 마땅한 위대한 자들이나, 영광을 나누는 것에 지나치게 인색했다.
신격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두고 챙겼다면 상황이 이렇지는 않으리라.
결국 아홉 신격의 욕심과 무관심이 아군을 줄이고 적을 불리는 결과가 되었다.
우웅-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으로 빛나고, 머리만 남은 거인의 형상이 흐릿하게 나타나 아이반의 귓가에 속삭였다.
가장 지혜로운 요툰, 미미르.
그는 오딘이 무한한 지혜를 얻기 위해 자신의 눈을 뽑아 던졌던 샘의 주인이며 라그나로크가 일어났을 때 오딘이 가장 먼저 찾아가 조언을 구한 현자이기도 했다.
“음습한 모략이 소환되고 설마 마리난 제국을 뒤흔드는 수작만 부렸을 리가 없지. 그건 그저 장난질에 불과해. 진짜는 역시 초월자에 대한 것이오. 아니, 그조차 미끼인가? 그런 단순한 수작을 부릴 수는 없지. 역시 천상을 무너뜨리기 위한 발판을……. 하지만 그건 위험성이 너무 크니 그보다 안정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지금도 수십, 수백 가지 가정이 샘솟다가 흩어졌다. 음습한 모략과 악신들이 할 수 있는 사악한 계획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이반의 머리가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었던 수준으로 맑아지고 세상 모든 정보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온갖 지혜가 넘쳐흘렀다.
“후우…….”
미미르의 조언을 통해 온갖 지혜를 토해 내던 아이반이 욱신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머리를 가득 채우던 수많은 비밀스러운 지식과 지혜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방금 자기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했던 말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지고한 지혜와 연결을 끊자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던 드높은 지성이 사라졌다. 세상을 장난감처럼 여기던 위대한 자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한낱 원숭이가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신격이고 제법 머리를 쓸 줄 안다고 여겼건만 그게 민망할 정도였다. 자신의 멍청함을 이리 자각하니 지독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거, 계속할 수 있는 짓은 아니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그를 반대하는 수십 가지 의견이 떠올랐다. 또 그를 보충하는 생각과 반박하는 근거가 뒤섞여서 생각이 뒤집히고 뒤집혔다.
옳고 완벽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 사실 모든 것이 가짜이며 거짓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했다.
오딘은 이런 짓을 매일 했다고? 그러니 성격이 그 모양이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을 텐데.
“으음, 뭔가 다른 사람 같았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사나운 이빨이 말했다.
“신격이 되었을 때도 이리 이질적이진 않았는데.”
“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기분이오.”
몇 번이고 뱀신 모르나에게 몸을 넘겨준 사나운 이빨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음,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뱀신의 대전사로서 여신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었으나, 아무리 해도 자신의 몸으로 아이반을 유혹하는 것은 수치스럽기만 했다. 감히 뱀신께 항의할 수는 없어 속앓이만 할 뿐이니 더욱 그러했다.
어쨌든 그러는 사이 그들은 무투가의 본산에 도착했다. 저기 보이는 안개 덮인 산이 모든 무투가의 고향이었다.
하지만 그냥 산을 오를 수는 없었다. 무투가의 본산은 그 자체로 거대한 던전이나 다름없어서 그냥 걸어간다고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다른 세계에 반쯤 걸쳐 있기에 문이 열리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초월자만 셋이니 때려 부수고 들어가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으나, 싸우러 온 것도 아닐진대 그럴 수는 없었다.
“안개 산까지 오는 건 처음이네. 당신은 온 적이 있었어?”
이레인의 말에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도 여기 온 것은 처음이오. 나는 본산에서 천둥 걸음을 배운 것이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아이반은 외인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배운 것은 비록 천둥 걸음 하나뿐이었으나 그게 바로 무파 썬더 울프의 기초이자 모든 것이니까.
한때는 천둥 걸음 하나로 먹고살던 때가 있었다. 돌고 돌아서 이곳까지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 걸린 셈이다.
“으흠, 안개 산이라…….”
사브리나는 그쪽을 보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나 명확하던 그녀답지 않게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시오?”
“확실하지는 않으나, 익숙한 느낌이다. 나의 동족이 저곳에 있노라.”
“뭐? 드래곤이 안개 산에 있다고?”
아이반이 깜짝 놀라 묻자 사브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되었으나 결코 잊지 못할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안개 산을 휘감고 있는 마력이 그러하다 했다.
“모든 동족이 깨어났으니 한 번쯤 만날 때도 되기는 했지. 그러나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구나.”
그에 반응하듯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짙은 안개가 갈라지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이 나타났다. 마치 그들을 초대하는 것만 같았다.
240화 권왕 바르투이
길고 긴 계단을 걸어 안개산에 올랐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환상적인 풍경이 그들을 반겼다. 굽이굽이 가득한 산봉우리와 쏟아지는 폭포가 안개에 휘감겨서 그저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곳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입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설픈 자들부터 제법 경지에 올라 원숙해진 자들까지 다양했다.
이곳이 안개산이었다. 대륙의 모든 무투가의 고향.
한참이고 계단을 오르니 누군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덩치가 크지는 않으나 품고 있는 기운이 무척이나 묵직했다.
아이반은 그가 누구인 줄은 모르나, 그가 가진 기운이 무엇인 줄은 알았다. 무파 썬더울프 특유의 저릿한 느낌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산을 오르느라 지겹지는 않으셨습니까?”
“경치가 제법 볼만했소. 그것을 즐기다 보니 지겨운 줄을 몰랐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남자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이반은 뒤를 따라가면서 흘깃 그의 발걸음을 보았다. 천둥 걸음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반이 배우고 발전시킨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으나, 그 수준이 대단히 높아서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훌륭하군.”
그 말에 반응하듯 남자가 옅게 웃었다.
“그래 봐야 한낱 인간의 재주지요. 신께 보일 수준은 아닙니다.”
“나도 천둥 걸음을 배웠소.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배움의 인연이 그리 꽃피웠으니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힘을 추구하는 투사가 아니라, 더 높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자였다. 그래서 사람을 가릴 뿐 가르침에 인색하지 않았다. 자신의 배움을 전해서 누군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기쁨이었다.
다 같이 걷는 길에 내 것이 어디에 있고, 남의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이유로 무파 썬더울프에는 스승과 제자가 없었다. 먼저 배운 사람과 뒤에 배운 사람, 그저 선배와 후배가 있을 뿐이다.
“이곳에 그분께서 계십니다.”
그는 안개산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신이 안내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라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떠났다.
그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던 아이반은 고개 돌려 위를 보았다. 거대한 기둥이 몇 개나 있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이 가득했다. 황금과 은으로 장식된 문이 번쩍이고 있으니, 이리 험한 산꼭대기에 있기에는 지나치게 웅장한 곳이었다.
스스슥-
커다란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강대한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 남자가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날카로웠다. 눈빛이 무척이나 깊고 무거워서 이레인과 사나운 이빨이 흠칫 몸을 떨 정도였다.
“천 년, 아니 천오백 년 만인가?”
남자가 무겁게 입을 열자 사브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쯤 되었다.”
“조금 더 잘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생각보다 빨리 어둠이 찾아왔어.”
“어쩌면 다행인 셈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면 눈을 뜨는 동족이 더욱 적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