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32
“그래, 너는 마지막으로 잠들고 가장 먼저 깨어났지. 모두 몇이나 남았나?”
“열넷.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그러했다.”
그 말에 남자가 껄껄 웃었다. 아주 즐겁고도 허무한 웃음이었다.
“위대한 창조주의 화신이 겨우 열넷밖에 남지 않았다니, 세계의 조율자가 참으로 처참하게 몰락하였구나. 드래곤의 이름도 옛것이 되었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아이반과 셀룬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오만하고 당당하게, 또한 우아하고 위엄 있게.
“나는 제르세우스, 태초의 바람을 계승한 드래곤이다.”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 세상이 반응했다. 세계 주권, 창조주의 권한을 계승한 드래곤의 말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기적이었다.
자신의 권능을 나누었기에 약해진 사브리나와 달리 그는 온전한 드래곤이었고, 풍기는 기세와 존재감이 남달랐다.
“솔직히 드래곤이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소. 여긴 무투가의 고향이니.”
무투가는 누군가를 섬기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독한 구도자이니 믿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이 전부였다.
이 험한 세상에서 굳이 무기를 쓰지 않고 맨몸으로 싸우는 것 또한 단순히 허세나 멋이 아니라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고행의 수단이었다.
비록 세상은 그들을 무투가라 부르지만 실상 무사도 투사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강해지기를 원하는 고행자였다.
그런 무투가의 본산에 드래곤이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상했다. 무투가는 그 어떤 초월자의 힘조차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이곳은 내가 만든 곳이다. 과연 필멸자가 그 어느 초월자의 영향도 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격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지.”
아득한 옛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후로 필멸자가 초월자가 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초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초월자의 힘을 받아 그를 모시는 하급 신격이 되었을 뿐이다.
천상의 아홉 신격을 따르는 하급 신격들, 악신의 추종자, 오크투신 타르칸이 이끄는 녹색 만신전.
대주술사가 신격을 얻는 것 또한 대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니 온전히 자신의 힘은 아니었다.
“초월자를 키우려 했다고? 스스로 격을 얻을 수 있는 자를? 터무니없는 계획이로군.”
아이반이 헛웃음을 흘리자 제르세우스가 인정했다.
“옳은 말이다. 나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지. 그런 자를 보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르세우스는 셀룬을 보았다. 한때 필멸자였고, 영웅이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차원 방벽을 찢고 천상의 문을 열어젖힌 위대한 신격을.
“나도 온전히 나만의 힘으로 승천한 것은 아니거늘. 옛 신의 파편과 신성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달의 여신 셀룬이 그리 말하자 제르세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손으로 미쳐 버린 신을 죽이고 그 파편을 흡수했다면 그 또한 자신의 힘이지. 주어진 힘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차피 도달할 경지였다. 시간을 줄였을 뿐 결정적인 도움이 될 수는 없었을 거다. 격이 충분하지 않으면 다른 이의 신성을 제대로 흡수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식으로는 진정한 초월에 닿을 수 없으니까.
“나는 내가 잠드는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만든 바닥에서 누군가 스스로 단련하여 초월자가 된다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여도 다른 존재의 신앙이 침범하지 못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 테니 상관없다고 여겼지.”
어차피 천 년을 넘게 잠들어야 할 제르세우스 입장에서는 세세히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터전만 닦아 두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그래서 성공하셨소?”
아이반의 물음에 제르세우스가 알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차원 장벽이 무너졌으니, 결국 그 닫힌 세계를 찢고 승천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
그건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두꺼운 차원 방벽으로 하늘이 막힌 세계조차 뚫고서 초월자가 될 수 있었다는 선언이었지.
아이반은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흐릿하던 존재감이 점차 선명해졌다. 몇 겹이나 되는 결계로 가려져 있던 그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2m를 넘기는 장신에 온몸 가득 들어차 있는 근육, 딱 벌어진 어깨와 강인한 눈매가 인상적인 자였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더없이 부드럽고 가벼웠다. 몸놀림이 둔한 자는 절대 아니었다.
스윽-
아이반이 무심코 자세를 바로잡았다. 싸우고자 하는 의도가 없음에도 몸이 긴장할 정도였다.
악신이나 대악마, 세상의 강한 존재는 제법 보았으나 그런 초월적인 강함과는 좀 결이 달랐다. 극도로 단련된 무인의 강함이었다.
‘···쉽지 않겠는데.’
카락취와 비교해 재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라인하르츠 공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권왕 바르투이는 실로 대단한 남자였다.
“···본 적이 없는 손님들이군.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권왕 바르투이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역시 이리 강한 자들을 마주한 적은 없었기에 다소 놀란 모습이었다. 눈이 바쁘게 일행을 훑는 걸 보니 자연스럽게 승산을 계산하는 모양이다.
“라인하르츠 공작이 추천하여 그대를 찾아왔소. 어쩌면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정말로 초월자가 되었군.”
“라인하르츠 공작?”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반을 보던 바르투이가 피식 웃었다.
“아이반 에시르손. 재미있는 후배가 있다고 공작이 편지하였는데, 그게 당신이구려. 다른 이들은 누군지 모르겠지만······.”
흘깃 제르세우스를 바라보자 그가 담담히 소개했다.
“달의 여신 셀룬과 나의 동족, 사브리나다.”
이레인과 사나운 이빨은 언급하지 않았다. 초월자가 되지 않은 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하긴, 그리 오만한 것이 드래곤이었다. 사브리나가 특이한 거지.
“달의 여신, 드래곤······. 얼마 전이었다면 믿지 못했을 텐데, 지금은 그리 놀랍지도 않군. 반갑소.”
천 년도 넘게 보이지 않던 드래곤이 갑자기 나타나 내가 이곳을 만들었노라 말한 것만 해도 황당한 사건이다. 대륙 곳곳에서 대악마가 나타나고 악신이 날뛰고 있으니 또 다른 신이나 드래곤을 보는 것이 그리 경악할 일은 아니었다.
“공작의 추천으로 나를 찾아왔다니, 도대체 무엇을 바라시오?”
“세상에 어둠이 가득하니 힘이 부족하기만 하오.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오.”
얼마 전 서쪽에서 일어난 일을 말했다. 악신과 대악마가 무얼 하고 있는지 설명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넘어올 것이라 알렸다.
그러자 권왕 바르투이는 잠깐 눈을 감고 그 말들을 곱씹다가 되물었다.
“그대는 필멸자이던 시절부터 온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소. 그런데 초월자가 된 지금도 그러고 있군. 어찌 그럴 수 있소?”
일단 초월자가 되고 나면 생각이 바뀌기 마련이었다. 보는 시야가 달라지니 평생 되새기던 신념도 의미를 잃었다.
필멸자와 초월자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평생 수련하다 마침내 벽을 넘어 초월자에 도달한 권왕 바르투이는 그것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 예전처럼 행동하려 해도 지독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주변 사람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아래에 있었다.
“필멸자, 초월자. 결국, 그게 다 뭐라고. 차가운 물로 세수 좀 했다고 세상이 다르진 않소.”
게임 캐릭터가 플레이어의 자리에 오르면 세상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플레이어의 자리에서 굴러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온 자에겐 그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당신은 다르군. 정말 너무나 달라.”
한참이나 그리 중얼거리던 권왕 바르투이는 표정을 달리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검을 든 고블린, 카락취가 신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소. 가장 약한 자가 마침내 천상에 닿았다고 외치는 말이 여기까지 들리더군. 그건 진실이오?”
“그렇소. 내 눈으로 보았소. 카락취가 필멸자의 탈을 벗고 검신이 되는 전장에 나 역시 싸우고 있었소.”
“검신이라, 그래 검신 카락취는 신이 되고 뭐라 말했소? 검이 더 가볍다고 하였소? 아니면 이제 검을 휘두르는 것은 지겹다고 하였소?”
“신을 벨 수 있어서 좋다고 했소.”
그 말에 바르투이는 껄껄 웃었다. 참고 있던 웃음을 모두 토해 내듯 웃다가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한 번만 어울려 주시오.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인지 궁금하니.”
무파 강철 바람의 종주, 최강의 무투가.
검신 카락취와 비견되는 필멸자 최고의 재능.
다른 그 어떤 초월자의 도움도 없이 홀로 필멸자의 탈을 벗어 던진 자.
권왕 바르투이를 바라보며 아이반이 손을 뻗었다.
“덤비시오.”
241화 왕과 투사
아이반과 바르투이가 싸우려고 하자 그걸 지켜보고 있던 드래곤 제르세우스가 용언을 내뱉었다.
-이 땅은 무너지지 않는 제단이 되리라.
안개산의 영맥이 용언에 반응하고, 세상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마력이 요동치고 세계의 법칙이 재배열되며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안개 가득한 산꼭대기, 여기저기 삐죽 솟아오른 봉우리 사이로 넓은 공터.
오로지 이번 대결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었다. 초월자가 싸우면 안개산이 무너질 테니 적당한 판을 깔아 준 거다.
제르세우스와 사브리나, 셀룬, 이레인과 사나운 이빨은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다. 세상이 울리고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싸움이라도 초월자가 셋이나 있으니 여파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제대로 된 무인과의 싸움은 오랜만인데.’
그동안 초월적인 존재와 많이 싸웠지만, 대부분 태생부터 초월자였다. 극도로 단련한 무인과는 싸우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아이반은 어두운 용의 발톱을 한 손으로 쥐고 권왕 바르투이를 보았다. 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나, 그들과 같은 수준에서는 없는 거나 다름없는 간격이었다.
두 주먹을 쥐고 자연스럽게 서 있는 바르투이의 모습에는 빈틈이 없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반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노려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빈틈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쉬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