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35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수천의 에인헤랴르가 신조차 잡아 가둘 질기고 억센 사슬로 그의 몸을 휘감아 당겼다. 창과 검이 교차하여 그의 목을 눌렀다. 머리를 금방이라도 자를 것만 같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분명 쓰러뜨렸던 수천의 에인헤랴르가 멀쩡히 살아난 것은 놀랍지 않았다. 발키리와 스캴드메르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떨렸다. 터무니없이 강한 존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르르, 쾅!
누군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렇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하늘 가득 먹구름이 피어나 천둥이 울려 퍼졌다. 흘러나오는 번개에 몸이 저렸다.
“오랜만에 나도 제대로 싸워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군.”
그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망치를 바르투이의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윽!”
세상이 찍어 누르는 듯 무거웠다. 초월자가 되고 더는 느낄 수 없다고 여겼던 아득함이 덮쳤다. 금방이라도 가슴이 무너질 것만 같았고, 내리치는 번개에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바르투이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터질 듯한 근육과 강한 육신, 거대한 덩치와 벼락처럼 번쩍이는 눈을 지닌 남자였다.
“다음에는 그 어설픈 모습을 지우고 한 번 싸워보자고. 우리 허약한 나무가 제대로 자라고 나면.”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천둥신 토르가 껄껄 웃으며 묠니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번개처럼 번쩍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대한 존재감이 잔향처럼 남아 있다가 흩어졌다.
수천의 에인헤랴르가 사라지고 발키리와 스캴드메르도 모습을 감췄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위그드라실 역시 보이지 않았으며, 황금 옥좌 흘리드스캴프도 아스가르드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주 피곤한 얼굴의 아이반이 걸어왔다.
‘망할 토르, 아주 제멋대로야.’
다른 이를 부르려 했는데 마지막에 토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제법 내상을 입었다. 위그드라실을 세상에 새기고 이 땅을 아홉 세계의 영역으로 만들었다고 대뜸 아스가르드에서 뛰쳐나오다니.
아무리 허신으로 오래 있어서 몸이 근질근질하다고는 해도 마력을 죄다 빨아먹고 나타나면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안 그래도 위그드라실을 세우고 수천의 에인헤랴르를 소환하면서 힘들었는데 토르가 기운을 박박 긁어 갔다. 잘못하면 바르투이가 쓰러지기 전에 그가 먼저 쓰러질 뻔했다.
“이게 진짜 초월자의 전투요. 기분이 어떻소?”
땅 깊숙이 박혀서 누워 있던 투신 바르투이는 조금 전의 싸움을 한참이나 곱씹어 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상에 오른 줄 알았더니 하늘의 시작이었군. 끝이 아님을 알았으니 오히려 기쁘구려.”
마지막에 잠깐 나타나 자신을 찍어 누른 천둥신 토르의 존재가 바르투이에게는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했다.
권왕을 넘어서 투신, 고행을 자처하는 무투가였으나 결코 숨길 수 없었던 투쟁심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패배의 괴로움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았다는 기쁨이 더욱 짜릿하니 바르투이는 환희로 몸을 떨었다.
“이번에는 여기까지였으나, 다음은 다를 거요. 나의 끝은 여기가 아니니까.”
최고의 재능을 가진 자가 흔들리지 않는 정신으로 나아가니 그 끝이 위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반은 그가 어째서 투신이 되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검신 카락취에 투신 바르투이,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인물이 나는 법이지. 이러니 어둠이 짙어도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어.’
뒷짐을 하고 있던 아이반이 손을 뻗었다. 투신 바르투이가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아이반이 별로 좋아하는 말은 아니지만, 전사가 싸움으로 서로를 알렸으니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환영하오.”
243화 선을 긋다
아이반과 바르투이가 싸움을 끝내자 그들의 전투를 위해 임시로 만들어졌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태초의 바람을 계승한 드래곤, 제르세우스는 자신이 용언으로 만든 세상을 거두면서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았다. 위그드라실이 나타나고 아홉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전투의 결과보다 그게 더 흥미로웠다.
“이계의 세계수와 옛 세계의 흔적이라……. 본디 이 땅에 자리 잡을 수 없는 것들인데 어찌 잘 스며들었군.”
“침략자가 아니라 난민이었으니 세계가 받아 준 것이오.”
“세계가 정이 있을까, 그 또한 세상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겠지.”
“그럴 수도.”
대충 고개를 끄덕인 아이반은 바르투이를 힐끗 보았다. 둘 다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인 상처도 없었다. 필멸자는 목숨이 끊어질 상처라도 초월자는 아무렇지 않게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싸우기는 했으나, 정말로 상대의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소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대련이었으니까.
온몸이 찢어지고 갈라져서 피를 흘리던 바르투이가 몇 번 호흡을 고르자 상처가 아물었다. 투지가 꺾이지 않는 한 무한한 활력이 솟아오르는 투신이니 지친 기색조차 저 멀리 사라졌다.
아이반 역시 토르가 튀어나오며 마력이 바닥난 것만 빼면 괜찮았다. 위그드라실을 부르고 에인헤랴르와 토르를 소환한 영향이 적지는 않았으나, 조금 피곤할 뿐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한바탕하고 나니 개운하기는 한데, 앞으로는 이렇게 시원한 싸움은 없을 거요. 악신과 악마, 어둠의 세력과 싸우다 보면 항상 뒷맛이 찝찝하거든.”
“나도 산에 박혀 주먹만 휘두른 것은 아니니 그리 순진하지는 않소. 인생의 단맛, 쓴맛이라면 적지 않게 맛보았으니.”
“투신이 있으니 든든하군. 얼마나 많은 놈의 골통을 부술지 기대되오.”
그렇게 투신 바르투이를 영입한 아이반은 그대로 남쪽으로 움직여 악마의 땅을 엿보려고 했으나 제르세우스가 붙잡았다.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이다.
“남쪽은 이미 반쯤은 마계나 다름없다. 함부로 들어갈 곳이 아니야.”
제르세우스는 온전히 권능을 가진 드래곤이기에 세상의 흐름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남쪽에서 세계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세계 주권을 빼앗기고 파멸의 마왕을 위한 제단마저 만들어졌으니 최후의 순간이 아니면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마왕의 소환을 막기란 어렵고, 그 땅을 차지한 악마와 악신을 몰아내기도 어렵다. 그러니 오히려 다른 쪽을 공략하기를 권했다.
“저들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아야 한다. 나는 다른 동족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벌어 볼 테니 그사이 힘을 모아라.”
드래곤들이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넘어오는 것을 방해하는 동안 소외되고 잊힌 자들을 묶으라고 했다. 악마와 악신이 그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이쪽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천상의 아홉 신격이 버린 자들이다. 그러니 언제든지 어둠의 세력과 손을 잡을 수가 있다.”
깊은 바다의 폭군이 악신과 손을 잡았다. 또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나 제대로 세상의 질서가 생기기 전에 활약하던 고대 신들은 선악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다. 만약 악마나 악신이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그들을 깨우고 손을 내민다면 거부할 리가 없겠지.
당장 보이는 세력 구도만 보자면 아군이 유리하나, 잠재적인 적까지 고려하면 결코 앞선다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쪽이 항상 불리한 법이었다. 열 번, 백 번을 잘 막아도 한 번 뚫리면 그걸로 끝이니.
“큰 싸움을 하기 전에 주변 정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 이제 세상에 선을 긋고 적아를 분명히 할 때가 되었다.”
아군이 될 수 있다면 끌어들이고, 적이 될 것 같으면 때려죽여라. 적어도 그들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군.”
아이반이 긴 한숨을 내쉬자 제르세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의 운명을 논하는 일에 관망은 곧 죄악이다.”
드래곤은 세계의 조율자였다. 창조주가 남긴 분신이자 화신이기에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의 안전과 발전이었다. 드래곤은 평소 그 무엇에도 관여하지 않는 관찰자이나, 세계와 관련된 일에는 그 누구보다 단호했다.
세계의 존망이야말로 가장 중대한 가치이니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이자 과정에 불과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두는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참으로 무거운 이야기였으나 아이반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싸우다가 뒤통수에 칼 박히기 싫으면 해야지.
“그렇다면 서둘러라. 세상이 이미 기울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게 빨라질 것이다.”
* * *
푸드득!
흙과 나무로 된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아이반 앞에 멈춰 섰다. 한참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무척이나 익숙한 기운이 흘러나오기에 막지 않았다.
탁!
바닥에 내려앉은 새가 꿈틀거렸다. 주변 흙과 나뭇가지, 잎을 집어삼키고 덩치를 불렸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늙은 오크의 모습이 되었다.
“성공한 모양이군, 대단히 강렬한 존재감이야.”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바르투이를 흘깃 보면서 말하자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개했다.
“투신 바르투이요. 함께하게 되었소.”
“바르투이, 예전에 카락취에게 들은 적이 있다네. 대단히 훌륭한 전사라던데 결국은 신이 된 모양이군. 투신이라, 참으로 놀라운 신명이야.”
투신(鬪神), 싸움의 신.
신명은 곧 그 신격의 성격과 권능을 나타내는 이름이니 투신이란 싸움 실력이 하늘에 닿아 초월자가 되고도 남는다는 증명이었다.
유일한 신명은 아니었으나, 천상에서도 가장 강하고 위대한 투사만이 얻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이름이었다.
모든 권능이 오로지 싸움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니 투신보다 강한 자는 있어도 투신보다 잘 싸우는 자는 없었다.
“그쪽은 어떻소? 복수자들은?”
“상황이 썩 좋지는 못하지만, 최악은 피했다네. 복수자들이 거칠어도 단단히 경계를 세우니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하더군.”
그러면서도 테잔의 표정이 밝지는 않았다. 다른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동맹의 영역에 악마의 기운이 짙어. 몇몇 부족은 그에 물들었다가 간신히 떨쳐 냈네. 하마터면 큰일이 벌어질 뻔했지.”
“악마의 기운이? 어떻게 들어간 거요?”
“저주받은 토템이 발견되었어. 천천히 전사의 정신을 집어삼키고 타락시키는 지독한 물건이더군.”
“음습한 모략의 수작이겠지?”
“아마도. 내 생각에는 신뢰의 연합도 비슷한 수작이 있을 것 같아. 종족 연맹은 괜찮을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