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38
작은 동산만 한 크기, 두껍고 거친 가죽과 날카로운 이빨,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는 섬뜩했고, 흘러나오는 존재감은 강렬했다.
그동안 겪어 왔던 자들과 달리 쇠약한 기색이 없는 동물신에 악마는 몸을 떨었다.
“진실로 우리의 제안을 거절하였는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사악한 마력을 뿜어내며 소리쳤다. 그의 도끼가 마치 타오르는 듯 강렬하게 빛났다.
– 제안? 무슨 제안을 말하는 거지?
“···뭐?”
사기가 더 떨어지기 전에 공격을 지시하려던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멈칫했다. 아예 모른 척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당신을 찾아온 악마가 있었을 텐데.”
– 건방진 놈이었다. 감히 나의 땅에서 나를 무시하다니.
짙은 숲의 왕이 태연하게 말했다.
기분이 나빠져서 죽였노라. 너무나 하찮은 놈이라 이야기를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노라.
그런 이유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악마들은 모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놈이 건방지면 죽어야지. 하찮은 놈이 떠드는 것을 강자가 들을 이유가 없지.
쉽게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 인간의 몸을 빼앗아 활동하는 기생 악마를 통해 접촉했다. 그러나 사실 악마 중에서는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그놈들이 너무 약하다는 이유였다.
애초에 대충 쓰고 버리는 편지 봉투처럼 다루긴 했지만, 아예 내용조차 전달하지 못해서야 가치가 없었다.
– 대체 무엇을 제안한다는 것이지?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도끼를 내리고 입을 열었다. 그냥 싸우면 득보다 실이 컸다. 이야기로 끝낼 수 있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하고자 한다. 천상의 건방진 신들, 녹색 만신전의 역겨운 놈들, 이 땅의 하찮은 녀석들을 모두 몰아내고 주인이 되고자 한다.”
잃어버린 힘을 되찾고 싶지 않으냐, 자신을 버린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으냐, 참을 수 없는 분노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간교한 혀를 놀렸다.
우리와 함께하면 이 좁은 감옥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겠다고 속삭였다. 위대한 초월자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떠들었다.
“물론 서로의 믿음을 위해 약간의 조치는 있어야겠지.”
웃기는 일이었다. 악마가 믿음을 논하다니. 그러나 신뢰할 수 없는 사이이기에 더욱 믿음이 중요했다. 목줄이 없다면 어찌 서로를 믿겠나.
– 더러운 악마 놈이 감히 내 땅에 와서 함부로 지껄이는데 징치하지 못하다니, 나도 참 하찮은 신세가 되었어.
짙은 숲의 왕이 한참이고 침묵하다 그리 중얼거리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다시 도끼를 들었다. 언제든 싸울 준비를 했다.
“거절한다는 말인가?”
짙은 숲의 왕 옆에 고개 숙이고 있는 자들이 영 거슬렸다. 그동안 몬스터가 보이지도 않더니, 저리 강한 권속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록 동물신의 존재감에 가려 있었으나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부하들이 저들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여차하면 몸을 빼야겠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리 생각을 정리할 때 짙은 숲의 왕이 말했다. 악마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 받아들인다. 이 좁은 감옥은 너무나 답답해. 이곳을 벗어나 옛 힘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악마가 아니라 그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
그리하여 짙은 숲의 왕이 어둠의 세력에 합류했다. 한때 울창한 숲을 다스리던 위대한 동물신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과 함께한 권속을 이끌고 던전을 뛰쳐나왔다.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던 짙은 숲의 왕은 악마에게 물었다.
– 이제 너희와 함께 움직이면 되느냐?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지?
“일단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려라. 적당한 시기에 움직일 것이다.”
짙은 숲의 왕과 악마는 계약을 맺었다. 던전을 뛰쳐나온 동물신의 목에 새로운 목줄이 생겼고, 악마는 만족하며 떠났다.
우드득-
악마가 모두 사라지자 짙은 숲의 왕 곁에서 고개 숙이고 있던 권속 하나가 일어났다. 힘없이 늘어지고 쭈글쭈글하던 피부가 팽팽하게 변하고, 잔뜩 굽은 허리가 꼿꼿하게, 안으로 말려 있던 어깨가 넓어지고 근육이 가득 들어찼다.
순식간에 왜소한 늙은 마법사에서 건장한 전사의 몸으로 돌아온 아이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라,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음흉한 놈이군. 힘은 제법이나 어설프게 머리만 굴리니 대악마가 되기는 글렀어.”
아마도 선택적 분노 조절 장애, 약한 자에게는 참을 수 없겠지만, 자신의 대가리를 깨버릴 수 있는 강한 자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피하는 모양이다.
악마의 이름은 곧 정체성이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는 이름답지 않게 너무나 잘 참았으니 대악마가 되기는 요원해 보였다.
아이반에겐 다행스러운 이야기였다. 정말로 대악마 수준이었다면 아무리 온갖 마법으로 기척을 숨기고 있어도 초월자인 것을 가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
– 그, 이러면 되는 겁니까? 악마와 악신이라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러면 나는 만만해 보이오?”
– 물론 그건 아니죠. 제가 어찌 그리 보겠습니까?
“연기는 훌륭했소. 참으로 위엄 넘치더군.”
악마가 급하게 끌어들인 동물신을 완전히 믿지는 않겠으나, 절반의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초월자의 영혼을 붙잡아 억누르는 술법이라. 참으로 지독하지만,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야.”
이곳에 초월자가 몇이고 신격이 몇인가? 악마의 술법이 아무리 지독하다 해도 마음먹고 목줄을 끊으려면 어렵지 않았다. 세계의 법칙을 다루는 드래곤과 마법의 신이 지혜를 빌려 주는 아이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 여러분만 믿겠습니다.
“알겠소. 그러니 행동만 똑바로 하시오. 이게 다 세계를 위한 일이 아니겠소?”
일행의 존재감을 최대한 억누르고 흘러나오는 힘을 짙은 숲의 왕이 내뿜는 힘으로 가장했다. 세상의 눈을 속일 수 있는 로키의 권능이 고위 악마를 농락했으니 악마들은 짙은 숲의 왕을 그 오랜 세월 잊힌 상태로도 완전히 영락하지 않은 대단한 동물신으로 여길 것이다.
“돌산의 군주도 슬금슬금 악마의 세력으로 집어넣어야겠어.”
돌산의 군주는 얼마 전 던전에서 보았던 괴물 고릴라였다. 역시 한때는 세상의 정기를 받아 격을 이루었던 동물신.
그렇게 던전을 돌면서 미리 빼돌린 보스를 하나씩 악마의 세력으로 집어넣고, 내부에서 힘을 모아 놈들을 뒤흔든다.
“적당히 세력이 모이면 승패를 조작해 발언권을 얻어야겠지. 항상 계획을 방해하던 우리를 새로 영입한 동물신이 물리치면 꽤 볼만하겠어.”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달의 여신 셀룬이 미간을 찌푸렸다.
“언뜻 그럴듯한 말이나 쉽지 않을 것이다. 영락한 동물신이 몇이나 되는 초월자를 물리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해.”
“아직 저들은 바르투이의 존재를 모르오. 권왕이 설마 투신이 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겠지. 그러니 천상에 원한을 가진 이름 모를 투신으로 꾸미면 충분할 거요. 거기에 더해서 우리 쪽에 배신자가 생겼다면 제법 훌륭한 그림이 될 테고.”
“배신자? 저 음흉한 놈들이 과연 그걸 믿겠느냐?”
“믿게 해야지.”
아이반은 사나운 이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그를 지켜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모르나, 할 말이 있소. 당신에게는 재미있는 이야기일 거요.”
그러자 사나운 이빨이 하늘을 바라보다 힘을 풀었다. 언제나 든든한 전사 같던 사나운 이빨의 몸놀림이 한껏 부드러워지고 매혹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날카롭고 단단한 눈이 웃음기를 가득 머금어 요염하게 휘었다. 손짓이 우아하고 살랑거리는 꼬리의 움직임마저 아름다웠다.
뱀신 모르나가 아이반을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그대는 참으로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구나. 나에게 배신자가 되어달라는 뜻이겠지?”
“그렇소.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면 그 누구보다 당신이 어울리니까.”
뱀신 모르나는 언제나 욕망이 우선이었다. 아군은 확실하나 어딘가 믿을 수 없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흥미를 위해서라면 자기 죽음조차 즐겁게 받아들일 터였다. 그게 모르나라는 신격의 본질이었다. 그녀라면 음습한 모략 역시 그럴듯하다고 여기리라.
“제법 괜찮은 역할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뱀신 모르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감히 신격을 연극의 배우로 활용하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명을 뒤집어쓰고 광대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엄하고 건방지구나.”
“그래서 싫소?”
그 말에 뱀신 모르나가 깔깔 웃었다. 더없이 시원하고 밝은 웃음이었다.
“그럴 리가! 길고 긴 삶에서 느껴본 적이 없는 즐거움이로다!”
배우는 모두 정해졌다. 관객은 이미 모여 있었다. 악마와 악신을 속일 준비는 모두 끝났다.
아스가르드의 사악한 마신들이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46화 거짓된 싸움
악마는 무척이나 은밀하게 움직였다. 중간에 피의 동맹이나 신뢰의 연합에서 눈치채고 던전을 처리해 날려 버리기 시작했으나, 그즈음엔 이미 상당수의 던전 보스가 악마의 편에 합류한 상태였다.
던전 보스 대다수는 자신이 영락하여 그 좁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악마에게 제압당해 강제로 끌려간 자들도 많았으나, 적지 않은 수가 던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악마의 손을 잡았다.
오래된 역사책에서나 드문드문 언급되는 옛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대륙은 극도의 긴장 상태로 변했다. 무엇이 적이고, 무엇이 적이 아닌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악마는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소환될 때까지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으나,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되었다.
작게는 망국의 기사와 저주받은 왕, 미쳐 버린 영웅부터 크게는 한때 세상의 법칙에 닿아 신이라 불리던 자들까지 새롭게 영입한 자들의 수가 많다 보니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각지에서 날뛸수록 대륙이 혼란스러워지니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의 소환에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탓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