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39
그사이 아이반의 입김이 들어간 자들이 악마의 세력으로 하나둘씩 들어갔다.
짙은 숲의 왕을 시작으로 돌산의 군주, 하늘 산맥의 주인, 아홉 고개의 현자, 흐린 안개의 포식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영락하기 전에는 신이나 초월자였던 강자들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취해서 날뛰던 존재였다. 그러나 세계 평화와 안정이라는 대의를 따라 기꺼이 뜻을 함께했다.
오랜 세월 아스가르드에서 실사용으로 성능을 증명한 예절 주입기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정의감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이 다시금 어둠에 물들어서 정말로 악마에게 붙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악마가 걸어 놓은 제약보다 더 지독하고 강한 계약이 그들의 영혼을 붙잡고 있으니 쉽게 벗어날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그 계약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머나먼 이계에 존재하는 동방예의지국의 가르침과 아스가르드식 애정을 받은 자들이 스스로 목줄을 걸기를 원했다.
“아주 숭고한 희생이었소. 위대한 결정이었지. 나는 망설였지만 그들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소.”
아이반이 짐짓 감동했다는 듯 그리 말하자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잘도 자발적이었겠군. 그 감동의 현장에 내가 없었던 것이 무척이나 안타깝네.”
“그러게 말이오. 아주 즐겁, 아니, 감동적인 장면이었지.”
낮게 웃은 아이반이 표정을 가다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동맹은 어떻소? 악마의 수작은?”
“개판이야. 수백 년 전에 죽은 옛 대전사가 살아나서 악마를 부르짖으며 날뛰다가 제압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어. 몇몇 부족이 그에 호응하다가 쓸려 나갔고, 카르타크의 주름이 깊어졌지.”
사방에서 터지는 던전과 악마와 손을 잡은 옛 존재들, 사악하고 지독한 유혹에 흔들려 타락한 아군들까지.
세상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등장하면 더욱 암울해지겠지. 그 전에 할 수 있는 일은 해야만 했다.
“라인하르츠 공작이 첫째 황자가 악마와 손을 잡은 증거를 확인했다고 했소. 곧 움직여서 그 세력을 뽑아낼 거요. 그때 동맹도 같이 움직여 악마를 압박했으면 좋겠소.”
“그사이 연극을 시작하겠다는 소리군. 알겠네. 그러면 델피노는? 성황청과 신뢰의 연합은 어떻게 행동한다던가?”
“성황청은 악신이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한다고 했소. 다른 세력은 각자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만 해도 바쁘지.”
서부 연합 왕국은 아직 깊은 바다의 폭군이 남긴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다. 성황청 이단심문관이 수많은 이단을 적발해 목을 베었지만 그러고도 완전히 뿌리 뽑을 수가 없었다.
어수선한 국내 상황을 정리하는 것만 해도 오래 걸렸다. 그들과 노르드 전사들은 부지런히 서쪽 바다를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악신의 잔당들을 정리했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강철 모루는 다른 드워프 왕국과 힘을 합치고 있소. 드워프의 자유로운 미래를 위해 기꺼이 가시밭길을 걸었던 위대한 자, 소두린이 남긴 의지를 따라서 드워프는 다시 하나가 될 것이오.”
소두린은 길고 긴 삶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우며 무언가를 남겼다. 아이반 역시 그가 무엇을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득한 옛 시절부터 전해지던 드워프의 삼신기를 능가할 만한 보물이 탄생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힘의 망치 갈라로자, 대지의 방패 팔그로인, 불의 장갑 탈라스함.
드워프의 세 왕국, 강철 모루와 은빛 용광로, 청동 망치는 각자 신기를 하나씩 나눠 가지며 갈라졌으나, 이제 그것들을 능가하는 새로운 보물이 나타났으니 드워프의 세 왕국 역시 하나가 될 터였다.
“위대한 자의 의지는 이어지기 마련이지.”
“엘프와 수인 연맹, 나가 왕국과 리자드맨은 곧 바쁠 예정이오.”
“악마와 악신을 속여 넘길 연극을 말하는 거겠지. 부디 자네의 그 음흉한 계획이 성공하길 빌겠네.”
“신성한 계획은 성공할 것이오.”
배신과 협잡, 사기, 폭력, 패륜. 세상이 모든 쓰레기 같은 것들이 바로 아스가르드의 전통이었다. 그러니 아스가르드의 화신인 아이반에게는 그게 바로 신성함인 셈이다.
‘쯧, 어쩌다 이리 물들었는지 모르겠군.’
빌어먹을 오딘, 빌어먹을 로키, 빌어먹을 토르.
아무튼, 아스가르드 놈들이 문제였다. 아스가르드의 화신이자 아홉 세계의 후계자이니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전통을 이어갈 수밖에 없지 않나.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고, 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고 했다. 주변 환경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다.
“이래서 부모님이 그렇게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했는데. 역시 옛말이 틀린 것 하나 없어.”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리자 등에 새겨진 위그드라실의 문양에서 번개가 솟아나 억울하다는 듯 찰싹찰싹 때렸다. 물론 아이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테잔이 분신을 거두자 흙과 나무, 잎사귀가 되어 사라졌다. 그것을 바라보던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겠소. 서두릅시다.”
투신 바르투이는 힘을 숨기고 짙은 숲의 왕 곁에 남았다. 작전을 시작하면 알아서 끼어들 것이다.
과연 그가 연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말없이 덤벼들기만 해도 대충 이야기 진행은 될 테니 상관없었다.
일행은 빠르게 움직여서 자리를 잡고 신호를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뒤, 라인하르츠 공작이 첫째 황자가 악마와 손을 잡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제국을 다시 하나로 만들겠다며 공격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피의 동맹이 움직였다. 악마의 수작을 털어 내고 내부를 정리한 뒤, 금방이라도 대악마를 죽일 것처럼 진격을 시작했다.
숨죽이고 있던 일행도 칼을 뽑아들었다. 짙은 숲의 왕이 은밀히 전해 준 정보를 통해 악마와 손을 잡은 옛 초월자의 위치를 알아내고 습격했다.
카아아악!
숲으로 숨어 들어간 화전민 마을 하나를 자신의 간식거리 삼아서 잡아먹던 영락한 초월자, 미쳐 버린 지네 괴물이 당황스럽게 고개를 돌렸지만, 묠니르가 녀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치지직!
쾅!
두꺼운 키틴질 외골격이 깨지며 녀석의 핏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나무가 시들고 땅이 썩어 가는 것을 보니 아주 지독한 독기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아이반의 독 내성은 이미 초월자 중에서도 뛰어난 편이라 이 짙은 독기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토르조차 아홉 걸음을 겨우 걷고 쓰러졌을 정도로 끔찍한 요르문간드의 독이라면 몰라도, 이 정도는 약간 목이 따끔한 탄산음료나 다름없었다.
부우웅-
다시 돌아온 묠니르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리던 아이반이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빛이 사라진 채 멍하니 있던 화전민들이 지독한 독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살려 보려고 노력이라도 해봤겠지만, 애초에 영혼은 이미 빨아 먹히고 꼭두각시 상태로 숨만 쉬고 있던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 너, 너는 대체 누구냐!
묠니르에 맞아 쓰러졌던 지네 괴물이 벌떡 일어나 아이반에게 덤벼들었다. 썩어도 한때는 초월자였다고 그걸 버틴 모양이다.
쉬이익!
공간을 뚫고 날아간 어두운 용의 발톱이 녀석의 몸에 큼지막한 구멍을 뚫었다. 마력을 머금고 길고 두꺼워진 어두운 용의 발톱이 마치 못처럼 지네 괴물을 바닥에 박아 버렸다.
– 으아아아!
녀석이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서 지네 괴물의 새끼들이 바글바글 기어 나왔다. 웬만한 저택도 우습게 휘감을 수 있는 어미 괴물에 비하면 작았지만, 녀석들도 어른 몸통만 한 크기였다.
피우웅!
이레인이 정령 화살을 쏘아 새끼 지네를 터트렸다. 그 앞에서 사나운 이빨이 방패를 내리찍어 용의 불길을 퍼트렸다.
화르륵!
땅이 녹아내릴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퍼지자 새끼 지네들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타올랐다. 그사이 어미 괴물은 창에 꿰뚫린 자신의 머리를 끊어 내고 새롭게 만들고 있었다.
스스로 머리를 잘라 내고 새롭게 만들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재생능력이었다. 그러나 급격하게 힘이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옛 초월자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수준이었다.
잃어버린 힘을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었으나, 그렇게 쌓은 힘은 너무 난잡하고 지저분했다. 억지로 덩치만 불렸을 뿐, 영혼의 격이 흐려지기만 할 뿐이다.
한때 초월자에 닿았던 자가 지금은 그저 험상궂은 괴물에 불과했다. 초월자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힘으로 격을 이루지 못한, 숭배자를 찾지 못하고 잊힌 옛 신의 끔찍한 최후였다. 어떻게든 힘을 잃지 않으려고 발악한 결과는 더욱 빠르게 추락했을 뿐이다.
스걱!
달빛이 스치고 지나가니 녀석의 몸이 조각조각 갈라져 흩어졌다. 재생력이 뛰어나 보이지만 몸이 서른 조각이 넘게 나뉘어도 회복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달의 여신 셀룬이 마무리를 지으니 아이반이 피의 검 브리카를 뽑아서 집어 던졌다.
탁!
피의 검 브리카가 갈라진 녀석의 육신을 파고들어 흩어지는 힘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그 더럽고 난잡한 기운을 순수한 힘으로 만들기 위해 몇 번이고 되새김질했다.
브리카와 영혼 일부를 공유하는 사브리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으음,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구나.”
세계를 만든 창조주의 화신이 느끼기에 이 기운은 너무 질이 떨어졌다. 아무리 탁한 부분을 걸러 내고 걸러 내서 깨끗하게 만든다고 해도 생리적인 거부감이 드는 모양이다.
이걸 그대로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면 기겁해서 말리겠으나, 잠시 품고 있다가 일회용으로 쓰기에는 유용하니 참을 뿐이다.
옛 초월자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싱거운 적이었다. 하긴, 초월자가 셋이나 몰아치는데 버티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했다.
“참으로 허무한 최후로군. 이러니 그 많은 자가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거지.”
다시금 초월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 세상을 손에 쥔 것만 같은 기분, 그 빛바랜 영광을 잊지 못해서.
그게 다 뭐라고, 결국은 그게 다 뭐라고.
필멸자로 출발해 신격에 도달한, 플레이어가 캐릭터로 전락한 아이반은 그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일행은 빠르게 움직여서 지네 괴물과 비슷한 수준의 놈들을 셋이나 더 처리했다. 그러니 악마들도 얻어맞고만 있을 수는 없는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아 두었던 던전 보스 중에 정예 멤버만 뽑아서 함정을 파 놓은 것이다.
미리 깔아 놓은 수가 효과를 발휘한 것인지 아이반이 심어 놓은 자들이 제법 들어가 있었다. 그걸 확인한 아이반은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았지만,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노려보았다.
“영락한 자들이 모여 감히 나의 옷자락이라도 잡을 수 있을 듯싶은가!”
아이반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물론, 연극도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