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41
“뭐야! 갑자기 왜?”
“이것이 뱀신의 뜻이다!”
그리 소리친 사나운 이빨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한껏 몸을 부풀렸다. 예전 뱀신에게 받은 석화의 마안이 빛을 뿌리자 이레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를 토막 낼 듯이 달려들자 멀리서 보고 있던 달의 여신 셀룬이 가까이 다가와 그를 튕겨 냈다. 이레인을 보호하듯 앞에 서서 사나운 이빨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정녕 뱀신의 뜻이란 말이냐!”
“나는 뱀신의 대전사다! 그분의 뜻이 곧 나의 뜻이다!”
“그 간교하고 음흉한 자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달의 여신 셀룬이 검을 들어 올리자 공간이 쩍 갈라지며 뱀신 모르나가 나타났다. 깔깔 웃으며 자신의 대전사를 감싸 안고 한껏 비웃음을 담아 달의 여신에게 말했다.
“모든 것은 나의 흥미를 위한 것이니, 세상의 존망조차 여흥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찌 모르느냐?”
바닥에서 거대한 뱀이 몇이나 나타났다. 그리고 요사스러운 마력을 뿌리며 셀룬에게 덤벼들었다.
고위 악마를 몇이나 찢어 죽이던 사브리나가 뱀신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달의 여신 셀룬과 사브리나가 함께하자 뱀신이 밀리기 시작했으나, 또 남은 고위 악마와 영락한 옛 동물신들, 뱀신의 대전사 사나운 이빨이 덤벼드니 마냥 유리하지는 못했다.
치열한 싸움은 낮이 밤이 되고, 또 해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싸움이 이어졌다.
고위 악마와 던전 보스 대부분을 죽일 수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한 뱀신 모르나와 이름 모를 투신은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달의 여신 셀룬과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 아이반은 초월자도 쉽게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채 기절한 이레인을 챙겨 간신히 도망쳤다.
비록 목숨은 끊지 못했으나 함정은 성공적이었다. 손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초월자 셋을 꺾어 놓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악마는 승리감에 취해 소리 높여서 웃었다. 그걸 보면서 뱀신이 웃었고,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간신히 도망쳐서 은신처에 도착한 아이반 역시 껄껄 웃었다.
모두가 승리했다.
248화 둘이 아닌 이유
뱀신 모르나의 배신이 널리 알려졌다. 리자드맨들은 대규모로 요새를 쌓아 올렸으며, 나가 왕국은 종족 연맹을 탈퇴해 몰래 대수림을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수인 연맹과 충돌이 벌어져 양측의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중립 세력으로 대륙의 균형을 맞춰 줄 것이라 기대하던 종족 연맹이 크게 흔들렸다.
아이반은 믿었던 동료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입고 몸을 회복 중이었다. 신성이 흔들릴 정도로 심한 상태라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 알려졌으니 악마도 제법 흡족하겠지. 음습한 모략이라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소? 대악마와 악신을 몇이나 때려잡은 자를 반병신으로 만들었다는데 믿지 못하겠다고 배척할 수는 없겠지.”
속으로는 의심해도 겉으로는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성과를 보였는데 불합리하게 억누른다면 세력을 이끌기 어려웠다.
악마의 세력은 믿음과 충성이 아니라 공포와 보상으로 유지되는 집단이었다. 상대를 찍어 누를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음습한 모략으로는 힘들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넘어오기 전까지는 불안한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대악마 둘이 요정의 숲을 침공했을 때 그들을 막았던 뱀신 모르나는 눈칫밥을 제법 먹겠지만, 그녀가 그런 걸 신경 쓸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그때 침공한 대악마의 핵으로 지금의 육신을 만들었으니 고맙다며 오히려 깔깔 웃겠지.
애초에 악마의 세계에서는 배신, 협잡, 음모는 비난할 거리가 못 되었다. 상황에 따라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기를 반복하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으니까.
강할 때는 굽실거리다가 약해지면 얼른 등 뒤에서 칼을 박아 넣을 수 있어야만 훌륭한 악마인 법이다. 당하면 당한 놈이 문제였고, 속으면 속은 놈이 잘못이었다.
비록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 밑에서 함께하는 사이라고 해도 대악마들이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다른 녀석들이 복수하겠다고 덤벼들 리가 없었다.
“적진에 세력을 박아 넣는 것은 성공했소. 완벽하지는 않아도 겉으로는 꽤 그럴듯하지.”
뱀신 모르나, 투신 바르투이, 격을 얻어 법칙에 닿았던 동물신이 여럿.
그들은 어둠의 세력 내부의 제삼 세력이 되었다. 단독으로는 양쪽에 미치지 못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자들. 홀로 그 무엇도 결정할 수 없으나 한쪽에 힘을 더할 수 있는 자들.
이렇게 어둠의 세력도 세 개로 나뉘었으니 천하삼분지계가 다시금 펼쳐진 셈이었다. 아마 제갈량이 저승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할지도 몰랐다.
연맹, 동맹, 연합. 이렇게 대륙의 세력이 셋.
악마, 악신, 뱀신. 이렇게 어둠의 세력이 셋.
선과 악, 빛과 어둠. 둘의 대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셋과 셋이 싸우고, 또 여섯은 그 누구와도 완벽한 아군이 아니었다.
모든 세력을 갈라놓았으니 이제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며 힘을 쌓아라.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며 세상을 지배해라.
아이반의 귓가에 신성한 신의 음성이 들렸다. 사악한 마신의 속삭임이 전해졌다. 세상을 지배하고 싶지 않으냐 유혹하는 목소리였다.
아이반은 경건한 자세를 하고는 속으로 대답했다.
‘닥치시오. 턱주가리를 날려버리기 전에.’
그러자 신나게 떠들어 대던 로키가 시무룩한 기색으로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장난기 가득한 시선이 흐릿했다.
라그나로크는 장난의 신조차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었다, 세계의 몰락은 정해진 결과였다, 벗어나려 할수록 빠져드는 진흙탕이자 지독한 저주였다, 그렇게 외치면서 세상을 멸망시킨 것은 자의가 아니라더니 하는 꼴을 보면 영 의심스러웠다. 저 새끼 즐겼을지도 몰라.
하여튼 개소리를 지껄이는 마신을 무시한 아이반은 사브리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파멸의 마왕을 막는 건 잘 되고 있소? 드래곤들은 어떻소?”
세상에 남은 드래곤은 모두 열넷, 안개산을 만들고 무투가의 성지를 세운 바람 드래곤 제르세우스는 다른 드래곤을 모아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넘어오는 것을 방해하겠다고 했다.
지금 아이반이 수작을 부리며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도 결국은 파멸의 마왕이 넘어오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 그가 나타나면 하찮은 잔재주는 의미가 없었다.
“무너진 차원 방벽을 동족의 힘으로 다시 세우고 있다. 다른 곳은 뚫려도 마계만큼은 예전보다 더욱 단단하게 막았노라. 그러나 시간 벌이에 불과하다. 오래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적의 손에 세계 주권이 들어갔다. 차원 방벽이라 해도 세계 주권이 있다면 결국은 뚫릴 수밖에 없었다.
“쯧, 차라리 드래곤들이 몰려가서 용의 숨결이나 한 번씩 내뿜고 오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드래곤이 무려 열넷이었다. 물론 그중에는 종의 보전을 위해서 최후의 최후까지 움직일 수 없는 어린 드래곤이 다섯이고, 제대로 권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브리나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막강한 전력이 움직이면 지금 넘어온 악마들을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
“이미 모든 소환 의식이 끝났다. 동족이 막지 않으면 파멸의 마왕이 바로 넘어올 것이다. 그러면 대악마를 죽이고 고위 악마를 아무리 쓸어버려도 소용이 없겠지.”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 너무 불합리한 존재야. 그저 넘어오는 것만으로 모든 판을 뒤집을 수가 있다니.”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있는 곳이 곧 마계였다. 그가 넘어오는 순간 이 땅은 마계가 되는 것이다.
그건 악마를 묶고 있는 제약이 완전히 풀린다는 소리와 같았다. 진정한 파멸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죽었던 자들이 되살아나고, 온갖 사악한 저주가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럽고 미래가 칠흑보다 어두웠다.
비록 다섯 대악마 중 둘이나 죽었으나 그에 밀리지 않을 힘을 지닌 고대 악마들이 밀려올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천상은 그걸 알면서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와중에 세상이 모두 부서지고 폐허가 될 텐데 이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태생부터 초월자이자 신격인 그들은 먼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지금이 적을 완전히 처리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으나, 필멸자로 시작해 격을 이룬 아이반은 미래와 현재의 가치를 동격으로 둘 수가 없었다.
천상의 아홉 신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필멸자가 죽어 나가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겠나.
괜찮아, 줄 건 줘. 다른 거로 이득 보면 되니까. 오더가 그리 외칠 때 탑 포탑은 절대 줄 수 없다고 적에게 달려들던 옛 기억이 아이반의 머리를 흐릿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런 뜨거운 정의감을 지녔는지도 몰랐다. 그처럼 진정한 용기를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정글은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건지, 빨리 왔으면 이길 수 있는 것인데…….”
아이반이 낮게 중얼거리자 이레인이 지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수림의 수인 연맹은 지금 여기서 리자드맨, 나가 왕국과 대치하고 있어. 겉으로는 살벌하게 노려보면서 언제든 반전할 신호를 기다리고 있지. 제법 빠르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늦은 거야? 벌써 패배를 이야기한다고? 대체 음습한 모략이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그 말을 들은 아이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음습한 모략이 그냥 당하고만 있을 리가 없소. 대악마의 사악한 지혜가 분명 숨겨져 있을 테지, 혹시 그것이 남쪽 정글을 통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고민해 보았소.”
대륙의 남쪽은 열대우림, 정글이 무성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정글은 결코 인간에게 호의적인 곳이 아니었다. 온갖 독충과 짐승은 물론이고 몬스터가 우글거리니 평범한 인간은 쉽게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비록 내륙 남부를 마리난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제국은 인간 중심의 나라라 그 많은 정글을 전부 정복할 수는 없었다.
마리난 제국의 핍박을 피해 정글로 숨어든 이종족이 적지 않았다. 그중 많은 수가 지난 대악마의 침공 때 악마와 계약하고 그쪽 편을 들기도 했다.
“그때의 이종족이 모두 제압된 것은 아니오. 음습한 모략이라면 그들을 그저 전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음흉한 계획의 말로 활용하겠지.”
지금 대륙의 각 세력은 내부 정리가 한창이지만 그게 완벽하지는 못했다. 워낙 정신이 없이 일이 터지고 있어서 하나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워낙 치안이 좋지 못했다. 꼭 악마나 악신의 공격이 아니더라도 도적이 날뛰는 중이었다. 하룻밤 사이 어느 마을이 불타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듯 일어나고 있으니 고향을 잃은 떠돌이들이 한가득했다. 그들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 생각하는 것보다 각 세력에 스며든 악마의 계약자가 많을 거요. 과연 그들이 뭘 할 수 있을지, 지금 무엇을 준비 중인지 고민스럽소.”
“음, 그럴 수 있어.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복잡하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레인이 입을 다물고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세계수 네트워크를 통해 이것에 대해 알아보는 중이었다. 아마 수천, 수만의 엘프가 서로 토론하고 있을 거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지겹군. 머리만 굴리니 오히려 힘들어.”
아이반과 셀룬, 사브리나, 이레인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껏 판을 깔아 놓고 밖을 돌아다니다 멀쩡하다는 것이 알려지면 악마의 세력에 숨어든 자들이 난감할 테니까.
일행은 오비도에게 부탁해 백색 마탑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었는데, 그건 백색 마탑이 분석과 관측에서는 대륙 최고의 마탑이었기 때문이다.
사방으로 이어진 정보망과 관측 도구로 대륙의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가 있고, 동시에 적의 눈을 가릴 수 있는 무수한 마법진이 가득했다. 일행이 한껏 기운을 억누르고 있으면 신격의 존재감조차 숨길 수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있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대접하는 것도 오비도가 늙은 몸을 이끌고 열심히 뛰어다녀야만 했지만, 그는 오히려 행복하게 여겼다. 초월자가 돌아가며 한마디씩 조언을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초월자의 가르침은 가장 작은 것조차 극히 귀한 것이었다. 오래된 마법서의 한 구절을 얻기 위해 십 년을 노력하고 범죄조차 마다치 않는 것이 마법사였는데, 심지어 마법의 시초라는 드래곤과 마법의 신을 등에 지고 있는 아이반의 말이니 그보다 큰 기연이 없었다.
대악마 앞에서도 냉정히 마법을 짜내던 백색 마탑의 주인, 오비도가 바들바들 손을 떨면서 일행의 한마디, 한마디를 모조리 다 받아 적었다.
그는 일행의 조언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최상급 마법 스크롤을 만들 때나 쓴다는 드레이크의 가죽과 레플라 연금 수액을 기록용으로 쓰고 있었다.
아이반은 여러 가르침을 받았기에 자신이 격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서 배움을 베푸는 것에 제법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수업은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누군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표정이 영 좋지 못한데.”
언제나 철벽처럼 단단해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라인하르츠 공작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 강철 같은 사내의 표정이 흐렸다.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