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43
“대단치는 않은데, 우선 이거라도 쓰려면 쓰라고. 나중에 뭐, 시간이 나면 따로 장비를 만들어 주든가 말든가 할 테니까.”
그 오만한 태도에 달의 여신 셀룬과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는 분노했다. 이깟 물건들로 감히 그 건방진 태도를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인가?
그러나 여신과 드래곤의 분노조차 삼킬 만큼 훌륭한 작품이었다. 물질적인 욕망에 초탈한 둘이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으니.
이 세상 유일한 난쟁이가 여신과 드래곤에게 당당히 내미는 장비였다. 격이 부족할 리는 없었다. 그는 실로 오만할 자격이 있는 장인이었다.
“잘 되었군. 이참에 모두 장비나 새로 마련하면 되겠어. 아, 그리고 혹시 대량생산도 가능하오? 발할라의 에인헤랴르 장비가 영 부실한 것 같아서 그러는데······.”
아이반이 그리 말하니 흐뭇하게 웃고 있던 포르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지금 내게 아스가르드에서 노예처럼 작업이나 하라는 겐가?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똑같군! 신이 되더니 아스가르드의 다른 자들과 다른 것 하나 없어!”
그 말에 아이반도 분노했다. 아스가르드의 신과 다를 것이 없다니, 그런 모욕적인 말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 소리치려던 아이반이 문득 자신이 아스가르드의 화신이자 황금 옥좌 흘리드스캴프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인헤랴르는 많아도 부족하고, 장비가 훌륭해도 만족스럽지 않소. 빌어먹을 오딘이 망한 세계를 넘겨 줬으니 어깨에 빚만 가득하니 언제 아홉 세계를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군.”
불타서 멸망한 아홉 세계는 포르니에게도 민감한 주제였다. 비록 그는 라그나로크가 다가오기 전에 목숨을 잃었다가 이 세상에서 부활한 몸이었으나, 어찌 그 지독한 전쟁과 참혹한 결과를 모르겠나.
“아홉 세계가 과연 다시 꽃필 수 있으리라 여기는가?”
“해내야지. 그게 아홉 세계의 후계자가 된 나의 의무요.”
그렇다면 난쟁이들의 세계, 니다벨리르가 부활할 수 있는 것인가? 스바르트알파헤임은 다시 만들어지는가?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한 번 내버렸던 의무였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책임이었다.
포르니(Forni:고대의 존재), 그리 자칭하며 옛 이름을 잊고 살았던 최후의 난쟁이는 아이반을 보았다.
난쟁이들의 왕 흐레이드마르의 둘째 아들 레긴이 아스가르드의 화신, 아홉 세계의 후계자에게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렇다면 나의 동족을 불러오라. 죽음의 땅에 잠든 그들을 깨워 우리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면, 난쟁이는 다시금 아홉 세계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250화 옛 세계
태초의 세계는 모든 것이 얼어붙은 니플헤임, 모든 것이 타오르는 무스펠헤임, 그사이에 생긴 커다란 구멍 긴눙가가프가 전부였다.
한없이 차가운 니플헤임의 강물과 더없이 뜨거운 무스펠헤임의 불길이 만나 짙은 안개가 되었고, 그 안개에서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와 태초의 거인 이미르가 태어났다.
태초의 거인 이미르는 아득한 세월 잠만 자다 배고프면 깨어나서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의 젖을 먹었다. 그가 겨드랑이로 흘린 땀에서 수많은 거인, 요툰이 태어났으니 이들이 바로 서리 거인이었다.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 역시 소금기 있는 얼음을 핥고는 했다. 거기서 최초의 신인 부리가 탄생했다. 부리는 보르를 낳았고, 보르의 자식이 오딘이었으니 신의 계보가 그러했다.
오딘은 두 형제와 함께 새로이 세상을 창조할 때 그 재료로 이미르를 사용했다. 태초의 거인을 죽여 그 육신으로 거대한 혼돈의 구멍 긴눙가가프를 메우고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심었다.
피는 바다와 호수가 되었으며, 뼈는 산맥이, 살은 대지가, 두개골은 하늘이 되었다. 그때 흘러나온 이미르의 피가 넘쳐 수많은 서리 거인이 죽었으니, 신과 거인의 악연 역시 이때 시작되었다.
“옛 신화에 이르기를 태초의 거인 이미르의 육신에서 나온 구더기가 변해 검은 알프가 되었다고 했소.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 손재주가 좋아서 무엇이든 만들 수 있었지. 흔히 난쟁이라 불렀소.”
노르드 신화는 이 세상의 신화가 아니기에 알려진 바가 적었다. 달의 여신 셀룬과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는 세상의 온갖 비밀스러운 지식이 가득했으나 그런 그들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아이반의 설명을 들은 셀룬은 힐끔 옆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쟁이라 불리기엔 덩치가 남다른 것 같은데…….”
포르니, 이제 버렸던 옛 이름을 되찾은 레긴은 2M가 훌쩍 넘는 거구였다. 거의 3M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 키에 딱 벌어진 어깨와 우락부락한 근육이 함께하니 절대 왜소하지 않았다.
저 정도면 오크를 넘어서 웬만한 트롤과 비교해도 그리 꿇리지 않는 덩치였다. 난쟁이라는 이름이 영 어색했다.
“노르드의 신들은 모두가 거인의 피가 섞여서 덩치가 대단하오. 위대하고 거대한 신들에게는 검은 알프들이 하찮고 조그마하게 여겨졌겠지.”
그래서 난쟁이라는 이름은 멸칭이었다. 검은 알프들은 그리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신들이 그들을 깎아내리고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라 여겼다.
신들에게 지독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레긴은 그 정도가 더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 난쟁이라 말한 것은 크게 자존심을 굽히는 일이었다. 동시에 동족을 되살리는 일이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내가 그대의 동족을 구할 수 있겠소? 이미 옛 세계가 멸망했거늘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오?”
아이반이 그리 물으니 레긴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비록 위그드라실이 불타서 무너지며 아홉 세계가 멸망했으나 모든 것이 사라진 건 아니다.”
태초부터 존재하던 무스펠헤임과 니플헤임은 무너지지 않았다. 무스펠헤임의 입구를 지키던 엘드요툰(eldjǫtunn:불의 거인)인 수르트가 불의 검을 들고 위그드라실을 불태웠을지라도 태초부터 존재하던 두 세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죽은 자들은 응당 헬로 가기 마련이고, 그곳은 니플헤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지. 멸망의 발톱이 위그드라실을 불태우고 세상을 갈라놓았을지언정 죽은 자들의 땅은 그대로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이반은 부정적인 표정이었다.
“결국 헬이 죽은 자들을 나글파르에 태우고 미드가르드로 진격하지 않았소? 그곳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연 예전 그대로일 것 같지는 않은데.”
로키의 세 아이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예언을 들은 오딘은 극도로 경계하며 그들을 억눌렀다.
거대한 늑대 펜리르는 절대 끊을 수 없는 끈, 글레이프니르로 묶어놓았고, 세계뱀 요르문간드는 태어나자마자 바다 깊은 곳으로 버렸으며, 여신 헬 역시 니플헤임으로 집어던졌다.
여신 헬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죽음의 세계 헬을 만들고 그곳에서 죽은 자들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겉으로는 아스가르드의 뜻에 복종하다가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자 죽은 자들로 군대를 만들어 미드가르드로 진격했다.
그러니까 죽음의 세계 헬, 헬헤임 역시 온전히 멸망의 전화를 피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레긴은 고개를 저었다.
“위그드라실이 무너지고 수많은 이가 죽었을 때 결국 도달하는 곳이 어디겠어? 죽음의 여신 헬라는 나글파르에 타지 않았다. 그들을 이끈 것은 거인 흐륌이었지. 헬라는 여전히 헬헤임에 남아 죽은 자들을 맞이하고 있어.”
“…확실한 이야기요?”
“비록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이곳에 있지만 나 역시 한때는 죽은 자였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그러면서 못마땅한 듯 아이반의 뒤쪽, 새로운 위그드라실의 문양을 흘깃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이걸 오딘이 모르고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아마 그 또한 오딘의 계획이겠지. 언젠가 그도 너에게 요청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죽은 자들의 땅으로 가서 그들을 되살리라고. 멸망한 아홉 세계를 모두 채우려면 그게 가장 빠르니까.”
아이반은 팔짱을 끼고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아스가르드의 가장 깊은 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오딘에게 물었다.
‘이게 사실이오?’
– 그렇다.
예전이라면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를 진행하기 바쁠 뿐 한낱 말의 이야기에 집중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황금옥좌 흘리드스캴프를 물려주고 무거운 짐을 털어 버린 오딘은 선선히 인정했다.
이제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는 아이반이 이끌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오딘의 눈에는 아이반이 그저 부족하고 한심하게 보이지만 예전처럼 막 다룰 수는 없었다. 의무와 책임을 넘겼다면 존중 또한 함께해야 했다.
–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네가 준비되었다는 확신이 없다.
짐짓 걱정하는 듯한 오딘의 말에 아이반이 피식 웃었다. 언제는 그리 자신을 챙겼다고.
‘알게 되었다면 미룰 수 없소. 약간의 여유가 생긴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을 테니까.’
이 세상의 파멸을 몰아내려면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가능한 모든 것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물론 어렵고 힘들고 지독하겠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그 무엇도 없었다.
“삶의 끝은 죽음이 아니고, 죽음 역시 또 다른 모험의 시작이라.”
그리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터트린 아이반이 동료를 바라보며 말했다.
“벌써 죽을 생각은 없소만, 잠시 저승에 다녀와야겠소.”
* * *
– 예? 죽은 자의 땅으로 간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떠나기 전 델피노에게 그리 연락하니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온갖 사건을 경험하고 놀랄 일이 없다고 여겼으나 그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리되었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미리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소.”
– 그, 언데드와 싸운다는 뜻입니까? 썩어가는 손아귀나 죽음의 인도자라도 부활했습니까?
“그게 아니라 진짜로 죽은 자의 땅에 가려 하오. 저승 말이지.”
이건 이제 싸움에 지쳤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말인가? 갑자기 왜? 물론 힘들고 지칠 만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리 강인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어떻게 말려야 하지? 지금 당장 달려가야 하나? 역시 테잔과 내가 떠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사나운 이빨도 이번에 뱀신 모르나를 따라 떨어지면서 아이반이 외로움을 느꼈나? 하지만 이레인이 있는데, 달의 여신 셀룬과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도 있는데…….
아주 복잡한 감정이 델피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걸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찌 대답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평생을 성직에 종사하다 보니 이런 상담이 처음인 것은 아니나 아이반이 그럴 줄은 전혀 몰라서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제법 재미가 있었으나 장난을 칠 주제는 아니었기에 아이반은 얼른 델피노의 착각을 정정해주었다.
“내가 자살하겠다는 뜻은 아니오. 죽음의 세계 헬헤임으로 가서 아홉 세계가 부활하기 위한 밑 작업을 하려 하오. 파멸의 마왕을 막는 것에도 제법 큰 도움이 될 테지.”
그렇다면 막을 수 없었다. 죽음의 세계가 위험하지 않을 리는 없지만, 신이 책임과 의무를 위해 그리로 떠난다는데 어찌 막겠나?
아스가르드의 화신, 아홉 세계의 후계자.
아이반이 무엇을 짊어지고 무엇을 목표로 해야만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델피노는 그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그런 뜻이었군. 알겠습니다. 부르신다면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소. 그곳은 이 세상과는 단절된 곳이라 다른 신의 힘이 닿지 않으니 함께해도 소용이 없을 거요. 내가 없는 사이 성황청과 신뢰의 연합을 잘 조율해 주시오.”
이레인도 잠시 떨어져 요정의 숲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세계수의 무녀 적성을 깨운 그녀는 요정의 숲에서 세계수와 공명하며 새로운 힘을 깨우칠 것이다.
아이반이 위그드라실의 새로운 묘목이 되어 세계의 씨앗을 품은 것을 보고 이 땅의 세계수 역시 그 비슷한 일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태초의 요정이 남긴 피가 그녀의 몸에 흐르니 세계수와의 공명이 성공한다면 고대 요정의 힘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있으리라.
태초의 일곱 요정과 고대 요정이 모두 떠난 뒤로 이 땅에 남은 엘프에게는 오랜 세월 세계수 이외의 초월자가 없었으나, 어쩌면 새로운 묘목이 생길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