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44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소. 아주 짧을 수도 있고, 제법 길 수도 있소. 늦지는 않겠으나, 그동안 부디 조심하시오. 음습한 모략의 수작이 제법 날카로우니.”
그걸 막기 위해 어둠의 세력에 뱀신과 투신, 수많은 동물신을 심었으나 완벽할 수는 없었다. 제국을 둘로 찢어서 가지고 놀던 그 지독한 모략이 걱정스러웠다.
– 신께서 그리 축복하시는데 어찌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시지요.
“뭐, 혹시나 내가 당신이 모시는 신이 아니라 축복이 약할 수도 있으니까. 아직 아룬이랑 협의를 못 했소.”
아이반이 그리 말하며 껄껄 웃으니 델피노 역시 걱정스러운 기색을 지우고 작게 웃었다.
– 빛의 주께는 제가 기도하여 따로 여쭤보겠습니다.
현재 상황과 악마와 악신의 움직임,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한 준비 등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아이반은 죽은 자의 세계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건 제법 긴장되는군.’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몸을 던지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으나, 아예 죽은 자들의 땅에 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건 죽음조차 한순간에 상태에 불과한 불멸자, 신들 역시 쉽게는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들은 먼저 대륙 북부, 노르드의 땅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서도 가장 깊은 곳, 얼음 골짜기와 거울 동굴로 향했다.
여전히 춥고 척박한 곳이었다. 멸망한 세계의 파편이 부딪혀서 세상을 할퀸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한 번 발키리들을 불러 정화했음에도 원혼이 가득한 골짜기를 지나 거울 동굴로 들어가니 볼바가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지요. 미천한 몸으로 다시금 뵙습니다.”
아무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건만 볼바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평온한 기색이었다. 과연 오딘조차 세상의 운명을 물을 정도로 신뢰한 예언자다웠다.
“오딘께서 결국은 선택하셨군요. 무거운 책임과 찬란한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때도 알고 있으셨소?”
“당신의 미래는 예언자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 어찌 선명하겠습니까? 그러나 오딘께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는지는 짐작하니 이리될 것을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볼바는 옛 세계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신은 아니나 그 어떤 신보다 신비로웠다. 도대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삶을 살았을 테니 꼭 미래를 보는 눈이 아니더라도 그 깊은 지혜만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지금도 왜 왔는지 알겠구려.”
“아홉 세계의 후계자가 아홉 세계의 파편을 찾았다면 다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볼바는 아이반에 예전에 닿지 못한 거울 동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옛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남아 있었다.
251화 안개의 세계
멸망한 세계를 탈출한 최후의 노르드인들이 도착한 곳이 얼음 계곡이었으며, 거울 동굴이었다. 이곳에는 아직도 옛 세계의 파편이 박혀 있었다.
차원을 뚫고, 서로 다른 법칙이 부딪히니 세상의 그 어느 곳보다 불안정한 곳이었다. 상식이란 전혀 통하지 않았다.
공간이 뒤틀리고 시간이 늘어났다가 줄어들었으며, 얼음보다 용암보다 뜨거웠다. 한 모금 공기가 세상의 모든 독보다 지독했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것이 산을 밀어내는 것보다 무거웠다.
필멸자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거칠었다. 옛 세계의 생존자들이 이런 곳을 넘어서 이 땅에 정착한 것은 실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이반 역시 격을 이루지 못했다면 감히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거다. 맨몸으로 차원을 넘는다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벽 너머의 차원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면 더욱.
“느낌이 영 이상하군.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무언가 달라지는 느낌이야.”
그리 말을 내뱉은 아이반은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이 제대로 귀로 흘러들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비틀린 공간과 법칙 탓에 소리조차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듯싶었다.
때때로 몰아치는 마력 폭풍이 온몸을 뒤흔들고, 제대로 밟을 것마저 없는 험한 길이었다. 그저 발키리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하염없이 걸을 뿐이다.
힐끗 뒤를 보았다.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는 셀룬과 사브리나가 저 멀리 멀어졌다가 코앞에 닿을 듯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이곳에서는 거리조차 절대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며 상대적이었다.
어쩌면 찰나의 짧은 순간, 어쩌면 억겁의 긴 세월이 흘러서야 옛 세계에 닿았다. 물질과 개념의 중간쯤에 있는 찌그러진 차원 통로를 벗어나 땅을 밟고 허리를 폈다.
지독한 길을 건너왔으나 아이반의 표정을 밝지 않았다. 옛 세계의 처참한 모습이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휘이잉-
메마른 바람에 매캐한 냄새가 밀려왔다. 재의 텁텁함과 죽음의 싸늘함이 가득했다.
‘라그나로크가 일어나고 세상이 멸망한 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당장 어제의 일만 같군.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어쩌면 진짜로 어제의 일인지도 몰랐다. 각 세계의 시간이 똑같이 흐르는 것은 아니니까. 특히나 이곳은 법칙이 무너져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이니 시간의 흐름이 멈춰 있었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만은 않았다.
아이반의 뒤를 따라 이 세상에 도착한 셀룬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게 멸망한 세계의 모습인가. 참으로 쓸쓸하구나.”
온 사방에 생명력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시커먼 재가 바람에 흩날려 하늘이 뿌옇게 보이고 말라비틀어진 풀과 나무만 가득했다. 아직도 불길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는지 뜨거운 열기가 간간이 밀려왔다. 그러다가 또 싸늘한 냉기가 몰아쳤다.
멸망의 잔해였다. 수명이 다한 세계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그 옛날 엿보았던 우리 세계의 참혹한 미래가 이러했다. 그토록 피하려 했던 파멸의 미래가 이곳에 있었구나.”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는 그리 평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잠깐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치지직!
휘이잉!
화르륵!
아이반의 등에 새겨진 위그드라실의 문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멸망한 옛 세계를 보니 미처 터져 나오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는지 아스가르드의 신들의 신력이 때때로 흘러나왔다.
평소라면 아이반도 요란 떨지 말라고 한 마디 쏘아붙였겠지만, 이곳까지 와서 평정심을 유지하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등으로 신들의 분노와 슬픔을 느끼며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대충 적응이 끝났으면 움직이겠소. 아직 가야 할 길이 머니까.”
놀랍게도 아직 그들은 니플헤임에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겨우 미드가르드였다. 이 모양이 되었지만, 인간이 살던 평범한 세계란 소리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일행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멸망한 세상 유일한 생명의 소리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기 시작하니 불타서 무너진 건물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가 가득했다. 인간의 것은 물론이고 커다란 덩치의 거인들마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완전히 썩어서 백골만 남거나 불타서 재만 흩어져 있는 경우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아득한 세월이 흘렀으나 마치 멸망의 한순간을 박제한 것처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일행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며 길을 걸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마을을 건너뛰며 멸망한 세계를 가로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더 빨리 움직이고 싶었으나, 길을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세계가 갈기갈기 찢어져서 공간의 연결조차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으로는 저 너머의 공간이 보여도 실제로는 단절된 경우가 태반이었다.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났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시간을 재는 것은 사실 무의미했다.
아이반은 이쪽 세계의 시간 흐름보다 저쪽 세계의 시간 흐름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차원 너머를 엿보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했다.
다행히 저쪽 세계의 시간 흐름이 무척이나 느렸다. 이 또한 유동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태양과 달이 사라지다니, 세계의 멸망이란 이리도 지독하구나.”
아침이 되었다고 제대로 해가 뜨지도 않았고, 밤이 되었다고 제대로 달이 뜨지도 않았다. 희끄무레하게 밝은 것이 한참이고 계속되다가 또 캄캄한 어둠이 또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셀룬은 달의 여신이라 그저 시커먼 하늘이 마냥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달이 없는 밤하늘을 계속 바라보았다.
“해와 달은 라그나로크가 시작될 때 바르그(vargr:괴물 늑대)가 삼켜버렸소. 스콜과 하티, 오딘을 잡아먹은 늑대 펜리르의 자식들이지.”
“해와 달을 삼키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위턱이 하늘 끝에, 아래턱은 땅의 끝에 닿아 그사이 모든 것을 먹어 치울 정도로 펜리르가 컸다니 그 자식들도 작지는 않았겠지. 전에 보았던 요르문간드가 펜리르의 동생이오. 요르문간드의 전성기 때는 세계를 한 번 휘감고도 부족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을 정도로 컸다니 집안 내력이겠지.”
애초에 요르문간드와 펜리르의 아버지인 로키의 출신이 요툰이었다. 노르드 신화의 거인족. 그러니 집안 내력이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요르문간드, 그 커다란 뱀신을 말하는 것인가? 확실히 대단한 신격이기는 했다. 제대로 육신이 없는 허신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때 이 땅의 가장 강한 투신을 죽인 것이 요르문간드요. 아마 전성기였다면 깊은 바다의 폭군이 날뛸 틈도 없이 단번에 집어삼켜 버렸겠지.”
천상의 아홉 신격은 아스가르드 신들이 허신 상태로 건너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만 한다. 만약 그들이 멀쩡한 상태로 차원을 넘어왔다면 악마니, 악신이니 하는 것보다 더 위험했을 테니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안다고, 한 번 세계를 말아먹어 봤으니 두 번째는 훨씬 쉬웠겠지.
탁!
문득 아이반이 걸음을 멈췄다. 지독하게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 속에 담긴 죽음의 기운이 섬뜩했다. 신격마저 절로 긴장될 정도였다.
“드디어 찾은 모양이오.”
태초부터 존재했다는 얼어붙은 세계의 기운이었다. 근처에 그리로 이어진 문이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근처에 다다르자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 질리는 막대한 사기가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한이 깊어도 너무 깊었다. 잡다한 원혼은 일행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기겁하며 도망치거나 녹아내릴 터인데, 오히려 초월자 셋의 존재감을 억누를 정도로 강렬했다.
하긴, 아홉 세계의 모든 생명이 끊어졌다. 멸망의 분노와 절망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신격이라고 대단하겠나.
짙은 감정이 모여 세상을 움직일 정도였다. 법칙이 절로 뒤틀렸다. 만약 이것에 제대로 된 자의식만 있었다면 순식간에 대신격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상이 멸망하면서 미처 정화하지 못한 무거운 감정들이 휘몰아치다 일행을 발견하고 들이닥쳤다. 그에 물든 원혼들이 산자를 물어뜯기 위해 덤벼들었다.
세상 모든 분노와 절망, 공포가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방향성 없이 날뛰는 힘이었으나, 질은 어쨌든 크기만큼은 비슷한 신성을 지닌 대악마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이었다.
우웅-
인벤토리에서 창이 몇 자루 나와 아이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날카로운 마력과 웅장한 신성을 멸망한 세계의 한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힘으로 밀고 들어가야 할 것 같군. 내가 먼저 시작하겠소.”
아이반은 대답을 듣지 않고 창을 날렸다. 검은 안개와 같던 원한이 쩍 갈라졌다가 그보다 더 많은 원한이 뭉쳐 밀려들었다.
“토르!”
아이반이 소리치자 하늘이 번쩍이며 벼락이 떨어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천둥신의 벼락이 원한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