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47
“저희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하인과 하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일행을 헬헤임 가장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행동이 너무나 느려서 이게 걷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셀룬과 사브리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안내인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니 조롱이라 느낀 듯했다. 그러나 아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이들의 정체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강글라티(Ganglati)와 강글로트(Ganglǫt). 둘 모두 걸음이 느린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헬라의 오래된 종자였다.
처음 셀룬과 사브리나는 그들의 느린 움직임을 무척이나 불쾌하게 여겼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오히려 더 느리게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였다. 지금의 속도조차 무척이나 빠른 것 같았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왜 그렇지?”
“죽음을 빨리 만나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지. 자연스러운 일이오.”
그렇게 대꾸하고는 아이반도 입을 다물었다. 점차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떨렸다. 의식하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권능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크고 웅장하지만 낡고 삭은 테이블 끝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이 죽은 자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여신 헬이었다.
육신의 절반은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미녀였으나, 다른 절반은 지독하게 썩어 가는 시체였다. 또 절반은 싱그러운 삶이 꽃피는 소녀였으나, 절반은 시들어 가는 노파였다.
인생의 정점과 결말,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여신 헬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느껴지는 강력한 압박감에 아이반이 이를 꽉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거리를 벌리고 묠니르를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더럽게 강하군. 셋이 달려들어도 이기기는커녕 도망이라도 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죽은 자가 많을수록 죽은 자들의 신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그 모든 생명이 그녀의 백성이 되었으니 지금 헬라는 라그나로크 이전보다 월등히 강했다. 초월자조차 경악할 정도였다.
대신격 중의 대신격. 홀로 죽음의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
“사라진 자들이 이리 나타나다니, 무슨 생각입니까?”
헬라의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청량했고, 그 누구보다 탁하고 거칠었다.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으니 꺼림칙하기만 했다.
“추하게 다른 세계로 도망쳤다면 영원히 숨어 있을 것이지, 어찌하여 돌아온 것입니까?”
그녀는 오랜 세월 아스가르드의 명령을 따랐으나 마지막 순간에 배신하고 죽은 자를 모아 미드가르드로 진격했다. 아이반 몸에 가득한 아스가르드의 기운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잃은 것을 되찾으러 왔소. 불탄 것을 새로 만들기 위해 왔소.”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아이반 너머의 위그드라실과 아스가르드를 바라보던 헬라의 눈이 움직였다. 그저 아스가르드의 전령에 불과하다 여겼던 아이반이 당당히 말하는 모습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한참이고 아이반을 보던 헬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로 모든 것을 넘겼단 일입니까? 이 하나의 나무를 위그드라실로 삼아 아홉 세계를 다시금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얼마나 욕심이 넘치는지, 얼마나 멍청하고 음흉한 자들인지 헬라는 잘 알았다. 그 오딘이 황금 옥좌 흘리드캴프를 넘겼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깟 예언으로 우리 남매를 버리고, 아버지를 고문했던 놈들이 한낱 필멸자 출신의 신에게 모든 것을 넘겼다고?”
“옛 전쟁은 끝났소. 원한의 고리는 끊어졌고, 신조차 그리 움직일 수밖에 없던 운명의 장난 역시 이제는 의미가 없소. 그러니 내가 옛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 새롭게 만들겠소.”
그 말에 헬라가 깔깔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미친 듯이 웃다가 정색했다.
“놈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면서 내게 원한의 고리가 끊어졌다고 말하는가? 아스가르드가 감히 이 땅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가?”
우웅-
헬라의 감정이 요동치자 막대한 기운이 뿜어졌다. 헬헤임이 그에 호응하며 아이반을 짓눌렀다. 생명이 날뛰고 죽음이 퍼졌다.
챙!
셀룬이 가장 먼저 검을 뽑았다. 사브리나가 바로 본신으로 돌아가 용의 숨결을 내뿜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반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말리며 대화를 계속했다.
“요르문간드는 이미 새로운 아스가르드의 일원이 되었소. 새로운 아홉 세계를 위해 돕기를 택했소.”
그러자 주변을 찍어 누르던 강렬한 기운이 사라졌다. 죽음처럼 고요한 침묵 속에서 헬라가 물었다.
“그건 아버지의 뜻이었느냐? 정녕 당신의 뜻이었습니까, 아버지?”
화르륵!
아이반의 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막대한 마력과 신력이 움직이고 아스가르드에서 지켜보던 로키가 불꽃과 함께 나타났다.
“으음!”
단번에 기운이 쪽 빨린 아이반이 신음을 삼켰다.
‘망할, 예고라도 하고 튀어나오지.’
그러나 로키가 나타난 것치고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그건 이곳이 죽은 자들의 세계이기 때문이었다.
항상 장난기 가득하던 로키가 모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것이 나의 뜻이었다.”
“납득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해야 합니까?”
“지독한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
장난의 신은 운명의 장난에 놀아나 세상을 불태웠다.
결투와 법의 신은 선언하고 싸울 오른손을 잃었다.
사랑의 여신 프레이야는 라그나로크가 일어나는 그 날까지 사라진 남편이나 찾고 있었다.
운명을 막기 위해 운명을 향해 달려가고, 가장 영광스러워야 할 자가 가장 초라하며, 전쟁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그렇듯 노르드 신화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모순이었다.
로키는 자신이 그런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 못마땅했다. 자신의 아이들이 마지막까지 괴물로 불리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라그나로크는 그의 손으로 일으켰으나, 그건 그의 선택이 아니었다. 운명이 그리하도록 몰아갔을 뿐이다.
장난의 시작은 자유로움이었다. 운명에서도 자유로워야만 했다.
“삶이 없는 죽음은 박제에 불과하다. 너는 이곳에서 영원하려 하느냐? 나의 딸아, 그것이 진정으로 네가 원하는 것이었느냐?”
로키의 말에 헬라가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가 말했다.
“나의 아버지, 과연 그 허약한 자가 미래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희망을 보여 주시지요.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든 이 분노와 원한을 씻어 낼 미래를 보여 주시지요.”
그렇다면 기꺼이 함께하리라. 이곳에 가득한 죽은 자들마저 다시금 기회를 얻으리라.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말에 대뜸 로키가 외쳤다.
“종말의 용 니드호그의 죽음으로 다시는 종말이 오지 않음을 증명하겠다.”
아이반이 깜짝 놀라서 로키를 바라보았다.
뭐, 이 새끼야?
254화 헬헤임
니드호그(Níðhǫggr)는 종말의 용이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뿌리를 갉아먹으며 지독한 독기를 내뿜어 땅을 썩게 한다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아스가르드가 멀쩡할 때도 퇴치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내버려뒀던 놈을 잡아 죽이라고? 웬만한 신과 요툰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아이반은 진심으로 로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억눌렀다. 아무리 그래도 딸 앞에서 아비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 딸이 모든 죽은 자를 지배하는 여신이라면 더욱.
“니드호그를 죽인다면 인정할 것이냐?”
로키가 당당하게 물으니 헬라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리고 한참이나 로키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이미 마음을 정하셨군요. 그래, 그렇다면 저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자가 진정으로 멸망한 세계를 되살릴 자임을 증명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죽음과 삶이 뒤섞인 혼탁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헬라는 일행을 내보냈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아버지 로키의 체면 때문인지 완전히 쫓아내지는 않고 자신의 성에 일행이 머물 수 있는 방을 내주었다.
방은 아주 넓었으나 쓸쓸했다. 호화로웠지만 낡았고, 깨끗했으나 텁텁하고 퀴퀴한 시체의 냄새가 가득했다.
“흐, 그러고 보면 내가 이곳에 묵는 건 이번이 처음이로군. 신선한 경험이야.”
로키가 킥킥 웃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 사이에 씁쓸한 감정이 언뜻 보였다.
예언을 겁낸 오딘의 명령으로 그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아주 끔찍하고 지독한 곳으로 버려졌다. 그러니 평범하고 다정한 추억이 없는 건 당연했다.
“그리 어색하게 서 있지 말고 앉지. 산 자가 엘류드니르에서 하룻밤을 지낼 일은 흔치 않으니 즐겨야지.”
엘류드니르(Éljúðnir:눈보라가 뿌려진)는 여신 헬의 궁전 이름이었다. 그 의미대로 참으로 싸늘하고 축축한 곳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머물기엔 너무나 좋지 않은 환경이다.
우웅-
여신 헬의 궁전에서 하기 적당한 짓은 아니었으나, 아이반은 신력을 내뿜어 그녀의 눈과 귀를 가렸다. 그리고서야 씹어 먹을 듯 거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오? 니드호그를 죽이겠다고?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아무렇게나 떠든 것이오?”
무언가 대책이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신력을 모두 털어서라도 이 땅에 토르를 불러와 로키의 대가리를 깨 버릴 테니까.
아이반이 두 번째 라그나로크를 각오하며 물으니 로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어차피 내가 할 일도 아닌데, 재미있는 조건…….”
아이반이 대뜸 묠니르를 집어 던졌다. 천둥신의 힘과 아이반의 힘이 더해져 대신격이라고 해도 무방비 상태로는 견딜 수가 없는 강렬한 공격이었다.
치지직!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