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48
아무렇게나 지껄이던 로키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거대한 번개가 묠니르에서 뿜어져 로키를 날려 버렸다. 여신 헬의 궁전 엘류드니르이 절반이 그대로 무너지…….
“…음?”
아이반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가 터졌던 로키는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절반이 무너진 엘류드니르는 멀쩡했다. 묠니르를 쥐고 거친 숨을 내뱉던 아이반은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환상이군. 눈치채지도 못했어.’
조금 그게 실제 있었던 일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세계를 농락하는 로키의 환술에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흥분하지 말라고. 그저 놀려 먹으려고 뱉은 말은 아니니까.”
로키는 분명 아주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히죽 웃는 꼴이 더럽게 재수 없었다. 어째서 아스가르드 신들이 그를 그렇게 싫어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제대로 설명해야만 할 거요. 조금 전 일로 토르도 제법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니까.”
셀룬과 사브리나는 짧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바로 옆에 있는 초월자들을 속였으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을 즐거운 듯 바라보던 로키가 어느새 술잔을 손에 쥐고는 말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라면 오딘이 말리겠지. 토르 같은 멍청이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지만, 오딘은 아니니까.”
그 말은 무언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걸 단번에 깨닫지 못한 아이반은 토르 수준의 빡대가리라는 소리였다.
아이반은 치욕스러움에 몸을 떨었으나 여기서 더 나가 봐야 자신의 부족함만 드러내는 꼴이었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설명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로키는 김이 빠졌다는 듯이 술잔을 뒤로 휙 집어던지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두 아이와 달리 헬은 아주 냉정하고 침착한 녀석이다. 다른 아이들은 아스가르드에 분노를 숨기지 않았지만 헬은 마지막까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성실하게 아스가르드의 명령을 따랐지.”
그리하여 여신 헬은 세계의 멸망을 불러온다는 로키의 아이임에도 죽은 자들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헬헤임을 만들고 이곳의 여신이 될 수 있었다.
예언을 듣고 극도로 경계하던 오딘마저 경계심을 풀고 믿을 만큼 자신을 잘 숨겼다. 여신 헬은 지극히 이성적이며 치밀한 자였다. 단순히 말 몇 마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만약 다른 것을 제시했다면 그 아이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니드호그의 죽음. 그 정도 되는 일이기에 인정한 거지.”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과하오. 지금 전력으로 니드호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이오?”
아이반이 항의하자 로키는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며 대답했다.
“니드호그는 명분이야. 진짜 죽이러 가지는 않는다.”
“그게 뭔 소리요?”
“니드호그는 당장 죽일 수 없어. 힘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이 땅에 없으니까.”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자 니드호그는 시체를 줄줄이 등에 지고 어딘가로 날아올랐다고 했다. 그 말대로 사라졌다면 니드호그가 이곳에 없는 건 당연했다.
“니드호그의 행방을 모르니 그것으로 시간을 끌겠다는 뜻이오? 니드호그가 이곳에 없다는 것을 헬라도 모르지 않을 텐데 어찌 그것을 받아들였소?”
그 말에 로키는 싱글벙글 웃던 얼굴을 지웠다. 아주 드물게 나오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효녀이기 때문이지. 제대로 아비 역할은 한 적이 없으나 딸은 아비를 잊지 않는군.”
로키의 말을 듣고 모든 분노와 원한을 단번에 버릴 수는 없으나, 또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기에 편법을 눈감아 주었다는 소리다. 하여튼 복잡한 집안이었다.
“그러니 대충 니드호그를 추적하는 척을 하면서 헬헤임에서 필요한 자들을 빼돌려라. 어차피 모든 자를 부활시키기 위해 온 것은 아니잖아? 그건 나중으로 미뤄 두고 일단 난쟁이들이나 챙기라고. 그 정도는 헬도 눈감아 줄 테니까.”
과연 로키였다. 저리 효심 깊은 딸을 속이고 이득을 챙길 생각이나 하다니. 대악마 음습한 모략이 들었으면 한 수 배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립 박수를 쳤겠지.
“그러면 그 니드호그라는 드래곤과 싸울 일은 없다는 뜻인가? 아주 강하다고 하던데.”
셀룬이 그리 물으니 로키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아. 언젠가 붙기는 붙어야겠지. 아마 피할 수는 없을 거다. 녀석이 어디로 간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한 아이반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욕설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지랄 났군. 니드호그가 저쪽 세계에 있다고?”
“니플헤임을 벗어난 니드호그가 무너진 세계의 잔해를 비집고 긴눙가가프, 그 태초의 공허로 가겠어? 아니면 수르트가 지키고 있는 무스펠헤임으로 가겠어?”
아스가르드 신들이 저쪽 세계로 몸을 피한 것처럼 니드호그 역시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간 게 틀림없었다. 적어도 로키는 그리 확신하고 있었다.
“니드호그가 나타났다면 저쪽 세계가 그리 조용할 리가 없소. 다른 이들이 모를 수가 없지.”
신이 다른 세계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아주 커다란 사건이었다. 허신 상태로 간신히 넘어온 아스가르드를 세계가 받아들인 것이 특별한 경우지 아무나 그렇게 넘어가고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런 존재를 알지 못한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 창조주가 남긴 화신이자 분신이 단호하게 말하자 로키는 한쪽 눈썹을 밀어 올리고는 되물었다.
“그때는 차원 장벽이 있을 때이니 세계의 허락이 없다면 넘어가기가 쉽지는 않았겠지. 그러면 다음 목적지는 어디겠어? 녀석이 도착할 만한 곳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저쪽 세계로 피한 것은 가장 가까운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쪽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세계는 무엇인가? 항상 접해 있는 장소가 어디인가?
천상, 녹색 만신전을 비롯한 신계, 정령계······.
“마계에 갔단 소리군. 망할.”
아이반이 낮게 읊조리자 로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있기에 적당한 곳이지. 본격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마계에 있던 녀석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신선한 시체의 맛을 잊을 리가 없다. 으적으적 씹어 삼키던 세계수의 맛을 어찌 외면하겠나.
오딘이 새롭게 심은 위그드라실을 맛보기 위해 침을 뚝뚝 흘리며 달려오겠지. 타향살이하는데 향수병이 얼마나 심하겠나? 고향의 맛을 지나칠 리가 없다.
“알아들었으면 얼른 밖으로 나가서 난쟁이나 챙기라고. 나는 잠이나 잘 테니까.”
일행을 내보낸 로키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우고 침대에 손을 올렸다. 차갑고, 매캐하고, 눅눅했다.
여신 헬의 궁전, 엘류드니르의 침대를 병석(病席)이라 불렀다. 그녀가 먹는 식탁의 접시는 허기(虛飢)였고, 나이프는 기아(飢餓)였다. 이런 곳에서 딸이 살았다.
“···새로운 세상은 다를 거다.”
로키는 아주 깊은 밤까지 잠들지 못했다.
* * *
엘류드니르를 빠져나온 일행은 헬헤임을 뒤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기운을 숨기고 은밀하게 돌아다니며 필요한 자들을 찾았다.
살아 있는 자가 감히 죽은 자의 땅을 들쑤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여신 헬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운을 숨긴다고는 해도 자신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래도 헬라가 내버려두는 것을 보면 로키의 말이 진실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참 신기한 땅이구나.”
한참이나 헬헤임을 돌아다니던 셀룬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방에 가득한 죽음의 기운과 달리 생각보다 지독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 생기 없는 망자였으나 이승과 아주 다르지도 않았다. 남녀노소 온갖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죽은 자가 모이는 곳이지, 죽은 자에게 벌을 주는 곳이 아니오. 그런 곳은 따로 있지.”
나스트론드(Nástrǫnd:시체의 해안)은 니플헤임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었는데, 살인과 간통을 저지른 자, 맹세를 어긴 자들이 그리로 향했다. 지붕에서 끊임없이 독액이 떨어지고, 뱀과 늑대에게 잡아먹힌다고 했다.
“나중에 한번 볼 수 있을 거요. 거기가 원래 니드호그가 머물던 곳이니.”
니드호그를 추격하는 척이라도 하려면 당연히 한 번은 그곳에 가야겠지. 직접 본 적은 없으나 썩 좋은 경험은 아닐 것이라 아이반은 확신했다.
‘그나저나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군. 무기를 들고 있기 때문인가.’
사실 헬헤임은 젊고 건장한 사내가 극단적으로 적었고,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용맹한 전사들은 모두 죽어서 발할라로 향하지 헬헤임에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발할라의 부름을 받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으나 라그나로크가 가까워지자 닥치는 대로 받아들였다. 거기에 헬헤임에 있는 자 중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죄다 죽은 자의 손발톱으로 만든 배, 나글파르로 징집해서 미드가르드를 향해 진격했고.
그러니 여기서 젊고 건장한 사내가 무장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말은 발할라에 불리지 못할 정도로 한심하고 나글파르가 징집하는 것을 포기했을 정도로 병신이라는 소리였다.
그 따가운 시선에 아이반이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할 때, 어느 골목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위대한 작품을 바라보는 장인의 눈이었다.
‘드디어 새로운 장비 노예……. 아니, 협력자를 찾았군.’
발할라의 전사들이 헐벗고 사는 시기가 끝난 것이 아주 기뻐서 저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255화 시체의 위에서
아이반이 손을 뻗어 골목에 숨은 자를 붙잡았다. 레긴과 달리 덩치는 평범한 인간의 수준밖에 안 되지만, 틀림없이 도크알프(Dǫkkálfr)였다.
“이, 이게 무슨……!”
남자가 깜짝 놀라며 소리치려고 하자 아이반이 낮게 말했다.
“보물을 알아보는 자라면 큰 소리를 내는 게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 것이라 믿소.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안내하시오.”
그러면서 레긴에게 받은 징표를 내밀었다. 레긴은 그 옛날 도크알프의 왕 흐레이드마르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징표로 삼으라고 내어준 것이니 이걸 알아보는 자라면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징표를 본 남자는 격렬히 반항하던 것을 멈추고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장비를 보고 평범한 자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이건 또 뭐야? 젠장, 따라오시오.”
일행은 남자를 따라 뒷골목을 지나 아주 깊숙한 곳까지 움직였다. 흙벽돌로 만든 초라한 집이었다. 그러나 일행의 날카로운 기감은 그게 그저 위장일 뿐임을 알아차렸다.
‘바닥이 뚫려 있군. 제법 규모가 커. 역시 난쟁이인가.’
일행이 바닥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단숨에 바닥까지 읽을 줄이야.
“세상이 망한 판에 징표를 들이댈 줄이야. 살아 있을 때는 기겁했을 텐데 죽은 지 오래라 그리 놀랄 것도 없군. 그 징표로 뭘 하겠다는 것이오?”
“도크알프가 필요하오. 나는 헬헤임에 있는 모든 도크알프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