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49
“허, 데려간다고? 대체 어디로? 드디어 헬헤임 확장 공사라도 하려는 건가?”
세상 모든 것이 죽어 버렸기에 그 넓은 헬헤임이 지금 포화상태였다. 오죽하면 아직도 헬헤임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겠나.
세상을 잃어버렸다는 절망감에 정신을 놓아 버린 망자가 수두룩하지만, 몇몇은 이제 세상 모든 자가 헬헤임으로 왔으니 이곳을 새로운 세상으로 삼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감히 여신 헬을 직접 찾아가 건의할 배짱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으나, 어쩌면 한동안 떠돌던 그 말이 죽은 자의 지배자에게 닿았을지도 몰랐다. 헬헤임의 모든 난쟁이를 찾을 정도의 일이라면 다른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이유라면 몇몇 동족이 나서기는 할 거요. 그러나 나는 그리 영향력이 있는 자가 아니라 제법 발품을 팔아야만 할…….”
“반드시 모든 도크알프를 모아 주시오. 헬헤임을 떠나 새로운 스바르트알파헤임으로 갈 것이니까.”
스바르트알파헤임(Svartálfaheimr), 뜻은 검은 알프의 세계.
흔히 생각하는 엘프, 료스알프(Ljósálfr: 빛의 엘프)가 하늘에 있는 알프헤임에서 산다면 도크알프는 지하의 세계, 스바르트알파헤임에서 살았다.
그러나 위그드라실이 불타면서 스바르트알파헤임마저 무너졌으니 이제는 그리워만 할 뿐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모든 도크알프가 죽어 헬헤임에 묶였으니 그 흔적조차 더듬을 수 없는 고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반이 그 이름을 꺼내며 떠나자고 하니 반갑기보다는 분노가 먼저 치밀어 올랐다.
“헛소리하는 것 보니 상종할 수 없는 자였군!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그런 거짓으로 우리를 농락한단 말이오!”
이미 한 번 죽은 몸이었다. 아이반이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남자가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냐? 우리의 형제자매를 모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나는 흐레이드마르의 아들, 레긴의 청을 받아들여 스바르트알파헤임을 새로이 만들기 위해 왔소. 스바르트알프가 없는 세계가 어찌 스바르트알파헤임이라 할 수 있겠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스바르트알파헤임은 이미 무너졌어! 모두 죽어서 헬헤임에 떨어졌거늘 어떻게 간다는 말이냐!”
악을 쓰면서 소리치는 남자를 바라보다 아이반은 숨겨 두었던 기운을 뿜어냈다. 등에 새겨진 위그드라실의 문양을 드러내고 신성을 가득 펼쳤다.
그리고 오만하고 오만한 자세로, 오만하고 오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홉 세계의 후계자이자 아스가르드의 화신이 자신을 내보였다.
“나는 발드르. 진흙에서 피어난 꽃이며, 재를 뚫고 나타난 희망이다. 새로운 세계의 초석을 쌓기 위해 죽음의 땅을 찾아왔으니, 응당 모든 자가 나를 따를지어다.”
남자는 아이반이 살아 있는 자임을 깨달았다. 또한, 위대한 신성을 품은 자임을 알아보았다. 그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는 무수히 많은 신격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발드르, 라그나로크 이후의 세상을 지배할 자!”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위그드라실이 불타고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했건만 이렇게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도크알프는 태초의 거인, 이미르의 시체에서 탄생한 존재이니 핏줄만 따지면 아스가르드의 신에 비해 그리 밀릴 것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기꺼이 무릎 꿇었다.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존중하는 의미였다.
“말하라. 다시 한 번 아홉 세계를 위해 망치를 들겠나? 기꺼이 그러겠나?”
“물론입니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알려라. 새로운 니다벨리르가 탄생했음을 알리고 합류하고자 하는 드베르그를 모두 모아라.”
난쟁이의 나라, 니다벨리르.
위대한 도크알프의 세계, 스바르트알파헤임.
그저 옛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워할 수밖에 없던 그곳이 부활하리란 소문이 은밀하게 퍼졌다. 예언된 아홉 세계의 지배자가 나타났다는 말이 헬헤임의 모든 난쟁이에게 전해졌다.
누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소리쳤고, 헛된 소문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얼마 전 여신 헬의 시종, 강글라티와 강글로트가 직접 헬헤임의 문을 열고 누군가를 엘류드니르로 안내했다는 것이 확인되자 모든 죽은 자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발드르,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찾을 때 일행은 은밀히 헬헤임을 빠져나와 밖으로 향했다. 여신 헬에게 니드호그를 추적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만 했기 때문이다.
굘 강을 거슬러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독기가 짙어졌다. 분명 니드호그가 떠나고 없을 텐데, 그래도 독이 옅어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참을 가다 보니 독기에 뒤섞여 썩은 냄새가 풀풀 풍겼다. 그건 굘 강의 상류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나스트론드(Nástrǫnd: 시체의 해안)는 온갖 죄지은 자들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살인한 자, 간통한 자, 맹세를 어긴 자들은 헬헤임에 갈 자격을 잃고 여기로 향했다.
태양조차 외면한 곳이라 지독하게 추웠고, 뱀의 등뼈를 엮어 만든 지붕에서 끊임없이 독액이 떨어지며, 니드호그와 독사, 굶주린 늑대들이 물어뜯었다.
“으흠, 여기가 전에 말했던 그곳인가? 확실히 썩 좋은 경험은 아니로구나.”
달의 여신 셀룬이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겨우 초입이오. 안쪽은 더 심할 거요.”
어찌나 시체가 많은지 제대로 땅을 밟을 수 없을 정도였다. 세상 모든 죄인이 단번에 죽었으니 나스트론드도 넘칠 수밖에. 지옥에 자리가 없어서 못 간다는 말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온갖 시체를 발판처럼 밟으면서 움직이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물컹했고, 끈적거리며, 아주 역겨웠다.
사아앗!
가끔 숨어 있던 독사가 머리를 치켜들고 달려들거나 늑대가 이빨을 들이밀기도 했는데,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지저분한 기분을 털어내듯 화풀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생각보다 덤벼드는 놈은 적었다. 워낙 먹이가 많이 널려 있으니 굳이 싸울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독이 바짝 오른 독사들은 모두 시체를 삼키느라 배가 불룩해서 움직이지 않고, 굶주렸던 늑대는 살이 포동포동 차올라 혀 내밀고 누워 있었다.
‘가장 지독한 지옥이 사방에 널린 공포와 절망을 감당하지 못하고 평화로운 땅이 되었군.’
아이반은 낮게 혀를 차고는 더 안쪽으로 향했다. 흐베르겔미르(Hvergelmir: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의 뿌리에는 세 개의 샘이 있었는데, 흐베르겔미르는 그중 하나로 세상 모든 물의 발원지이자 니드호그가 사는 곳이었다.
니드호그는 흐베르겔미르에서 머물면서 가끔 배를 채우기 위해 나스트론드로 내려와 시체를 씹고는 다시 돌아가곤 했다.
“…니드호그가 이곳을 떠난 이유가 있었어.”
세계수 위그드라실이 무너지면서 뿌리가 뽑혔고, 그 영향으로 흐베르겔미르도 사라진 모양이다. 옛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그저 깊고 깊은 공허만 가득했다.
긴눙가가프(Ginnungagap: 하품하는 심연), 창세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공허의 구멍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더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여기야말로 세계의 끝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공간이 요동치고 온갖 법칙이 혼돈으로 돌아가는 곳.
긴눙가가프에 맨몸으로 뛰어들면 신이라 해도 버티기 어려웠다. 이쯤에서 돌아가야만 했다.
한때 니드호그가 지낸 곳이니 뭐라도 건질 게 있지 않을까 남몰래 기대하던 아이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여기를 보았으니 다시 헬헤임으로 가서 난쟁이들을 챙겨 돌아가면 될 거요.”
그리고 다시 나스트론드를 지날 때, 일행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무기를 뽑았다. 섬뜩한 느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체가 가득한 곳, 망자가 독사와 늑대에 물어 뜯겨 다시 한번 죽어 버린 곳.
검붉은 핏물이 가득하고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한 기분 나쁜 공간이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섬뜩한 기운이 가득했다.
요툰.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모를, 끝도 없이 많은 요툰. 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가 너무 많다. 피해야만 한다.”
냉정히 상황을 분석한 셀룬이 그리 말했으나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피할 수는 없소. 여기는 세상의 끝이라 달리 돌아갈 길이 없으니. 입구가 하나이듯, 출구도 하나요.”
우웅-
아이반의 오른쪽 눈이 황금으로 빛났다. 헤임달의 초월적인 감각이 깃들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잡졸조차 능히 병사 수십을 감당할 수 있는 괴물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제대로 초월자의 격을 지닌 놈들이 수십을 훌쩍 넘었다. 종말이 따로 있지 않았다. 이곳이 종말이었다.
“저 많은 적을 우리가 모두 상대할 수는 없으니 여기서 끝이로구나.”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가 덤덤한 말투로 그리 말했다.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 그리 뛰어다니다가 이계에서 끝을 맞이하려니 제법 허탈하기도 할 텐데, 드래곤의 오롯한 이성은 그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쪽은 셋, 저쪽은 최소 수십. 거기에 수천, 수만의 병사까지 가득하니 답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반 역시 무척이나 막막했다. 이걸 어찌 이겨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때 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화아아아-
위그드라실의 문양이 밝게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토르가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실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아스가르드의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지직!
쾅!
천둥이 울려 퍼졌다. 아스가르드의 문이 열리고 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 진중한 표정의 헤임달이 있었다.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는 프레이가 있었다.
아이반은 힘이 쭉 빠져나갔다. 바닥의 바닥까지 모든 기운이 흘러나갔다가 또 초월적인 기운이 샘솟았다.
탁!
아이반의 어깨에 손을 올린 헤임달이 말했다.
“그대가 누구의 왕이며, 무엇의 신인지 깨달으시오. 아스가르드의 힘을, 아홉 세계의 역량을 확인하시오.”
니플헤임. 죽음과 삶이 나뉘기 전부터 존재한 태초의 세계이기에 허신의 상태로도 땅을 디딜 수 있었다. 아스가르드를 벗어나 이렇게 존재할 수 있었다.
스읍-
모처럼 묠니르를 쥐고 밖으로 나온 토르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다. 피와 시체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모두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수만의 병사가 둘러싸고 수십의 초월자가 노려보았다. 그 모두가 요툰이었다. 가장 위험한 괴물이었다.
그들의 짜릿한 시선 속에서 토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부디 용맹하게 싸워라. 마지막까지 맹렬히 달려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