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5
‘역시 그때 화염구만 날릴 걸 그랬나? 아니, 그랬으면 근거리에서 화염구를 날릴 틈을 만들지 못했겠지.
실드도 쓰긴 써야했어.’ 아이반은 괜히 쓰린 속을 붙잡고 주변을 뒤졌다. 비싸게 약을 팔아먹던 놈들이라 그런지 꽤나 부유했다. 이렇게 아낌없이 넘겨주는 것을 보니 참으로 좋은 친구들이었다.
한쪽이 죽어서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갑이 두둑해졌군.”
본의 아니게 흑마법사와 결탁한 산적무리 하나를 처리한 아이반은 이전과 달리 길을 벗어나 아예 인적이 없는 숲으로 움직였다. 중간에 마을도 몇 번 들를 기회가 있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그곳을 영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반이 처리한 산채는 산적 규모에 비해서 크기가 작았다. 그건 산적 놈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는 뜻. 주변 마을이 통째로 범죄에 가담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정도로 규모가 크다면 혹시 모르지, 영주쯤 되는 권력자가 뒤에서 비호하고 있을지도. 여러모로 이 근처 치안이 엉망이라는 소리였다. 천하의 평안을 위해 노력하는 영웅호걸도 아니고 아이반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위험하고 의심스러우면 피해가야지.
그렇게 숲으로 깊숙이 들어가 움직이고 있는데, 아이반은 누군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물적인 본능, 전사의 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아차린 아이반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번에는 또 뭐야? 오크? 흑마법사? 옛날에 뒈진 놈들의 동료?’ 금방이라도 도끼를 꺼내 던질 준비를 하던 아이반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시선에 담긴 감정이 좀 묘했기 때문이다.
분명 호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적의라고 하기엔 미묘했고, 살의라고 하기에는 잔잔했다.
휘이잉- 그때 볼을 스치는 바람, 부드러운 향기.
코로 느낀다기보다는 정신으로 느껴지는 신비한 감각.
“숲의 요정, 엘프가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그 말에 답하는 것처럼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끝이 뾰족한 귀,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티 없이 맑은 피부, 길쭉길쭉 늘씬한 몸매와 미형의 얼굴.
그야말로 전형적인 엘프의 모습이었다. 흔히 보아왔고, 흔히 상상했던 바로 그 모습.
누군가는 숲의 요정을 만났다고 좋아하겠지만 아이반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낯선 이는 언제나 위험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엘프는 스스로를 숲속에 가둬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종족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신호는 아니었다.
‘하필 엘프라니,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소문답게 엘프들은 몹시 아름다웠으나, 그 이상으로 이질적이라 마주하면 어딘가 영 꺼림칙했다. 이 땅의 엘프는 모두가 자연의 정령이 육신을 가진 태초의 요정들의 피를 잇고 있었고, 그들의 감정선은 보통의 인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의 굴곡이 깊지 않아 살아있는 생명체다운 표정이 없었다. 미형의 외모와 곁들여 마치 잘 깎아놓은 인형처럼 보였다.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이곳이 그대들의 영역은 아닐 텐데.”
엘프들은 다른 종족과의 접촉, 특히 인간과 가까이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들이 느끼기에 인간은 너무나 빠르게 살았으며, 감정변화가 지나치게 격렬했다.
가까이 했다가는 불이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안 좋은 영향을 받으리라 여겼다.
” .”
모습을 드러낸 엘프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또르르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너무나 투명해서 생명체의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유리구슬 같았다. 그 눈빛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것은 꽤 눈치가 빠르다 자부하는 아이반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 귀쟁이 새끼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먼저 도끼를 던져서 선방 날려야하나? 아이반이 그런 고민을 할 정도로 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 그대는 아스가르드의 전사로군요. 우리가 찾던 사람이 아니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녀는 무척이나 외모가 아름답고, 목소리도 예뻤지만 감정이 워낙 옅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전에 섬뜩함이 먼저 느껴졌다.
“웃기는 소리군. 지나가고 있는 사람을 붙잡아 세워놓고는 자기 멋대로 떠들어대다니.”
“무엇이 알고 싶은가요?”
“엘프가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주변을 수색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군. 무슨 일이오?”
다소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었으나 아이반은 망설이지 않았다. 엘프들은 감정의 기복이 극히 적어서 이성적인 대응이 앞서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말할 수 없다고 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순순히 대답할 가능성이 컸다.
그 예상대로 엘프가 입을 열었다.
“근처에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하여 움직였을 뿐입니다.”
아이반은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를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지칭하는 것은 엘프 특유의 기묘한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의 정령을 조상으로 하는 그들은 아직 정신체로서의 특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세계수라고 하는 특유의 시스템을 통해 서로의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다. 숲에 있는 한 그들은 언제나 혼자가 아니라 복수였고, ‘나’가 아니라 ‘우리’였다.
“흑마법사, 악마의 추종자들이 이런 깊은 숲속까지 돌아다닌다고? 그들이 엘프들에게도 무슨 짓을 하였소?”
“그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까?”
“며칠 전에 작은 충돌이 있었지. 그들을 피해서 일부러 인적이 드문 숲을 관통하며 움직이고 있었소.”
“그렇군요. 얼마 전부터 악마를 숭배하는 사악한 자들이 이곳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엘프의 눈동자가 슬쩍 움직였다. 그 순간 아이반은 무언가 자신을 꿰뚫어보는 느낌이 들어서 표정이 굳어졌다.
엘프들의 눈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나 외형을 보는 것을 넘어서 그 본질이나 기질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낯선 감각이었다. 그러니 엘프들은 진실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둥의 헛소리가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
“아스가르드의 전사, 당신은 혹시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 있습니까? 정보에 대해 보답은 하겠습니다.”
“글쎄, 알려줄 것이 많지는 않은데.”
그들이 믿음직한 뒷배를 끼고 꽤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것, 신체변이를 사용한다는 것, 적어도 그들 중의 일부는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를 섬기고 있다는 것.
“그들이 붉은파라스꽃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확인했소. 아마 마약으로 만들어 유통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어쩌면 다른 용도로 썼을지도 모르지.”
“붉은파라스꽃은 강력한 독초이면서 마법촉매이기도 하죠. 주의해야할 필요는 있겠군요.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정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 기묘한 기운이 들어있는 돌멩이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고 있으니 설명을 덧붙였다.
“정령석입니다. 보아하니 그대에게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정령석? 글쎄, 이게 나에게 의미가 있나? 팔면 돈이 될 것처럼 보이기는 하오만 .”
아이반은 정령과 관련된 스킬은 전혀 익히지 않았다. 그런데 대뜸 이것이 도움이 된다니 의아하기만 했다.
엘프들이 그저 금전적 가치로 정령석을 내밀었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더욱.
“그렇습니까? 이상한 일이로군요. 정령들이 이렇게나 그대에게 호감을 표하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정령석이 도움이 될 수 있겠죠. 그럼 이만.”
그리고는 훌쩍 몸을 날려 숲속으로 떠나버렸다. 나타난 것처럼 발소리하나 없이 빠르고 가볍게.
홀로 남은 아이반은 정령석을 쓰다듬으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정령? 나에게 그런 재능이 있었나?”
물론 대단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껏 아이반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지.
그저 입문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하급 정령 정도 소환할 수 있는 친화력이란 소리.
크게 전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 하나라도 재능이 있는 분야가 있었다니 아이반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스킬 포인트를 찍지 않아도 정령과 계약을 할 수가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 그렇게 정령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아이반은 미소를 날려 보내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흑마법사가 이 근처까지 돌아다니고 있다고? 이 숲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나?’ 이 숲속, 엘프의 영역과 맞닿아있는 장소, 흑마법사들이 탐낼만한 것. 왠지 녀석들이 원하는 것과 그가 목표로 한 것이 같으리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 숲에 숨어있는 비밀이 또 있지는 않을 테니까. 피해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직접적으로 부딪혀야만 하는 모양이다.
‘하긴 망할 놈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별짓 다 하고 다닐 때가 되기는 했지.’ 속으로 그렇게 욕을 내뱉은 아이반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녀석들이 가로채기 전에 그가 먼저 차지해야만 했다.
아이반은 입술을 깨물었다.
‘ 한발 늦었군.’ 나름 빠르게 온다고 했는데도 늦어버린 것이다. 머릿속으로 대충 어디쯤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도, 실제로 와본 적이 없었기에 길을 찾는데 한참 걸린 것이 패인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들 역시 아직 던전에 진입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일단 던전에 들어가면 마음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니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준비를 마치는 것이 정상적인 공략 절차였다. ‘하지만 여유가 길지는 않을 거야.
저들도 엘프가 주변을 순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 이곳에 계속 죽치고 있을 수는 없겠지.’ 길어야 며칠, 아니면 몇 시간.
아이반은 다소 초조해졌지만 그럴수록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했다.
적들은 많았고, 그는 혼자였으니까. 그들이 감지하지 못할 거리에서 은밀하게 살피던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들을 강제로 안쪽에 밀어 넣으면서 정보를 뽑아내고 있어.’ 아마도 어디선가 납치해온 사람들. 그들에게 낙인을 찍고 강제로 정신속박을 걸어서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방식은 아주 추잡스러웠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아마 앞으로 며칠까지도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이제는 슬슬 선택해야만 했다.
지금 덮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포기는 아니야. 여기를 포기하면 나중에는 더 힘들어져.’ 아이반이 괜히 이곳을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면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헤임달, 당신의 힘을 빌려주시오.”
아이반이 조용히 중얼거리자 그의 몸에 헤임달의 권능이 내려앉았다. 우웅- 순식간에 확장되는 청각과 시각.
그 예민한 감각으로 아이반은 적진을 노려보았다. 혹시 그가 파고 들어갈 틈은 없는지 찾아보기 위해.
그러던 아이반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익숙한 기척을 발견했다.
엘프 몇 명이 반대쪽에서 적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얼마 전 그와 만난 엘프도 함께 있었다. ‘흑마법사의 흔적을 쫓아서 이곳으로 온 건가? 아니면 내 뒤를 따라서?’ 아이반은 의심을 거두지 않으면서 더욱 기척을 숨겼다.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더욱 복잡해져서 적이 늘어나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