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52
그는 제법 부드럽게 생긴 미남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농부의 자식이라는데 밭일이라고는 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피부가 희고 고왔다.
죽은 자의 몸이라 다소 초췌하기는 했지만 두 눈에 장난기가 가득한 것이 참으로 쾌활한 성격인 것 같았다.
“샬피, 맞소?”
“그렇습니다. 아스가르드의 기운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어서 아주 기쁘네요. 그분께서는 여전하십니까?”
“토르? 물론 지금도 성격이 지랄 맞소.”
치지직!
토르가 번개를 내뿜어 격하게 항의했다. 오랜만에 보는 시종에게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 소리쳤다.
그는 당장 밖으로 튀어나오고 싶어 했으나 아이반이 막았다. 얼마 전에도 튀어나왔는데 자주 나오는 것은 좋지도 않을뿐더러, 이곳은 헬헤임이었다. 아직 헬라가 아스가르드에 완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는데 토르가 나타나면 일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번개가 아이반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지만, 워낙 익숙한 일이라 아이반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토르도 그대를 만나 반가운가 보오.”
아이반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리 말하자 샬피는 아이반의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번개 채찍을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렇군요.”
샬피는 토르의 시종이었던 만큼 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오딘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막무가내였는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아이반을 보면서 과연 새로운 시대의 주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며 감탄했다.
“흠,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바로 움직여야겠소. 상황은 알고 있소?”
“로키께서 미리 말해 주셨습니다. 이계의 대악마와 손을 잡은 요툰이 아스가르드가 부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날뛰고 있다지요?”
샬피는 썩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아홉 세계가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방해만 하다니 요툰이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군요. 하긴, 놈들이야 원래부터 니플헤임에 살던 놈들이니 아홉 세계가 부활하는 것보다 아스가르드가 멀쩡하게 되돌아오는 게 더 겁나겠죠.”
“그래서 놈들이 움직이는 것을 막아야만 하오. 헤임달은 로키에게 방법을 물으라 했는데, 로키는 그대에게 우리를 보냈어. 그렇다면 우리가 뭘 해야만 하오?”
“대악마와 손을 잡지 않은 요툰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야겠지요. 대악마와 손을 잡은 놈들이라고 해봐야 결국 일부일 뿐이니, 다른 자들이 움직이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샬피는 언뜻 과거를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다가 아이반에게 말했다.
“우리는 우트가르트의 왕을 찾아갈 것입니다.”
258화 늦은 깨달음
요툰의 세계, 요툰헤임에는 우트가르트라는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을 다스리는 자는 위대한 요툰 군주이자 아주 강력한 마법사였다.
“그의 이름은 로키라고 하오.”
아이반이 그렇게 설명하자 달의 여신 셀룬이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
“로키?”
“장난의 신과 이름이 같지. 그래서 구분하기 위해 따로 그를 우트가르다 로키라고 부르곤 하오.”
“초월자의 이름이 겹치다니, 무척이나 특이하구나.”
위대한 힘과 격을 지닌 초월자는 그 스스로 하나의 법칙이자 상징이었다. 초월자의 이름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그를 정의하는 가장 근원적인 것인데, 그게 겹친다는 것은 달의 여신 셀룬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쪽 동네에서는 없는 일도 아니오. 사실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아니고, 로키나 오딘쯤 되면 불리는 이름만 수십 개씩 되니까 그중 겹치는 것이 몇 개쯤 있을 수도 있지.”
게다가 로키와 우트가르다 로키는 둘 다 흐림수르사르(hrímþursar: 서리 거인)이니 굳이 따지자면 먼 친척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둘 다 환술에 아주 능하고, 지닌 근원이 비슷하니 이름이 겹쳤나 보지.
“우트가르다 로키는 대단한 마법사입니다. 환술이 아주 뛰어나 모두 깜빡 속을 정도였지요. 그와 내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샬피가 쾌활한 말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예전 신들과 함께 우트가르다 로키의 궁전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환술에 속아 넘어갔으니 썩 유쾌하기만 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화로 기록되었으니 샬피 입장에서는 마냥 나쁘지도 않았다.
“우트가르트는 원래 요툰헤임에 있었지만, 지금은 니플헤임에 있습니다. 라그나로크로 세상이 멸망하면서 우트가르다 로키 역시 목숨을 잃었죠. 우리는 그가 숨은 곳을 찾아갈 겁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성큼성큼 걷는 샬피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빨랐다. 처음에는 조금 바쁘게 걷는 정도였으나, 어느새 일행은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달려야만 했다.
뒤늦게 그걸 알아차린 샬피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속도를 늦췄다.
“아, 죄송합니다. 헬헤임을 벗어나는 것은 참 오랜만이라 무심코 발걸음이 빨라졌네요. 주의하겠습니다.”
아이반은 물론이고 달의 여신 셀룬과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는 평범한 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가장 빠른 말조차 여유롭게 앞지를 정도인데, 샬피를 따라가다 보니 땀이 주르륵 흐르고 숨이 거칠어졌다.
“인간인 줄 알았건만, 발걸음이 아주 빠르구나. 저자의 정체가 무엇이냐?”
셀룬이 속삭여 물으니 아이반이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핏줄은 분명 인간이오. 그러나 신조차 감탄할 재주를 가진 자이지.”
샬피(Þjálfi)는 빛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실로 빛처럼 빠른 자였고,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을 통틀어도 단순히 속도만 보자면 그보다 날랜 자가 없었다.
“모든 신보다 속도가 빠르다고? 그게 인간이란 말이냐?”
“지금은 인간이라 말하긴 힘들지. 빛의 신이오, 속성은 빠름.”
우트가르다 로키와의 내기에서 생각과 붙어 두 번이나 무승부를 냈을 정도였다. 생각의 속도와 비슷하게 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신화적 허용이 있겠지만, 그가 진심으로 달리면 따라올 자가 거의 없다는 뜻이오. 순수하게 달리기로 격을 쌓아 초월자가 되었으니 대단한 자지.”
샬피는 걸음 한 번에 산을 넘고, 걸음 한 번에 강을 건넜다. 니플헤임 곳곳에 괴물이 있었지만 샬피가 빠르게 움직이며 길을 안내하니 그 모든 위험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달리던 샬피가 문득 어느 봉우리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는 아이반에게 말했다.
“이 근처가 확실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트가르다 로키의 환술을 꿰뚫어 볼 수가 없네요.”
“그럼 이제 우리가 나설 때로군.”
“저는 주변을 경계하겠습니다.”
아이반과 셀룬, 사브리나는 봉우리를 시작으로 샅샅이 살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위아래로 훑었다.
우트가르다 로키의 환술은 몹시 뛰어나 토르는 물론이고 로키조차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니 셋이 아무리 살펴보아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아이반은 방법이 있었다.
“긴나르(Ginnarr: 협잡꾼).”
“게스툼블린디(Gestumblindi: 눈먼 손님).”
“발포드(Valfǫðr: 살해 당한 자의 아버지).”
“드라우가드로틴(Draugadróttinn: 산송장의 주인).”
“골룽그(Gǫllungr: 부르짖는 자).”
“하프트소니르(Haptsǫnir: 족쇄를 푸는 자).”
“흐니쿠드(Hnikuðr: 뒤집어엎는 자).”
지금은 제대로 아는 자가 없는 아주 오래된 주문들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오딘이 스스로 제물로 바쳐 아득한 죽음 속에서 깨달은 신비로운 룬 마법이었다.
우웅-
크고 작은 마법의 파동이 주변을 훑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그게 몇 번이고 계속되니 흔들리는 마력의 움직임 속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고도의 마법으로 숨겨진 결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결계가 무너지고, 보수하려고 노력하면 위치가 발각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른 모든 것의 눈은 속여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지. 그러니 죽음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닿을 수밖에.”
연달아서 대마법을 쏟아 낸 아이반이 완전히 드러난 우트가르트를 향해 움직였다. 요툰의 성답게 무척이나 크고 웅장했다. 성벽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며, 성문은 인간의 성 하나를 능히 품을 수 있을 만큼 대단했다.
“우트가르다 로키! 문을 여시오! 아홉 세계의 후계자가 찾아왔소!”
아이반이 그리 소리치자 그 커다랗고 묵직한 성문이 열렸다. 족히 일만의 병사를 무장시킬 수 있을 만큼의 쇠가 들어간 문이었기에 마치 산이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일행은 당당히 성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양옆으로 무기를 든 요툰이 가득했으나 겁먹은 기색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여차하면 그대로 토르를 불러 다 때려 부수겠다는 생각으로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성의 가장 깊은 곳에 우트가르다 로키가 있었다.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거대한 의자에 앉아서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거인 왕, 요툰 군주, 우트가르트의 주인. 그 이름에 어울리는 위엄을 담아 우트가르다 로키가 물었다.
“그래, 오딘이 자신의 자리를 어떤 인간에게 물려주었다는 소문은 들었지. 전쟁에 패하더니 늙고 약해져서 노망이라도 난 모양이야. 그러나 그게 어째서 아홉 세계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가? 아홉 세계가 언제부터 오딘과 아스가르드의 것이었나?”
그 말에 아이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등에 새겨진 위그드라실의 문양을 내보이며 힘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위그드라실이며, 아홉 세계의 씨앗이오. 내가 아홉 세계의 후계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감히 아홉 세계를 입에 올릴 수 있겠소?”
비록 아스가르드는 라그나로크에 패했으나 그렇다고 요툰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은 양패구상이었고, 위그드라실이 불타면서 아홉 세계는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곤 모두 망해 버렸다.
라그나로크의 시작을 알린 로키마저 다시 아스가르드로 돌아왔으니 요툰이 승자의 권리를 주장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아홉 세계는 여전히 아스가르드와 오딘의 것이었고, 새로운 위그드라실이자 오딘의 후계자, 아스가르드의 화신인 아이반이 새로운 아홉 세계의 주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트가르다 로키는 킬킬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찌 패배자의 후계자가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겨우 그런 힘으로 아홉 세계의 후계자를 자청한다면 누가 과연 따른단 말인가?”
“그래서 악마와 손을 잡는 것이 옳은 일이오? 아홉 세계를 갈기갈기 찢어서 악마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은 선택이란 말이오?”
그 말에 불쾌한 듯 우트가르다 로키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그건 아니지. 어찌 이계의 악마 따위가 아홉 세계를 차지한단 말인가?”
음습한 모략과 손을 잡은 요툰들은 이계의 악마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저 잠깐 손을 잡고 서로 이용하다 버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혹시 놈들이 과한 욕심을 부리면 떨쳐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건 음습한 모략 뒤에 있는 파멸의 마왕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홀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하고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만약 아홉 세계가 멀쩡한 상태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로 여유롭게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하물며 일부 요툰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왕을 제어하겠다는 것은 망상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