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53
“현명한 요툰 군주여,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거요? 외면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미 경험하지 않았소?”
우트가르다 로키는 토르와 로키를 농락할 정도로 뛰어난 환술을 구사하는 위대한 마법사였다. 그러나 세상 모든 요툰이 들고일어나 아스가르드를 향해 진격할 때, 그의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그건 우트가르다 로키가 마지막까지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광기에 젖어 끔찍한 운명을 향해 달려갈 때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그런 자가 결코 성급하고 우둔할 리가 없었다.
“요툰헤임 역시 아홉 세계의 일부요. 새로운 아홉 세계를 위해 도와주시오.”
한참을 침묵하고 고민하던 우트가르다 로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만들고, 싸우고, 부수고, 다시 만들려고 하니 방해꾼을 치워 달라고? 아스가르드의 방식이 참으로 훌륭하구나! 이게 오딘의 방식인가!”
우트가르다 로키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산이 일어나는 것처럼 거대했다.
“아홉 세계는 나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옳은 말이라도 힘이 없으면 허무하고, 정당한 요구라도 자격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
만약 정말로 아홉 세계의 후계자가 되고자 한다면.
저기 저 뜨겁고 불타는 땅 무스펠헤임부터 이 차갑고 얼어붙은 땅 니플헤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를 아우르고자 한다면.
“힘을 보여라. 자신을 증명해라.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자신임을 널리 알려라.”
이건 시련이었다. 수많은 요툰 중 한 일파를 이끄는 위대한 요툰 군주, 우트가르다 로키의 요구였다.
만약 통과한다면 모든 요툰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마법사이자 위대한 요툰 군주가 그를 따를 것이요, 그렇지 못한다면 그릇에 맞지 않는 꿈을 꾼 멍청한 자가 되어 영원히 비웃음당하리라.
“좋소! 무엇으로 증명하면 되겠소?”
아이반은 망설이지 않았다. 당당히 소리쳤다. 시련을 받아들이겠다고 외쳤다.
“소문을 들으니 헬라에게 니드호그의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하겠다고 했다지, 그러면 그리하라. 말만이 아니라 내 눈앞에서 정말로 증명하라.”
“···그리하기 위해 니플헤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녀왔소. 나스트론드와 흐베르겔미르에 다녀왔지. 그러나 니드호그는 없었소. 녀석은 이미 그곳을 떠나 머나먼 곳으로 사라졌소.”
니드호그는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자 아홉 세계를 떠나 마계로 향했다. 그러니 더는 이곳에 없었다. 그런데 어찌 증명하란 말인가?
그런 아이반의 물음에 우트가르다 로키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나는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악마의 땅으로 떠난 녀석을 다시 불러오는 방법을 안다. 그러니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는 자신의 말을 지켜라.”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니드호그와 싸우게 된 아이반은 짐짓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로키, 이 개자식! 함부로 혓바닥 놀리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아스가르드의 온갖 사건은 언제나 로키의 장난질에서 시작했다. 오딘과 토르가 로키라면 이를 가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반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259화 부서진 세계를 건너서
니드호그는 마계에 있으니 지금 당장 싸우지 않아도 된다. 본격적인 전쟁이 벌어졌을 때나 마계에서 넘어온 녀석과 싸우리라.
장난의 신 로키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아이반은 그걸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로키, 이 개자식! 빌어먹을 놈! 쓰레기 같은 새끼!”
아이반이 연속해서 욕설을 내뱉자 아스가르드에 있는 토르가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르드 신화의 사건·사고의 절반 이상은 결국 로키의 장난질이 원인이었는데 그동안 아이반이 오딘과 토르만 욕했으니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토르가 아무리 술 먹고 행패를 부려도 로키가 치는 사고에 비하면 약소할 뿐이었다.
‘로키가 이걸 몰랐을까? 우트가르다 로키가 니드호그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정말로 몰랐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나서지 않고 샬피를 소개한 것이겠지.
지금 생각하면 애초에 뜬금없이 니드호그의 이름을 꺼낸 것부터 이상했다. 그저 여신 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명분이라고? 헬라가 효녀라서 니드호그가 니플헤임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그냥 넘어간 것이라고?
그걸 그냥 믿다니,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다. 잘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지금 ‘당장’은 싸우지 않고, 녀석이 니플헤임에 없으니 싸울 수도 없지만, 언젠가는 싸워야만 한다.
그래, 틀린 말은 없었다. 자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며 로키는 뻔뻔하게 웃고 있겠지.
제대로 농락당했기에 머리끝까지 열이 끓어올랐지만, 아이반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짧은 한숨에 분노를 털어내고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았다.
“우트가르다 로키가 정말로 니드호그를 불러올 수 있을까?”
니드호그는 아홉 세계를 떠나 마계로 향했다. 위그드라실이 무너지면서 더는 먹이도 없었고, 녀석이 살던 흐베르겔미르는 파헤쳐져 태초의 공허, 긴눙가가프가 쩍 입을 벌리고 있었다.
마계로 넘어간 녀석을 불러올 정도로 우트가르다 로키가 대단한 마법사인가? 정말로 그럴 능력이 있을까?
그 물음에 샬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가능할 겁니다. 우트가르다 로키는 아홉 세계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마법사입니다. 그가 가능하다고 말했다면 사실이겠죠.”
스스로 제물로 바쳐 아득한 죽음 속에서 마법을 깨달은 오딘이나, 마법의 여신 프레이야와 비슷한 수준의 대마법사가 바로 우트가르다 로키였다.
토르를 농락하고도 살아남은 자는 그가 유일했고, 장난의 신 로키를 환술로 속일 수 있는 자도 그가 유일했다.
아홉 세계를 모두 뒤져도 그와 비슷한 자는 있을지언정 그보다 뛰어난 마법사는 찾을 수 없으니 실로 위대하고 위대한 요툰 군주였다.
“그렇다면 피할 방법이 없군. 꼼짝없이 니드호그와 싸워야만 하겠어.”
아이반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고민했다. 이 난관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니드호그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정말로 이길 수 없는 적인가?”
달의 여신 셀룬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니드호그가 터무니없이 강한 적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인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 수 없소. 그들은 니드호그와 붙어 본 적이 없으니.”
종말의 용 니드호그는 라그나로크가 일어날 때까지 시체를 삼킬 뿐 제대로 싸운 적이 없었다. 그러니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지녔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저 무시무시하다고 여길 뿐이다.
“니드호그의 강함을 짐작이라도 하는 것은 라타토스크뿐일 거요. 니드호그 앞에서 깐죽거리며 이간질을 했으니까.”
“뭐? 어째서?”
“위그드라실 꼭대기에는 흐레스벨그라는 하얀 수리 형상의 요툰이 있소. 그의 날갯짓이 너무 강해지거나 니드호그가 뿌리를 너무 씹어 먹어서 위그드라실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둘 사이를 이간질한다더군.”
그래서 니드호그와 흐레스벨그는 단 한 번도 서로를 본 적이 없음에도 원수 사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위그드라실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스가르드식 외교법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위그드라실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라타토스크라는 위대한 외교관을 보고 배웠을 뿐이다.
“니드호그는 그 이름에 비해 알려진 것이 너무나 적소. 하긴, 녀석을 보기 위해서는 시체와 독기 가득한 나스트론드를 넘어 흐베르겔미르까지 가야 하는데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 당연하겠지.”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벅벅 긁은 아이반이 샬피에게 물었다.
“혹시 라타토스크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소? 내가 알기로 그는 라그나로크를 겪고도 살아남은 것으로 알고 있소만.”
“죄송합니다. 워낙 정신이 없던 시기라……. 살아남았다면 니플헤임에는 없겠죠.”
“그렇다면 부서진 세계에 숨어 있나? 으흠,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아홉 세계 중에 멀쩡하게 살아남은 것은 무스펠헤임과 니플헤임, 니플헤임 안에 있는 헬헤임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위그드라실이 불타서 사라질 때 같이 무너졌고, 남은 것은 파편밖에 없었다.
심지어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자 바나헤임으로 튀어 버린 여신 프레이야마저 지금은 허신의 상태로 아스가르드에 있었다. 그냐가 몸을 숨긴 바나헤임도 처절하게 무너졌다는 소리다.
무스펠헤임은 수르트가 지키고 있으니 그리 갔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무스펠헤임과 헬헤임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라타토스크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고민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라그나로크 이후 행방이 묘연한 존재가 한둘이 아닌데 이제 그를 찾는다고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니드호그와 싸우려고 하니 뭔가 좀 답답하군.”
“토르와 헤임달, 프레이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그들의 힘으로도 니드호그를 쓰러뜨릴 수는 없단 말이냐?”
“그들은 나설 수가 없소. 단순히 니드호그를 죽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홉 세계의 후계자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니까.”
토르는 물론 아스가르드 최강의 투신이고, 헤임달과 프레이 역시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으니 그들이라면 니드호그를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래서야 의미가 없었다. 다른 이의 힘을 빌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죽이면 그건 아스가르드의 업적이지 아이반의 업적이 될 수 없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마무리는 아이반이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아스가르드의 화신, 아홉 세계의 후계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싸우려니 영 버거운데, 방법이 없군.”
그래도 로키가 밀어 넣고 다른 아스가르드 신들이 별말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예 승산이 없지는 않을 거다. 진짜 불가능한 일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테니까.
이제 아이반은 함부로 굴릴 수 있는 전사가 아니었다. 아스가르드의 화신이고 새로운 위그드라실, 황금 옥좌 흘리드스캴프의 주인이니 아스가르드의 신들이라고 예전처럼 죽어도 상관없다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면 한번 해봅시다. 여기가 저승인데 죽어 봐야 어딜 가겠소?”
마음을 정한 아이반이 우트가르다 로키에게 가서 준비되었노라 알리니, 그가 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큼지막한 몽둥이 같은 지팡이를 쥐고 일행을 안내했다.
우웅-
공간이 일렁이며 바람처럼 흘러갔다. 걸음 한 번에 세상이 뒤로 밀려나고 어느새 멀고 먼 땅에 도달했다.
검은 하늘이 찢어지고 드문드문 너머의 세상이 보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이 끔찍한 폐허가 되어 무너진 풍경이 비쳤다.
그 아래 높고 높은 산맥이 있었다. 몹시 불길한 곳이었다. 뾰족 튀어나온 바위가 마치 타오르는 듯 거칠었다.
“여기가 어디요?”
아이반이 물으니 우트가르다 로키가 그를 힐끔 보면서 대답했다.
“니다푤이다.”
니다푤(Niðafjǫll: 어두운 산맥)은 니플헤임에 있는 산맥이었다.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자 니드호그가 마지막에 솟아오른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