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58
아홉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간, 샬피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이야기를 전한 모
양이었다. 정작 니드호그와 싸울 때는 보이지도 않더니 이런 일에는 누구보다 몸놀림이 재빨랐다. 입놀림조차 그러했다.
“하핫, 감사합니다.”
칭찬한 것이 아니건만 샬피는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참으로 넉살 좋은 인간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그 성질 더러운 토르를 모시고 살았겠지.
“저도 돕고 싶었지만 헬헤임에 묶인 몸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신 헬이 그것을 원치 않더군요.”
좀 의심스러운 변명이지만 아이반은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상황이 끝났는데 추궁해 봐야 아무 의미 없었으니까.
사실 이미 죽은 자에게 다시 한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도와달라기엔 둘 사이에 쌓인 신뢰가 부족하기는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반도 기대하지 않았고.
어쨌든 덕분에 일행이 헬헤임으로 돌아오니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터져 나갈 듯했다. 이곳이 죽은 자의 땅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당당한 걸음으로 여신 헬의 궁전, 엘류드니르에 도착하니 로키가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면서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라고. 역시 해낼 줄 알았······!”
쾅!
만나면 반갑다고 선빵을 날리는 것이 노르드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었다. 로키가 히죽히죽 웃는 것을 보니 아이반은 자신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날아갔다.
주먹으로 느껴지는 타격감이 아주 경쾌했다. 턱뼈가 으스러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날아간 로키가 엘류드니르의 벽을 뚫고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그래도 자기가 잘못한 줄은 아는군.”
로키라면 환영으로 피하거나 아예 공격당한 것을 거짓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얌전히 뺨을 내준 것을 보면 아예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겨우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는 게 더 화가 나기도 했지만.
“흐, 이게 다인가? 조금 더 거칠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뻔뻔하게 턱을 문지르며 묻는 로키에게 아이반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내가 진짜 화를 내면 당신이나 나나 둘 중 하나는 죽소. 나는 누구처럼 대충 망치 몇 번 휘두르는 거로 끝내지 못하니까.”
기껏 아홉 세계를 부활시켜 놓았는데, 다시 라그나로크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하는 꼴이 이상하게 재수 없고 화가 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잘되기는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밖에.
로키는 신화 속에서도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자기가 먼저 사고를 치고, 자기가 그걸 수습하면서 오히려 보물이나 이득을 얻는데, 어째 칭찬 한 마디 들어 먹지 못했다.
예전 아이반은 로키의 노력을 몰라 주고 애들이나 감금, 협박한 아스가르드 신들의 인성을 욕했는데, 직접 로키를 겪어 보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깐족거리는 것만 없으면 참 좋을 텐데, 이상하게 재수가 없었다.
“목적과 의도는 좋으나 과정이 편치 않소. 꼭 그래야만 했소?”
“그게 내 본질인 것을 어찌하나? 놀리지 못하고 장난치지 못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신이란 존재가 원래 그러했다. 뱀신 모르나가 흥미에 자신의 목숨과 명예, 미래를 던지는 것처럼 설령 그게 자기 파괴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은 그 무엇보다 현명하고, 또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아이반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적당히 하시오, 적당히.”
그러자 부서진 턱과 무너진 벽을 환상 너머로 던져서 멀쩡히 되돌린 로키가 히죽 웃었다.
“아홉 세계의 새로운 주인께서는 참으로 상냥하시군. 오딘, 그 음흉한 노인네와는 달라.”
“그야 가장 사악한 자조차 오딘과 비교하면 나을 수밖에 없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오딘을 욕한 아이반은 고개를 돌려 여신 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우묵한 눈으로 아이반을 바라보며 서 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위압적인 기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약속했던 대로 니드호그를 물리쳤소. 그리하여 위그드라실을 다시 심었지. 헬헤임은 새로운 아홉 세계의 하나가 되겠소? 당신은 나를 인정하겠소?”
아이반이 그리 말하며 빤히 쳐다보자 여신 헬, 모든 죽은 자의 지배자는 사뿐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절반은 죽은 자의 몸, 다른 절반은 산 자의 육신, 또한 절반은 늙은이의 것, 절반은 빛나는 미녀의 모습.
생사와 노화, 젊음, 병마가 뒤섞인 로키의 딸은 한참이고 아이반을 바라보다가 고개 숙였다. 옛 시절, 아스가르드에 버림받고 몸을 낮추던 때와는 달리 진심으로 예를 표했다.
“죽은 자의 땅에도 환한 빛이 닿으니, 늙고 썩은 육신으로도 어찌 그 따뜻함을 몰라보겠습니까? 아홉 세계가 다시 태어났으니, 이 춥고 어두운 땅 역시 그 찬란함을 따를 것입니다.”
여신 헬라가 기꺼이 함께하기를 청했다. 헬헤임은 다시 아홉 세계의 일부가 될 것이며, 죽은 자들 역시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 생명을 되찾을 것이라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생명을 되찾기엔 아홉 세계에 남은 힘이 부족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홉 세계는 어리기만 해서 그 모든 죽음을 되돌릴 여력이 없습니다.”
아홉 세계는 다른 차원과 법칙이 달라서 죽은 이가 부활하는 것이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죽음에 새로이 생명을 불어넣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허신이 되어 버린 신들이 육신을 되찾으려면 막대한 수준의 힘이 필요했다. 인과를 비틀고 법칙을 다시 새기는 수준의 노력이 필요했다.
모든 가능성의 개화를 자신의 신성으로 삼은 아이반이기에 시도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 대업을 완료하기에는 재료가 부족했다.
“···그것까지 내다보고 저쪽 세계로 넘어간 것이겠지. 막대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곳이니까.”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로키가 킥킥 웃었다. 따로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다.
하나의 세계가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멸망을 맞이할 때였다. 그동안 품고 있던 모든 기운을 단번에 토해 내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끌어와서 펼쳐 놓으니 그 생명력이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저쪽 세계는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끌어들여 스스로 보호하고자 했고, 아스가르드 신들은 저쪽 세계가 파멸을 맞이하는 순간에 끼어들어 그 막대한 생명력을 가져와 아홉 세계에 물 주기를 원했다.
수많은 악마와 악신의 정수를 빼앗아 아홉 세계가 성장하기 위한 거름으로 쓰리라. 그리하여 진정한 부활을 맞이하리라.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남긴 핵으로 뱀신 모르나가 육신을 되찾은 것처럼, 니드호그가 품은 사악한 마력과 죽음의 기운으로 새로운 위그드라실이 자라난 것처럼.
‘어찌 되었든 파멸의 순간은 맞이할 수밖에 없었군.’
천상은 파멸을 끌어들여 가장 오래된 적을 끝장내기를 원했다.
아홉 세계는 진정한 부활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정기를 원했다.
녹색 만신전은 자신의 용맹을 증명할 진정한 전장을 원했다.
모든 신이 그것을 원하니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파멸의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아이반은 씁쓸하게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쪽으로 돌아갑시다. 이제 파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많은 눈물이 흐를 것이다. 그러나 그 끝에 새로운 희망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맞이할 파멸은 우리의 파멸이 아닐 것이다.
일행은 다시 세계를 넘었다.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당당히 돌아갔다.
* * *
탁!
찢어진 공간과 차원의 틈을 넘어 다시 돌아왔다. 옛 노르드인들이 최초로 도착한 곳, 거울 동굴이었다.
깊고 깊은 동굴 속이 쾌적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멸망한 세계를 거쳐 니플헤임과 헬헤임을 다녀온 일행이 느끼기엔 상쾌하기만 했다.
영혼이 얼어붙는 추위와 세상 모든 것의 죽음을 마주하다 돌아오니 대륙 북부에서도 가장 척박한 이 땅이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후우, 이제야 돌아왔구나. 아주 힘든 모험이었다. 나의 옛 기억을 모두 뒤져보아도 이처럼 대단한 경험이 없어.”
달의 여신 셀룬이 그리 말하며 빙긋 웃었다. 저쪽 세상에서 신성이 억눌려 있다가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오니 몸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도 끊어졌던 세상과 다시 연결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세계주권이 자신을 감싸는 포근함을 즐겼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기 고향이 좋았다.
반면 아이반은 완전히 즐겁지만은 않았다. 그의 신성은 아홉 세계를 근원으로 했기에 이쪽 세상에서는 오히려 답답했다. 사슬에 몸이 묶인 듯 무거웠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아홉 세계가 부활했기 때문인 듯했다.
하긴, 이제 온전히 이계의 신격이 되었으니 이쪽 세상이 배척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마 차원 장벽이 멀쩡했다면 아예 넘어올 수가 없었겠지.
우웅-
아이반이 눈을 감고 잠시 집중하자 그와 이어진 아홉 세계의 풍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새롭게 태어난 아홉 세계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그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이가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외화벌이를 하러 중동으로 떠난 산업역군처럼 아이반도 부지런히 악마와 악신의 머리를 뎅겅 잘라서 그 정기를 아홉 세계로 던져 넣어야만 했다.
이제 아이반은 배고프다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만 하는 아버지였다. 노르드의 왕도 귀찮다고 대충 내버려 뒀는데, 아홉 세계를 다 먹여 살리려면 등골이 휘어질 것 같았다.
“···돌아오셨습니까, 새로운 아홉 세계의 주인이시여.”
거울 동굴을 지키는 볼바가 나타나 아이반의 발치에 엎드렸다. 그 옛날 오딘을 만났을 때도 이처럼 극진한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홀로 외롭게 메마른 볼바의 속에 숨겨져 있던 뜨거운 감정이 터져 나왔다. 눈물을 흘렸다.
드높은 경지에 이른 예언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뱉은 말이 미래가 되었다. 그들의 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러니 아홉 세계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언했기에 아홉 세계가 멸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오랜 세월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옛날 오딘이 물었을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멸망의 순간은 오지 않았을 거라는 후회가 그녀의 육신과 영혼을 좀먹었다.
그런 남모를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괴로워했다. 그러다 마침내 아홉 세계가 새롭게 태어나면서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던졌으니 볼바가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것이 당연했다.
볼바는 아이반의 미래를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만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는 예언하지 않겠노라, 세계의 존망을 좌우하는 미래만큼은 절대로 말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것을 지우고 아이반에게 고할 수 있었다.
“아홉 세계의 주인이시여, 당신께서 이곳을 떠난 사이 제가 본 것이 있습니다. 그 미래를 감히 고하여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그대는 무엇을 보았소?”
“저는 어두운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엿보았습니다. 그것을 보았습니다.”
침을 꿀꺽 삼킨 볼바가 말했다. 자신이 보았던 미래의 한 조각을 꺼내 놓았다.
“파멸의 마왕이 넘어오자 천상이 공격받을 것입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