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60
처음에는 딱 잘라 그럴 일 없다고 소리치던 테잔이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입을 다물고 한참을 고민하던 테잔이 무겁게 말을 내뱉었다.
“…가능성이 있겠군. 갈라진 마리난 제국이 방향을 바꿔서 동맹을 공격하면, 동맹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
복수자들이 날뛰는 것은 정당한 복수를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난 제국은 어쨌든 신뢰의 연합 소속이었고, 휴전 협상의 대상이니 그들이 동맹을 공격한다면 동맹과 연합의 평화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찢어지고 갈라진 마리난 제국이 과연 동맹을 칠 힘이 있느냐, 동서 마리난이 정말로 악마와 손을 잡았다면 그들을 연합의 일부로 여겨야만 하느냐 말이 많겠지만, 어쨌든 곱게 넘어가기는 글렀어.”
오크는 물론이고 피의 동맹에게 복수는 신성한 가치였다. 동맹이 한 짓을 잊을 수 없다며 연합을 탈퇴한 피의 복수자들에게 껄껄 웃으면서 언제든지 받아주겠다고 외친 것은 단순히 강자의 오만이 아니었다. 그게 동맹의 문화였기 때문이다.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아들이 못해도 수십 명은 될 텐데, 그중 하나를 죽였다고 아이반을 미친 듯이 쫓았던 것은 모두 정당한 복수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아이반은 그 굴레를 끊어내기 위해서 강자의 증명을 해야만 했다. 오크 수천을 때려눕혀야만 은원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얻어맞고 가만히 있는 것은 동맹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 피에 미친 광전사들은 적의 피로 온몸을 적시지 않으면 끓어오른 머리가 식지 않았다.
“사방에서 초월자가 날뛰는데 동맹이 그냥 있지는 않았을 거요. 녹색 만신전을 소환할 준비는 얼마나 되었소?”
“…거의 끝났네. 제물만 있다면 언제든지 녹색 만신전의 문을 열 수가 있어.”
“그러면 곧 일이 터지겠군.”
머리를 벅벅 긁은 아이반이 테잔에게 말했다.
“저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겠소. 판을 흔들어야지.”
저들의 품에 숨은 뱀신과 투신이 움직인다. 본격적으로 악신과 악마를 갈라놓는다.
“저쪽 세계에서 보니 악마가 그곳에도 손을 뻗었더군. 주제도 모르고 감히.”
킬킬킬킬.
아스가르드의 사악한 마신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겨우 하나의 세계를 노리는 후배에게 선배들의 솜씨를 보여 주자고 속삭였다.
아홉 세계를 건드린 대가는 악마의 생각보다 더 짜릿할 거다.
265화 오크투신
뱀신 모르나의 권속과 엘프의 대립이 점차 심해졌다. 요정 군단의 위대한 지휘관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가장 뛰어난 전사들과 함께 적진에 침투해 뱀무녀 안데리나를 납치하기까지 했다.
나가 왕국은 뱀신 모르나를 모시는 제정일치의 사회이니 뱀무녀 안데리나는 나가 여왕 시르오네의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차후 종족을 이끌 존재를 적이 납치했으니 나가 왕국이 눈이 돌아가 날뛰는 것이 당연했다. 뱀신 모르나 역시 자신의 무녀를 납치한 엘프를 향해 징벌을 선언했으니 대륙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물론 그 또한 잘 짜인 각본일 뿐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아홉 세계의 주인이시여.”
뱀무녀 안데리나가 몹시 우아한 몸놀림으로 인사했다. 마치 뱀신을 대하는 듯 공손했다.
한때 신을 품고 있던 무녀답게 그녀는 아이반에게서 흘러나오는 영혼의 격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너무나도 거대해 필멸자로서는 감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모르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소.”
아이반이 뱀무녀 안데리나를 빤히 바라보며 그리 말하자 그녀가 품고 있던 신성력이 마구 부풀어 올랐다. 뱀무녀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뱀신 모르나가 응답한 것이다.
곧 뱀무녀 안데리나의 자세가 변했다. 길고 굵었던 뱀의 하체가 점차 짧아지더니 인간의 발이 되었다. 차분하고 공손하던 눈빛이 요사스럽게 바뀌었다.
딱!
손가락을 튕겨 의자를 만든 그녀는 몸을 반쯤 기대듯 누운 채 앉았다. 새하얀 발을 요염하게 까딱거리며 웃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부르는구나. 무언가 일이 있었던 것이냐?”
뱀무녀의 몸을 빌린 모르나의 물음에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가 제법 훌륭한 덫을 놓았소. 알아도 막기가 힘든 녀석으로.”
대악마가 마리난 제국을 어찌 이용하려는 것인지 설명했다. 피의 동맹이 녹색 만신전을 소환할 준비를 끝냈음을 알렸다. 그 모든 이야기를 끝내자 모르나가 싱긋 웃었다.
“오직 모략만으로 대악마가 된 녀석이다. 이중 삼중의 덫을 놓고 알아도 피할 수 없게 판을 짜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러나 모략이라면 이쪽도 밀릴 것 없지. 악마가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서 판을 흔들어야겠소.”
“미리 이야기한 식으로 움직이면 되겠느냐?”
“물론이오.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겠소.”
뱀신 모르나가 깔깔 웃었다. 견딜 수 없다는 듯 배를 부여잡았다.
“아주 재미난 일이 벌어지겠구나. 벌써 웃음이 흘러나와.”
자고로 배신하려면 화끈하게 해야 했다. 때로는 작은 거짓보다 큰 거짓이 다른 이를 속이기 좋으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을 찌르며 상대의 뒤통수를 뭉개 놓아야만 했다.
며칠 뒤, 신호를 받은 투신 바르투이가 은밀하게 움직여 질 나쁜 동물신 둘을 처리했다. 몸을 찢어 버리고 피를 사방으로 흩뿌린 다음 신성을 빼앗았다. 그와 동시에 짙은 숲의 왕과 돌산의 군주가 상처 입은 몸으로 나타나 소리쳤다.
“악마다! 악마가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의 신성을 빼앗아 마왕 크툴라스를 이 땅으로 불러오기 위한 제물로 쓰고자 했다!”
달콤했던 악마의 약속이 모두 거짓이라 외쳤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농락당했으며, 좁고 어두운 던전에 갇힌 것보다 더욱 지독한 꼴이 되었다고 절규했다.
처음에는 그게 뭔 헛소리냐고 믿지 않던 자들도 동물신이 몇이나 입을 모아 소리치니 마음이 바뀌었다. 악마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라 떠들었다.
“어림없는 소리!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 누군가 다른 이의 소행이 분명하다!”
“그러면 누가 했다는 말이냐? 죽은 이들의 신성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이냐? 우리는 모두 악마와 계약했고, 그 때문에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외부의 침입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이냐!”
악마는 억울하다며 외쳤지만, 귀담아듣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악마들끼리도 서로 배신하고 잡아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음습한 모략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본능을 못 이긴 고위 악마가 결국 동물신을 잡아먹은 것이 아니겠냐 악마들조차 그리 떠들고 있는데 누가 결백을 알아 주겠나.
동물신들이 부글부글 끓었다. 비록 악마와 계약하여 목줄이 잡힌 신세지만 그리 사라지는 것을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를 이 땅에 불러오기 위한 제물이든, 본능을 못 이긴 고위 악마의 일탈이든 어쨌든 악마의 잘못이었다.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투신 바르투이가 악마를 비난했다. 역시 상종할 놈들이 못 된다며 독립을 선언했다. 한창 엘프와 대립하고 있던 뱀신 모르나도 악마를 믿을 수 없다며 소리쳤다.
악마가 영입한 존재 중 뱀신 모르나와 투신 바르투이가 가장 격이 높았다. 동물신들은 아직 온전한 초월자의 격을 회복하지 못했기에 은연중에 그 둘을 대표로 여기고 있었다. 아이반이 은밀히 심어놓은 동물신들이 호응하면서 악마에게 반기를 들었다.
몇몇 성질 급한 고위 악마가 떠나긴 어딜 떠나느냐 화를 내고는 동물신을 공격했다. 다시는 반항할 생각을 못 하도록 만들겠다며 목줄을 당기고 거세게 채찍질했다.
그런 혼란 와중에 악신이 공격당했다. 뱀신 모르나는 자기가 공격하도록 유도해 놓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소리쳤다. 악마는 악신들도 적으로 생각하며 이용할 뿐이라 외쳤다. 저 비열한 놈들에게 동료란 없다고 떠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억지뿐이었다. 그러나 선동은 한 줄의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반박할 때쯤이면 이미 모두 선동당해 있었다.
역사상 가장 사악한 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악마를 농락할 수 있을 만큼 참으로 사악한 지혜였다.
애초에 악신과 악마는 목적부터가 달랐다. 과정이 겹치기에 잠시 손을 잡았을 뿐,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악마가 실제로 무엇을 했고, 무엇을 노렸든지 악신들은 관심이 없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의 강림이 임박한 것만은 진실이었고, 그가 오기 전에 악마의 기를 꺾어 놓을 수 있다면 악신들도 나쁠 것은 없었다.
이미 진실은 의미가 없었다. 모두 계기만 노리고 있었으니 서로 으르렁거리며 몰아붙일 뿐이다.
악마와 악신이 서로 견제했다. 그러나 당장 가진 힘은 악신들이 압도적으로 강했으니, 대악마는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대악마 음습한 모략은 뱀신 모르나를 경계했었지만 설마 이리도 뻔뻔하게 깽판을 칠 줄은 몰랐을 거다. 아몰랑! 암튼 네가 잘못함, 이러면서 날뛰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알고도 당하는 공격이 이러했다.
음습한 모략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간들을 움직였다. 그들이 피의 동맹을 공격하여 천상과 녹색 만신전이 서로 싸우도록 불씨를 던졌다.
그 앞에 아이반이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지휘관이 이끄는 대로 피의 동맹을 향해 진격하던 군대를 막아서고 아이반이 소리쳤다.
“돌아가라! 이 앞은 갈 수가 없다!”
병사들은 같은 인간을 죽이는 것보다 차라리 오크를 죽이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얼마 전까지 죽일 듯이 싸우던 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아이반이 그린스킨을 보호하는 듯 있으니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길을 여시오! 영웅이라 해도 우리의 앞을 막을 수는 없소!”
“그렇다면 돌아가라! 이 앞은 그대들이 갈 곳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적을 죽이러 왔소! 그리하여 악마의 주구라는 누명을 벗고 명예로운 제국의 군인이 될 것이오!”
“진정 명예를 안다면 그게 얼마나 헛된 소리인 줄도 알 것이다! 나를 넘지 못한다면 저 땅으로는 갈 수 없다!”
아이반의 뒤에서 수많은 그린스킨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싸움을 마다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인간의 군대는 동맹의 땅에 닿지 않았고, 아이반이 그것을 막아서는 꼴이 신기해서 보고 있을 뿐이다.
동맹의 군대와 인간의 군대가 붙는 순간 휴전은 깨진다. 그걸 막으려면 아이반이 힘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차르륵!
아이반이 어두운 용의 발톱을 꺼내 뒤쪽에 선을 그었다. 이 뒤로는 단 한 명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방종이 지나치다! 그 누구도 제국의 앞을 막을 수는 없다!”
악마에게 홀린 것이 분명한 지휘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반의 목을 따오라고 병사들을 채찍질했다.
십만의 병사가 아이반을 향해 다가왔다. 바로 얼마 전까지 마리난 제국의 운명을 걸고 내전을 하던 자들이었다. 영지를 지킬 최소한의 병사를 제외하고 바닥까지 긁어모은 군대였다.
그 마지막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아이반이 말했다.
“죽이지는 마라, 저들 또한 결국 불쌍한 자들이니.”
힘 있는 자는 전장에 나서지 않는다. 체스판의 말을 굴리듯 병사를 움직여 사지로 밀어 넣을 뿐이다. 그러니 병사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어서 오라, 그대들을 위한 전장이다.”
뿌우, 뿌우우우-
긴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아이반의 등 뒤에서 위그드라실의 문양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