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64
아주 많은 일이 있었으나, 또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반은 다시 사슴 고기를 뜯었고, 오크투신 타르칸은 술을 들이켰다.
한동안 말없이 그리 있다가 고기와 술이 떨어지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반과 타르칸이 텐트 밖으로 나오니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심상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 리가 없지만, 잠깐 새어 나온 투기와 살기가 폭풍처럼 몰아쳤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간다!”
오크투신 타르칸이 그리 외치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결국 타르칸이 뜻을 꺾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찌 되었든 명령은 명령이었다. 신이 직접 선언했는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피의 동맹 전사들이 왔던 길을 향해 돌아섰다.
모두 바쁘게 철군을 준비할 때, 자연의 구도자 테잔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오크투신 앞에서 고개 숙이고 있었다.
타르칸은 테잔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원하는 것을 쟁취하라. 나는 그것을 막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오크투신과 피의 동맹을 뒤로하고 아이반과 테잔이 떠났다. 마리난 제국의 군대는 일찍이 사라지고 없었기에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멀어지자 테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자네가 이겼나?”
“지지는 않았소. 하지만 과연 이겼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결과만 놓고 본다면 아이반이 이겼으나, 그건 사실 심상 공간의 역할이 컸다. 심상 공간이 아니었다면 몇이나 되는 신들을 소환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러고 졌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오크투신 타르칸은 실로 위대한 투신이었다. 만약 본신으로 나타난 그와 현실에서 붙었다면, 아스가르드 신들을 소환할 수 없었다면 아이반이 이길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거다.
새로 태어난 아홉 세계의 힘은 아직 너무나 미약했다. 아홉 세계의 존재가 허신을 벗어나 현실에 직접 힘을 쓸 수 있으려면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먹이를 구해야겠군. 자식새끼 먹이는 아비의 책임감이 이리도 무거워.”
아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으니 테잔이 말했다.
“이제 동맹은 나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네. 위대한 아버지께서 내려오셨으니 모두 그분의 뜻을 따르겠지. 이제 어쩌면 좋겠나?”
“오크투신 타르칸을 물러나게 했으니 이제 천상의 아홉 신격을 설득해야지. 성황청으로 갈 것이오.”
“쉽지 않을 텐데… 그들은 오랜 세월 세상의 주인이었다네. 과연 쉽게 생각을 바꾸겠나?”
“언제는 쉬운 일이 있었소? 노력은 해 봐야지.”
오크투신 타르칸은 잠시 물러났을 뿐 뜻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천상과 녹색 만신전은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이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방향을 꺾어야만 했다. 충돌하더라도 가벼운 수준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제 곧 파멸의 마왕이 넘어올 것이오. 서로 싸우고 있을 여유가 없소. 그걸 알아야만 하오.”
아이반이 마리난 제국의 군대를 막아서고 오크투신을 돌려보내는 동안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는 동족을 찾아갔다. 그리고 마왕 크툴라스를 더는 막을 수 없음을 확인했다. 이제 더는 미룰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둘은 성황청으로 향했다. 강대한 존재감은 지울 수도 숨길 수도 없었다. 아홉 신격의 눈이 성황청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몰래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성황청의 문을 두드렸다. 기다렸다는 듯 델피노가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일 흙먼지 뒤집어쓰고 지내다가 멀끔한 모습을 보니 제법 괜찮군. 신수가 아주 훤하오.”
델피노는 정갈한 사제복 대신 화려한 망토를 휘감고 있었다. 신성의 찬란함과 성황청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성자 델피노는 이제 성황청을 이끄는 자였다. 아홉 신격이 선택한 신성 대리인으로서 지상의 모든 신앙을 통솔하는 존재였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맞지 않는 옷이지요.”
델피노는 화려한 망토가 영 어색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져야만 했다. 그는 이제 더는 평범한 구마사제가 아니었으니까.
“당장에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다 하시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따르겠습니다. 역시 저는 그런 삶이 편한 모양입니다.”
“다른 사제들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로군.”
아이반은 껄껄 웃었다. 델피노의 뜻은 잘 알았으나, 이제 그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은 평범하게 만나서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거물이 되었다. 천상의 아홉 신격이 선택한 신성의 지상 대리인과 아홉 세계의 지배자였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물론 우리는 함께할 것이오. 그러나 그를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천상의 신들이 동의해야겠지만.”
부드럽게 웃은 아이반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이 세상이 도움을 청한 또 다른 세상의 주인으로서, 천상과 아스가르드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홉 신격을 불러 주시오. 그들과 이야기해야만 하오. 그들의 오만함과 두려움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알려 주어야겠소.”
모시는 신과 친애하는 동료가 부딪쳤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 델피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습니다.”
델피노는 성황청의 가장 깊은 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옛 성자가 수백 년간 기도한 바로 그 자리에서 신을 불렀다.
화아아-
하늘이 갈라지며 아홉 신격이 성자의 외침에 답했다. 빛의 기둥이 내려와 델피노를 비추고, 천사들이 주위를 돌며 노래로 찬양했다.
막대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아홉 신격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 그들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감히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였으나, 이제 아이반은 허리를 빳빳하게 펴고 그들을 마주했다.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리고는 당당히 외쳤다.
“아홉 세계의 주인이 이 땅의 지배자들에게 제안할 것이 있노라!”
269화 걀라르호른
지닌 힘이야 어쨌든, 격만 따지자면 이제 아이반은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대신격이었다. 새롭게 태어난 아홉 세계의 주인이니 위그드라실과 이어진 모든 세상이 그를 뒤에서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상은 아이반을 무시할 수 없었다. 더는 하찮은 필멸자도, 떠돌이 모험가도 아니었으니까.
천상의 아홉 신격, 그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는 빛의 신 아룬이 아이반에게 물었다.
– 아이반, 아홉 세계의 주인. 그대는 무엇을 제안하려는가?
아이반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천상에게 말했다.
“그동안 나는 이 땅의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상은 나의 노력으로 힘을 아낄 수 있었음에도 대가를 지급하지 않았다. 나는 정당한 보상을 원하노라!”
사실 이 땅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 내는 것은 천상의 몫이었다. 이 땅을 지배하고 있는 신격의 의무였다.
그러나 아이반이 지나치게 훌륭한 활약을 했기에 천상은 제대로 힘을 쓰지 않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지상에 힘을 쏟아 내는 대신 막대한 기운을 비축하고 있었다.
가끔 아룬의 화신이 나타나거나 아홉 신격 중 몇이 지상에 강림하는 때도 있었지만, 그를 포함한다 하여도 천상이 아낀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가장 큰 의무를 짊어지고 있음에도 더 큰 전쟁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몸을 사리고 있었으니, 따지고 든다면 당당할 수는 없었다.
–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이 땅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정당한 계약일 뿐이다. 멸망한 세상을 빠져나온 그들을 받아 준 것이 천상임을 부인한다는 말인가?
“아스가르드는 오래된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했다. 그러나 천상의 태도는 성실하지 않았으니 어찌 정당하겠는가?”
아이반은 어깨를 펴고 아홉 신격을 바라보았다. 분명 위치상 그가 올려다보고 있으나, 눈빛만은 한없이 오만하여 천상을 내려다보는 듯했다.
“아홉 세계가 부활했으니 옛 계약은 의미를 잃었다. 아스가르드는 이제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 우리의 협력을 바란다면 밀린 셈을 치러야 할 것이다.”
천상은 아이반과 아홉 세계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홉 세계가 진정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기가 필요하고, 그게 세상의 존망을 논할 정도로 커다란 전쟁이 아니라면 수급할 수 없을 정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반과 아홉 세계가 이리 나오는 순간, 천상은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이제 필요 없다고 내치거나, 헐값으로 부려 먹던 것을 멈추고 넉넉히 값을 지급해야만 하겠지.
“나는 악신을 막았다. 악마를 죽이고, 녹색 만신전의 오크투신을 돌려보냈다. 세계수가 뜻을 함께하며 달의 여신이 돕고 있다. 그대들은 이런 나를 외면할 것인가? 그러고도 밀려오는 어둠을 이길 수 있으리라 여기는가?”
아이반이 그리 외치자 그를 바라보는 아홉 신격의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 …그렇다면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아홉 세계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천상이 여유를 부리는 것은 막대한 기운을 아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파멸의 마왕을 이쪽으로 끌어들여 싸워도 이길 수 있다 여겼고, 녹색 만신전이 그 공을 탐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심지어 아홉 세계마저 경계하며 밀어냈다.
천상은 이 땅의 지배권을 잃어버리길 원치 않았다. 수많은 초월자가 스러지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그러했다. 만약 지배권을 잃는다면 언제고 자신들도 저처럼 형편없이 영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렇다면 아이반은 천상의 지배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건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천상이 아껴 놓은 막대한 힘을 뺏어야만 했다.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를 위해서 아이반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나는 이 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그 무엇도 없다. 아홉 세계가 품은 가능성은 무한하고, 그 미래는 찬란하니, 이 땅에 있는 그 무엇도 우리를 만족하게 할 수는 없노라!”
– 그 무엇도 부족하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아홉 세계는 이 땅의 그 무엇도 탐하지 않노라! 대신, 우리는 가져야겠다!”
틀림없이 지독한 독기가 가득한 땅, 틀림없이 끔찍한 죽음이 가득한 세계.
사납고 역겨운 놈들이 썩은 숨결을 내뱉고, 사악하고 음흉한 놈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욱 잔인한 짓을 벌이는 곳.
“마계는 아홉 세계의 것이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와 온갖 대악마를 모두 찢어 죽이고, 놈들의 피로 씻어서 우리가 챙겨야겠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이 땅으로 넘어오면 당연히 저쪽은 비었다. 아홉 세계는 마계를 짓밟아 점령하고, 악마의 육신과 영혼을 쥐어짜서 위그드라실의 거름으로 쓸 것이다.
막대한 정기를 챙긴 아홉 세계는 예전보다 더욱 흥성할 것이며,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와 마계의 악마들을 쓸어버린 천상은 이 땅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겠지.
– …마계를 친다는 말인가? 단순히 파멸의 마왕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점령한다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악하고 끔찍한 기운이 가득한 마계에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약간의 방심조차 할 수 없는 괴로운 싸움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천상이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녔을 때조차 그건 꿈도 꾸지 못했다. 마계에 가득한 수많은 악마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