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67
그러나 아무리 천상으로부터 정기를 받아 왔다고는 해도 허신의 상태로 마계를 침공할 수는 없었다. 시작은 육신을 가진 자여야만 했다. 이계로 넘어가서도 활약할 수 있는 존재여야만 했다.
다행히 아홉 세계에 그런 자들이 남아있었다.
“비다르! 발리! 모디! 마그니!”
아이반이 크게 소리치자 저 멀리서 강인한 전사들이 다가왔다. 모두가 넘칠 듯한 기운을 자랑하는 강자였다.
비다르는 오딘을 잡아먹은 펜리르를 찢어 죽인 신이었고, 발리는 발드르를 죽였던 호드에게 복수하기 위해 태어난 신이었다.
모디와 마그니는 본디 토르의 사후 묠니르를 계승하는 존재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다른 신들을 능가하는 괴력을 가졌다고 하였다.
비다르와 발리는 오딘의 아들이며, 모디와 마그니는 토르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라그나로크를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이기도 했다.
아이반이 스스로 아홉 세계의 주인임을 선포하고 위그드라실을 새롭게 심으니 숨어 있던 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본디 라그나로크 이후 발드르가 부활하면 그와 함께 아홉 세계를 다스리기로 예언된 자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대들이 아홉 세계의 선봉이다! 받아들이겠나?”
아이반이 그리 소리치자 네 명의 신은 모두 무릎을 꿇고서 대답했다.
–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위하여!
아홉 세계를 위한 전쟁의 가장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은 만세토록 기록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네 명의 신은 모두 감격하여 다짐했다. 그 어떤 적이 몰려와도 물러서지 않겠다.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용맹하게 싸우겠다.
비다르와 발리, 모디와 마그니는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존귀한 신들의 아들이며, 또 아비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존재였다. 대신격이 아니었으나, 능히 그리될 수 있는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펜리르를 찢어 죽이고, 묠니르를 계승한다는 것이 그저 운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았기에 주어진 역할이 아니었다.
그들이 투기를 내뿜으니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가 환호했다. 새로운 시대의 선언이었다.
토르가 얼른 악마를 때려잡아서 정기를 넘기라고 아들들에게 속삭이는 것을 바라보다 아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하늘 너머, 몇 개의 세상을 건너서야 닿을 수 있는 마계를 노려보았다.
“출진이다! 아홉 세계의 힘을 보여라!”
착!
헤임달이 검을 뽑아들고서 아이반을 배웅했다. 니드푤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계단이 솟아나 하늘에 닿았다.
아이반이 무지개다리를 밟고서 위로 올라갔다. 사나운 이빨과 델피노가 그와 함께했고, 비다르와 발리, 모디와 마그니가 따랐다.
부서진 하늘 너머 옛 니다벨리르에 닿았다. 사방이 온통 불타고 무너진 폐허였다. 한때 웅장하고 화려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싸늘하고 초라했다.
그러나 아이반은 이 모습에서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깡! 깡! 깡!
뜨거운 쇳물을 붓고 쉴 새 없이 쇠를 두드렸다. 철을 깎고 가죽을 둘러 무기로 만들었다.
폐허가 된 신드리 궁전 옆에 새로운 니다벨리르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크기도 작고 초라했지만,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난쟁이들이 피땀 흘리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반이 멀리 시선을 두자 레긴이 보였다. 한때 이계를 떠돌던 최후의 난쟁이, 이름마저 버리고 포르니라 불렸던 니다벨리르의 왕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랑하던 그가 마침내 스바르트알파헤임으로 돌아왔다. 니다벨리르를 재건하고 아홉 세계의 군대를 위해 망치를 들었다. 자신의 손으로 희망을 만들고 있었다.
깡! 깡! 깡!
힘찬 망치 소리를 뒤로하고 아이반은 앞으로 나아갔다. 몇 개의 부서진 세계를 건너서, 어둡고 깊은 통로를 지나, 아득한 공허를 넘어 도착했다.
삶보다 죽음이 익숙하고, 즐거움보다 고통이 자연스러운 곳. 한 모금의 숨결에 독기가 섞이고,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만 가득한 곳.
마계, 악마의 땅.
“온몸이 저릿저릿한 것이 아주 성격 더러운 세계가 분명하다!”
사나운 이빨이 그리 외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사방에 크고 작은 살기가 가득해서 언제 적과 마주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낮이 밤보다 어둡고, 밤이 죽음보다 짙은 곳입니다. 빛의 자비를 받지 못한, 버려진 세계로군요.”
델피노는 마계를 그리 평했다. 버려진 세계. 이곳에 사는 악마조차 소중히 여기지 않는, 그런 세상.
세상은 죽어서 생명력 하나 없었고,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힘이 차오르기는커녕 피곤해졌다.
평범한 이가 적응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매 순간 죽음을 마주해야만 하는 지독한 장소였다.
그러나 아이반은 껄껄 웃었다. 겨우 이런 것이 악마의 세계냐며 비웃었다.
“악마 놈들은 제법 훈훈한 곳에서 사는군. 이런 포근한 곳에서 지내니 몸에 독기가 부족하지.”
조금 전까지 있었던 니플헤임만 해도 삶과 죽음이 나뉘지 않은 태초 이전의 세계였다. 초월자조차 영혼이 얼어붙는 지독한 세상이었다.
온 사방에 시체가 가득해 핏물로 온통 붉은 나스트론드는 지독한 독액과 굶주린 뱀과 늑대가 가득했고, 때때로 니드호그가 시체를 씹으러 찾아오는 곳이었다.
과연 마계가 그런 곳보다 더 지독한 세상인가? 악마의 삶이 그보다 더욱 끔찍한가?
아홉 세계는 풍요롭지 못했다. 살이 얼어붙는 추위가 가득했고, 온통 돌과 얼음밖에 없었다. 진정으로 풍요로운 곳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사람이 살기엔 척박한 곳이었다.
그들의 천국은 싸우고 또 싸워서, 죽음조차 한 잔 술로 넘기는 발할라였고, 그들의 희망은 모든 세상이 불타고 사라져야만 찾아오는 흐릿한 미래였다.
태어날 때부터 종말을 준비하며 전쟁을 위해 살아온 아홉 세계의 전사들은 악마의 땅조차 평범한 전장에 불과했다. 아홉 세계를 위해 정복해야 하는 땅일 뿐이다.
우우웅-
아이반의 등 뒤에서 위그드라실의 문양이 자라났다. 황금색 빛을 뿌리며 그 위대한 생명력을 자랑했다.
광명신 발드르, 아홉 세계의 주인이 이 버림받은 땅에 기꺼이 자비를 베풀었다. 어둠만이 가득한 세계에 빛을 뿌렸다.
“죽음만이 자비로다! 악마를 붙잡아 헬헤임의 가장 깊은 곳에 던져 넣어라!”
아이반이 그리 외치자 비다르와 발리, 모디와 마그니가 껄껄 웃으며 달려갔다. 악마의 머리를 망치로 깨부수고, 한 손으로 잡아 찢으면서 소리 질렀다.
– 나약한 자들아, 아홉 세계가 이 땅에 왔다!
악마의 피와 영혼을 제물로 아홉 세계의 문이 열린다. 버림받은 세계에 아홉 세계의 기운이 스며들어 조금씩 바꿔 놓았다.
파멸의 마왕이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마계로 만드는 것처럼, 아이반도 그렇게 마계와 아홉 세계를 이었다.
화아아-
하나의 악마가 제물로 사라질 때마다 하나의 전사가 넘어왔다. 새로운 제물을 찾아서 뛰쳐나갔다.
– 피와 죽음을! 빛나는 영광을!
– 아스가르드와 아홉 세계를 위하여!
– 아홉 세계의 위대한 주인, 아이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델피노의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마계를 직접 공격한다고 여겼는데, 어째 그런 비장함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누가 누굴 침공하고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째 악마보다 더 악랄한 느낌이다.
“역시 빈집털이라서 그런지 저항이 그리 강하지 않군. 그래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달라지겠지.”
마계는 본디 하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악마가 존재하는 모든 곳을 마계라고 불렀을 뿐이다.
마계는 실로 광활한 땅이며, 악마가 더럽힌 수많은 세계가 마계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있었다.
악마는 온갖 세계를 오가며 약한 세상을 잡아먹었다. 놈들은 온갖 사악한 지혜로 세상을 점령했고, 그렇게 마계가 된 세상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그 모든 마계에서도 가장 강대한 힘을 지녔으나, 그렇다고 유일한 마왕은 아니었다. 모든 대악마가 그를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아홉 세계의 군대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크툴라스의 영역을 잡아먹어야 했다. 괜히 다른 곳을 건드리면 상황이 복잡해지기만 했다.
아이반이 신호하자 아홉 세계의 전사들이 악마 몇을 잡아 왔다. 놈들의 팔다리를 잘라 버리고 머리를 열어 강제로 정보를 뽑아냈다.
끼이이에에!
악마의 비명과 더러운 핏물로 목표를 확인한 아이반이 소리쳤다.
“포로는 필요 없다! 적의 시체로 용맹을 증명하라!”
발할라의 에인헤랴르가 무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비다르와 발리, 모디와 마그니는 악마의 피로 몸을 적시며 아홉 세계의 군대를 이끌었고,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빨리 합류하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악신이 세상을 배신했고, 악마가 세상을 노린다면, 마신은 그들을 잡아먹었다.
아홉 세계가 진격을 시작하자 마계가 요동쳤다. 항상 공격하던 놈들이 이제 당할 때였다.
주 전력이 모두 빠져 버려서 아홉 세계를 쉽게 막을 수 없었다. 단 하룻밤에 악마의 도시 셋이 불타 없어졌다.
원정을 나간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본진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침략을 완료하거나, 방향을 돌려 본진을 지키거나.
그러나 크툴라스는 둘 다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이들을 끌어들였다.
마계의 위대한 군주, 또 다른 마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72화 집념
칼바람이 매섭게 지나가는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 아래쪽은 더위가 한창이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눈이 쌓인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아서 검을 무릎 위에 올렸다. 몸에서 고드름이 자라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며칠을 그렇게 있었다.
둥- 둥-
바닥이 낮게 울렸다. 멀리서 거친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득한 옛날 봉인되어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은 괴물들, 마계에서 넘어온 악마들.
평온하던 산을 깨우고 사악한 군대가 움직였다. 그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