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68
스걱!
가장 앞에서 산을 넘으려던 악마의 목이 잘렸다. 녀석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몰랐으나, 주변에 있던 녀석들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개중에 눈이 좋은 녀석이 있었다. 저 멀리 산꼭대기에서 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제야 누군가 그곳에 있음을 알았다.
키에에엑!
괴성을 지르면서 악마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짐승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기괴한 날개를 펼치고 산꼭대기를 향해 솟구쳤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정상에 닿지 않았다. 새하얀 눈 위에 설 수 없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
검신 카락취가 놈들을 바라보자 악마들이 잘게 썰려서 흩어졌다. 기괴한 날개는 물론 역겨운 숨을 내뱉는 목구멍과 더러운 피를 내뿜던 심장마저 쪼개졌다.
카락취는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그가 원했기에 악마들은 베였다.
강대한 의념이 법칙을 뒤흔들어 현실에 나타났다. 따로 심검이라 불리는 기예였고, 검을 든 모든 이의 이상향이나 다름없는 솜씨였다.
화르륵!
검붉은 악마의 불꽃이 그를 노리고 날아왔다. 때로 실체화된 지독한 저주나 불길한 화살이 쏘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검신의 의념은 그 모든 것을 쉬이 잘라내고 튕겨 냈다. 가장 강력한 마법과 가장 튼튼한 육신을 베고 지나갔다.
보통의 검사란 검을 쥔 손을 뻗었을 때 닿을 수 있는 거리 정도가 자신의 영역이었으나, 카락취는 산 하나를 통째로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
악마들이 멍청하게 이 땅으로 들어온 순간 그의 검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쉬이익!
보이지도 않는 검이 폭풍이 되어 사악한 군대를 휩쓸었다. 잘게 썰어진 살점과 뼛조각, 차갑게 식어 가는 핏물만 가득했다.
그러나 하나만은 멀쩡히 서 있었다. 몰아치는 칼날을 간단히 막아 내고 오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지닌 힘이 대악마와 맞먹는다는 고대 악마였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이 땅에 강림하며 데려온 놈 중 하나였다.
여섯 개의 손가락에 칼날보다 날카로운 손톱을 길게 뽑고서 녀석이 소리쳤다.
– 하찮은 고블린아! 너를 죽여 이 땅의 묘비로 삼겠다!
캉!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만든 갑옷보다 튼튼한 외골격이 카락취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면서 녀석은 손톱을 크게 휘둘렀다. 공간이 길게 찢어지며 녀석의 손톱이 카락취의 눈앞에서 튀어나왔다.
그제야 카락취가 검을 뽑았다. 앉아 있던 자세를 풀고 대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쾅!
조금 전까지 카락취가 있었던 봉우리가 무너졌다. 정상에서부터 눈이 쏟아져 아래로 밀려왔다. 그리고 그 눈사태보다 한발 앞서 카락취가 도착했다.
쉬이익!
사방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밀려왔지만, 카락취는 검을 부드럽게 흔드는 것으로 그 모든 공격을 흘렸다. 그리고 검을 눕히고 가볍게 밀어냈다.
쾅!
행동은 가벼웠으나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밀려오듯 묵직한 충격이 고대 악마를 후려쳤다. 그러나 고대 악마는 튼튼한 외골격을 믿고서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끼리릭!
고대 악마의 외골격이 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락취의 공격도 흩어졌다. 그 틈으로 손톱을 밀어 넣었다.
스걱!
카락취의 검이 고대 악마의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그 무엇보다 튼튼하다는 고대 악마의 외골격이 종잇장처럼 찢어지고 검푸른 체액이 흘러나왔다.
그대로 녀석을 베려던 카락취가 검을 되돌렸다. 고대 악마의 손톱이 카락취의 목에 닿았다가 검에 가로막혀서 뒤로 밀려났다.
쾅!
카락취의 살갗이 찢어져 목에서 피가 흘렀다. 그것을 확인한 고대 악마가 낮게 웃었다.
고대 악마는 가슴이 찢어지고 카락취는 겨우 피륙의 상처만 입었으니 명백히 카락취의 이득이었으나, 그것으로 만족했다는 듯 고대 악마가 껄껄 웃었다.
– 어때, 좀 짜릿한가?
고대 악마, 고통의 손길이 내민 손톱은 초월자조차 무시할 수 없는 끔찍한 독을 품고 있었다. 신격이라 해도 서서히 몸이 마비되고 고통이 밀려올 터였다.
고통의 손길이 저열한 기쁨이 가득 담긴 웃음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 고통에 몸부림쳐라!
날카로운 손톱이 카락취의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튕겼다. 그와 동시에 카락취가 검을 빙그르 돌리며 녀석의 팔 하나를 날려 버렸다.
스걱!
팔이 잘려 나가고 핏물이 퍼졌다. 검푸른 핏속에 독이 가득하여 마력으로 몸을 지키고 있음에도 피부가 따끔거렸다.
녀석의 손톱이 스친 목덜미와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지독한 고통이 밀려오고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점점 뻣뻣해진다. 반응이 느려지고 고통만 심해졌다. 그걸 알고 있기에 고대 악마는 팔이 날아갔음에도 껄껄 웃기만 했다.
– 검이 느려지는구나! 그래서 완전히 굳을 때까지 나를 쓰러뜨릴 수 있겠나!
고대 악마는 잘려 나간 팔을 단번에 재생하고는 거세게 달려들었다. 녀석은 몸이 갈라지는 상처조차 쉽게 회복하는데, 카락취는 스치는 상처조차 치명적이니 불리하기만 했다.
카락취의 검이 점점 느려진다. 고통의 손길이 휘두르는 손톱을 막아 내는 것이 점차 버거워지고, 몸에 자잘한 상처가 늘어났다. 그렇게 스며든 독이 다시 몸을 둔하게 만들고, 지독한 고통이 되었다.
마침내 카락취의 몸이 너무나 느려서 검을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어지니 고통의 손길이 한껏 비웃음을 머금고 다가왔다.
– 벌레가 제법이었다. 하찮은 고블린이 신격까지 되었으니 훌륭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단번에 카락취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스스슥-
고대 악마 고통의 손길이 자랑하던 손톱 끝부터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잘게 잘려서 마치 연기처럼 흩어졌다.
바닥에서부터 하늘로. 가장 미천한 자리에서 가장 고귀한 곳까지 뻗은 검이 고대 악마의 육신을 잘게 찢어 버렸다.
– 이게 무슨……!
깜짝 놀라서 눈을 치켜뜬 녀석에게 카락취가 느릿하게 말했다.
“검은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쥐는 것이다.”
의념으로 법칙을 뒤흔들고 마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검사에게 육신의 상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으로 검을 놓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검사였다. 베고자 하면 그 무엇이라도 벨 수가 있었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에 고대 악마의 육신이 흩어졌다. 고삐 풀린 악마의 마력이 사방으로 퍼지고, 놈이 그동안 갈고닦은 신성이 드러났다.
고대 악마의 영혼은 저 멀리 사라졌으나, 녀석이 남긴 의념이 거칠게 반항했다. 고대 악마의 핵이 사납게 힘을 뿌렸다.
카락취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고대 악마의 핵을 회수했다. 날뛰는 것을 힘으로 찍어 누르고 품에 밀어 넣었다.
우웅-
고통의 손길이 사라진 자리에 날이 시퍼런 검 하나가 있었다. 이게 그동안 카락취가 갈고닦은 힘의 결정체였다. 그의 삶을 나타내는 검이었다.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으나 그 무엇보다 튼튼하고 날카로운 검.
바닥에서 하늘까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에 닿은 검.
카락취가 힐끔 하늘을 바라보았다. 땅에서 솟아난 검기가 하늘에 닿아 구름을 베었다. 잘려 나간 구름 사이로 빛이 쏟아졌다.
집념, 스스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검을 갈무리하니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쪽에 온 놈들은 모두 처리한 모양이구먼. 어떠했나?”
자연의 구도자 테잔의 물음에 카락취가 대답했다.
“고대 악마, 약하진 않았다.”
대답이 느릿했다. 아직 고통의 손길이 남긴 독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몸이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이런 놈들이 몇이나 된다고?”
“확인된 것만 열이 넘고, 계속 새로운 녀석들이 튀어나오고 있네. 대악마가 다섯이라더니 그보다 더한 놈들이 숨어 있었어.”
“겨우 대악마 다섯으로 종말을 선언할 수는 없겠지.”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천상의 가장 오래된 적이며, 세상의 가장 위험한 어둠이었다. 겨우 대악마 다섯이 전부라면 그리 불릴 리가 없었다.
“마왕은 잘 막고 있나?”
이번에는 카락취가 물었다. 신격의 감각으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으나, 분신으로 여기저기 정보를 얻는 테잔만큼 정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천상에서 신격 다섯이 강림하고 드래곤 일곱이 달라붙어 막아 내는 중이야. 그러나 마왕과 악신이 양쪽에서 공격하니 쉽지 않아.”
이미 옛 마리난 제국 대부분은 저들의 손에 넘어갔다. 서부와 북부만 일부 남았을 뿐 남부와 동부는 완전히 악마의 땅이 되었다.
지난 대악마의 침공에도 어찌어찌 사수했던 대륙 최대 곡창 지대가 악마에게 짓밟혔다. 제대로 자라나기도 전에 썩어 버렸다.
동서 마리난 제국의 수뇌부가 이미 악마의 속삭임에 타락했기에 막을 수 없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이 가까스로 내전을 진압하고서 남은 것은 겨우 한 줌에 불과했다.
“악마의 공격이 거세군. 마계를 직접 공격한다고 하지 않았나?”
“글쎄, 파멸의 마왕이 마계의 영역을 포기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걸까? 잘 모르겠네.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