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7
당연히 모종의 연결이 있을 테고, 밖에 있던 흑마법사와 노예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알아차렸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그렇다면 놈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안에서 아이반과 엘프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하는 것, 아니면 던전을 공략하는 속도를 더욱 높여서 빠르게 유물을 챙기고 빠져나가는 것. ‘진입하기 전에 긴장 좀 하고 들어가야겠군.’ 아이반이 던져놓았던 도끼를 챙기는 사이 준비가 끝난 것인지 엘프 넷이 던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머지는 혹시 모를 외부의 위협을 대비하려는 모습이다.
“야, 너, 거기, 그쪽. 그렇게만 부르기는 좀 그렇군. 잠깐이나마 손발을 맞춰야할 텐데 서로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소. 나는 아이반이오. 아이반 에시르손.”
에시르손.
그 이름에 엘프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노르드의 전설에 대해서는 그들 역시 알고 있었고, 에시르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당신이 신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있었군요. 저는 엘레나 이븐우드입니다.”
이븐우드?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도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였으나 아이반의 머릿속에는 이븐우드라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씨였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수의 무녀가 이븐우드일 텐데, 무슨 관계지?’ 워낙 폐쇄적인데다 장수하는 종족이라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혈연관계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같은 성씨를 사용한다면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어쩌면 그녀 역시 꽤나 귀한 신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엘프 사회에서 신분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인간들의 기준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소리지.
‘내가 설정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어도 알 수 있었을 것 같은데 .’ 한국의 많은 게이머가 그렇듯 아이반 역시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 파밍하는 것에나 집중했지 제대로 배경설정을 파고들지 않았다. 퀘스트를 수행하기보다는 수십 번씩 같은 던전을 도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니. 어쩌다 퀘스트를 진행해도 지루한 설명이야 빠르게 스킵하는 것이 국룰이 아닌가.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어떤 몬스터를 몇 마리나 잡아야 되는지, 퀘스트 아이템을 몇 개나 모아야 되는지, 그래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왜 그래야하는지 이유는 관심이 없었다. 아이반은 그런 흔한 유저였다. 당연히 짬밥이 있으니 알만한 것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으나 이런 디테일한 부분이 부족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설정을 읊어대는 사람들에게 네다씹이라고 댓글을 달고 그냥 넘기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이반은 괜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엘레나 이븐우드.
중요한 인물인가? 그렇게까지 강해보이지는 않지만 조심해야겠군.’ 그는 한층 더 경계심을 높이면서 앞으로 나섰다.
“알겠소. 그러면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바로 뒤따라 진입하시오. 혹시 앞을 막아서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정리를 해놓지.”
오딘, 토르, 그 외 빌어먹을 아스가르드의 신들.
아이반이 나지막하게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몸속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힘이 차올랐다.
곧 있을 전투가 즐거운 것인지 힘을 빌려주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피와 죽음.
치열한 전투와 영광스러운 승리.
혹은 비참한 패배와 절망스러운 운명.
아이반의 앞에 놓인 길이 무엇이든 그들은 끝까지 흥미롭게 바라볼 것이다. 이 빌어먹을 인성파탄자 쓰레기 놈들은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는 전사가 고난에 빠질수록 더욱 더 큰 오르가즘을 느끼는 변태새끼들이니까. 꽈악 무기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아이반이 던전으로 펄쩍 뛰어 들어갔다.
화아악! 무언가 일렁이는 느낌이 아이반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곡된 공간을 넘어서 던전으로 진입한 것이다. 쿵! 뛰어든 기세 그대로 바닥에 착지한 아이반이 창을 들고 주위를 경계했으나 예상하던 습격은 없었다. 아무래도 먼저 진입한 흑마법사들은 기다렸다가 공격을 하는 대신 빠르게 유물을 차지하는 것을 선택한 듯했다. 동굴 속으로 들어왔지만 보이는 것은 나무가 울창한 숲속이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경험했다시피 던전 안의 세계는 평범한 곳이 아니니까.
화아악! 뒤를 이어 엘프들이 던전으로 들어왔다.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바람의정령을 이용해 부드럽게 땅에 내려앉았다. 확실히 다들 외모가 받쳐주니 그 모습마저도 예술적으로 보였다. 망할 외모지상주의 같으니라고.
“조용하군요.”
활을 꺼내들고 사방을 경계하던 엘레나 이븐우드가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엘프의 날카로운 감각과 정령들의 시선에도 적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머리위에 지옥불이 떨어지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으니 다행이군.”
그렇게 대꾸한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온몸에 구멍이 뚫려서 죽어버린 사람의 시체가 몇이나 바닥을 굴러다녔다. 흑마법사 녀석들이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억지로 밀어 넣은 노예들이었다.
검붉은 핏자국을 따라서 눈을 움직이던 아이반의 시선이 주변에 서있는 나무들에게 꽂혔다. 나무의 뾰족한 가지 끝에서 덜 마른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는 뻔한 패턴이지.
“공격에 대비하시오!”
아이반의 외침과 함께 주변 나무들이 빳빳하게 가지를 세우고 찔러 들어왔다.
쉬이익!아이반이 창을 굳게 쥐고 휘둘렀다. 그를 향해 덮쳐들던 나뭇가지들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팍! 한발자국도 움직일 필요 없이 그저 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공격을 거둬낸 후 엘프들을 힐끔 살폈다. 그쪽으로도 나뭇가지가 창처럼 찔러 들어왔지만 투명한 방어막에 막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하긴, 엘프들이 겨우 이런 걸로 상처를 입지는 않겠지.’ 휘이잉! 바람의 정령이 사납게 몸을 털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두꺼운 나무들을 썰고 지나가 장작더미로 만들었다.
치직, 치지직! 아이반의 몸에서도 번개가 뻗어나가 주변 나무들을 때렸다. 그렇게 몇 그루쯤 반으로 쪼개놓으니 사방이 다시 조용하게 변했다.
제법 질기고 튼튼했지만 그래 봐야 나무였다. 사람을 잡아먹으려드는 미친놈들이었으나 일행이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다.
“앞서 지나간 놈들이 한 번 정리를 하고 넘어가서 그런지 별거 없군.”
아이반은 그렇게 말하면서 바닥에 널려있는 장작더미를 뒤적거렸다. 향이 좋은 것이 이걸로 훈제를 하면 요리가 꽤 맛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죽여서 자신들의 양분으로 쓰려던 놈들이라 막상 그렇게 요리를 하면 식욕이 떨어질 테지만.
” 여기 있는 나무들은 정상이 아니군요.”
엘프들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이 거의 없는 그들답지 않게 불쾌한 모습.
숲의 요정들에게 이곳은 그만큼 괴로운 곳이었다.
“지나치게 생명력이 충만하다 못해서 비틀린 곳이오. 평범한 풀마저 이곳에서 자랐다면 괴물이 되기 충분하지.”
“아이반 에시르손, 그대는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정보를 요청합니다.”
“아예 모르지는 않지. 애초 목표가 이곳에 잠들어 있을 유물이니까.”
창을 한 바퀴 빙글 돌려서 어깨에 걸친 아이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아마도 백 년쯤 전에 미친 마법사 하나가 마탑에 보관되어 있던 보물 하나를 훔쳐서 달아났소. 꺼져가는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고, 나아가 생명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마탑의 추적을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던 마법사가 마지막에 자리를 잡고 은거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비틀린 생명의 둥지.
미쳐버린 마법사가 만들어낸 키메라와 폭주한 유물이 만들어놓은 지독한 던전.
“도대체 그 보물이 무엇이기에 악마숭배자들이 노리고 있는 것입니까?”
“생명의 구슬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오. 막대한 생명력을 품고 있어서 그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체력이 상승하고 불치병을 치료하거나 상처를 회복시킨다더군.”
사실 게임 속에서는 그리 인기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캐릭터가 불치병에 걸릴 일도 없고, 체력이 떨어져도 체력 포션을 마시면 금방 회복되니까. 설정에 나와 있는 효과는 의미가 없었고 그저 힐러 전용 장비를 만들 때 간간이 들어가는 재료아이템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실이 된 지금, 제대로 된 회복 스킬이 없는 아이반에게는 꿀 같은 녀석이었다.
그걸 차지할 수만 있다면 상처를 입어도 조금은 안심할 수가 있겠지.
“생명과 죽음은 양면성이 있으니 그것을 타락시켜서 제물로 삼는다면 아주 막강한 힘을 얻을 수 있겠지. 아마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사용하려 할 거요.”
거기까지 말한 아이반이 엘레나 이븐우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생명의 구슬에 대해 관심이 생겼냐는 의미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엘레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손에 넣도록 만들면 안 되겠군요. 추적의 속도를 높여야겠습니다.”
아이반은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지만 전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배신을 생각하지는 않는 걸까, 아니면 세계수 네트워크를 통해 이미 뒤통수를 칠 계획을 세워놓은 걸까.
” 알겠소.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묘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아이반은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 안이었지만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았다. 앞서 진입한 흑마법사 일행이 이미 쓸고 지나간 터라 상대할 몬스터조차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튀어나와 일행의 목을 졸랐을 넝쿨 식물은 이미 가닥가닥 끊어져서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산성 수액을 뱉어 먹이를 녹여먹을 식인풀은 재가 되어있었다. 그 외에도 살아 움직였을 나무와 지독한 환영을 보여주었을 독초무리가 흔적만 남기고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 일행은 그저 그런 흔적을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충분했다.
이곳은 더 이상 게임 속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죽은 몬스터들이 리젠 된다거나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쉬이익! 파르륵! 가끔 살아남은 몬스터가 덮치기는 했지만 녀석이 달려드는 것보다 더욱 빠르게 쏘아진 화살이 녀석을 꿰뚫고 지나갔다. 화살이 무슨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을 때는 아이반도 꽤나 침을 삼켰다. 엘프들은 그저 느껴지는 기세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배신해서 싸우게 되었을 때 과연 이길 수가 있을까? 승률을 조정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반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는 입겠지만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사악한 기운이 점점 강하게 느껴집니다.”
“앞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거의 다 따라잡았습니다.”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내뱉는 엘프들을 무시하고 아이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력을 눈에 집중해 시력을 끌어올리자 저 멀리서 무언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멀리 못 갔군. 그만큼 이 던전이 까다로웠다는 소리인가?”
타다닥! 아이반과 엘프들은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길 근처에 쓰러져있는 괴물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모습이 하나같이 제멋대로였다. 곰의 덩치에 악어의 이빨이 있는 녀석, 늑대의 머리에 원숭이의 몸을 하고 있는 녀석, 머리가 둘인 놈, 팔이 여섯 개인 놈.
“이건 키메라로군요.”
“흑마법사 놈들이 부리던 것이 아니오. 원래 이곳에 있던 녀석들이지.”
일찍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연구를 하던 미친 마법사의 실험체. 그 흔적.
아무렇게나 신체부위가 결합되어있는 키메라의 모습은 무척이나 불쾌했다.
말 그대로 생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버린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녀석들의 힘이 만만치 않은 것인지 흑마법사들은 아직 보스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그 앞에 붙잡혀있었다.
“이런! 벌써 녀석들이!”
한참 키메라들과 전투를 하던 흑마법사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름 빠르게 움직인다고 움직였는데, 이 망할 키메라 때문에 결국 엘프들에게 뒤를 잡힌 것이다. 그들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엘프들을 바라보다 아이반에게 슬쩍 눈빛을 주더니 물었다.
“인간? 인간이 어째서 엘프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거지?”
극히 폐쇄적인 엘프들의 종족성향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긴 했다.
물론 흑마법사들이 생각하는 대로 아이반과 엘프가 완전히 같은 편인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반은 대답 대신 창을 집어던졌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뒈진 다음에 자기 영혼을 끌고 갈 악마에게나 물어보라지.
치지직! 쾅! 번개를 잔뜩 머금은 창이 순식간에 녀석의 앞에 도착했다.
그렇게 흑마법사 하나의 심장을 부수고 박혀들려는 찰나, 어느새 튀어나온 검붉은 기사가 검을 휘둘러 창을 막아냈다.
챙! 생기 없이 말라붙은 얼굴, 푸른 안광.
굳어버린 몸을 움직이는 것은 마력이었고, 피 대신 흐르고 있는 것은 사악한 마법의 시약이었다. 데스 나이트, 한때는 밝게 빛나고 있었을 긍지를 모두 잃어버린 죽음의 기사.
” 확실히 바깥에 있던 놈들과는 다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