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70
– 흘흘흘, 그리 노려볼 것 없다네. 나도 아홉 세계의 존재이니 도울 것은 도와야지.
늙은 요툰이 그리 말하자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디가 되물었다.
– 당신이 진정으로 우리와 함께한다는 말이오?
– 그래야지. 라그나로크는 끝나지 않았나?
– …그래, 그렇긴 하지.
아홉 세계는 이제 진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옛 원한은 모두 씻겨 내려가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쉽게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건 아직도 라그나로크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비다르와 발리, 모디와 마그니는 라그나로크를 겪고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 헬헤임이 다시금 아홉 세계를 노릴 일은 없을 거야. 새로운 아홉 세계의 주인이 우리를 이끌고 있으니.
새로 나타난 요툰과 네 신격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델피노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서 거칠게 몰아치는 어두운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가 빛의 신 아룬의 하위 신격이라 할 수 없었다.
단순히 성자의 수준을 넘어 천상의 인도로 신성을 얻은 델피노는 세상의 모든 어둠을 선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위쪽에서 강한 악마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초월자가 몇이나 되는군요.”
“파멸의 영역을 지키는 자가 저리 많지는 않을 텐데… 혹시 크툴라스가 영역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델피노는 아이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오랜 세월 구마사제로 활동했고, 또 성자가 되어 그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성황청의 온갖 비밀스러운 기록을 탐독했다. 어쩌면 웬만한 악마들보다도 그들에 관해 잘 알았다.
그 누구보다 악마와 마계에 정통한 델피노가 단언했다. 저들은 파멸의 권속이 아니었다.
“악마는 특별한 계통에 따라 마력이 조금씩 다릅니다. 저들은 아무리 보아도 지금껏 마주했던 자들과는 다르군요.”
“새로운 마왕이라… 설마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자리를 비웠다고 그 영역을 탐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크툴라스가 그리 허술한 자는 아닐 겁니다. 이 또한 그의 계획이겠죠.”
“그렇다면 파멸의 마왕이 자신의 영역을 다른 마왕에게 넘길 리가 없으니 아마 침공 중인 세상을 나눠 가지자고 제안했겠군.”
새로운 마왕의 참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악마가 서로 사이좋은 녀석들이 아닌데, 설마 마왕끼리 협력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악마의 수작을 많이 막아 내고 아군의 힘을 키웠으니, 피해 정도가 문제지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러면 그조차 불분명했다.
아마 아홉 세계가 중간에 끼어드니 파멸의 마왕도 혼자서 삼킬 수는 없다고 여긴 모양이지. 먹어야 할 세상이 둘이니 마왕 하나를 끌어들여도 이득이라는 생각이다.
아이반은 과연 본래의 세상이 잘 버티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마왕 하나라면 모르되, 둘이나 동시에 침공한다면 버티는 것이 만만치 않을 거다.
악마는 세상을 침략하고 타락시키는 것이 아주 익숙한 놈들이었다. 하나의 마왕이 하나의 세상과 힘이 비슷하니, 정상적이라면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아홉 세계가 얼마나 빠르게 힘을 회복하느냐에 달린 셈이군.’
아홉 세계가 자체 생산하는 정기는 아직 미약하기만 했다. 천상이 넘겨 준 막대한 정기도 빠르게 바닥나고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끌어서 아홉 세계의 정기가 바닥나기를 기다렸다면 악마에게는 더 수월했을 텐데.
아이반은 쯧쯧 혀를 찼다.
“뷔페를 차려 놓았군. 맛있게 먹고서 본래 세상을 확인해야겠어.”
아이반이 손짓하니 악마의 성채를 점령하던 에인헤랴르가 또다시 전투를 준비했다. 네 신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늙은 요툰이 그들을 막았다. 자신의 진심을 보여 주겠다며 나섰다.
– 흘흘흘, 헬헤임이 뜻을 함께함을 증명하겠다.
쿵!
늙은 요툰이 발을 구르자 위그드라실이 요동쳤다. 땅에서부터 영혼마저 얼어붙는 시린 냉기가 솟구쳤다. 짙은 죽음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우우웅-
땅을 가르고 배가 솟아올랐다. 죽은 자의 손톱과 발톱으로 만든 배가 망자를 태우고 마계에 나타났다.
늙은 요툰, 흐륌(Hrym: 노쇠한)이 소리쳤다. 라그나로크 당시 헬헤임의 망자를 이끌고 미드가르드로 진격해 최후의 전쟁을 벌였던 나글파르의 선장이 선언했다.
– 이 땅의 악마는 누구도 살아가지 못한다!
274화 허무의 경고
땅을 가르고 나글파르가 움직였다. 어둠에서 솟구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망자가 움직이는 배는 강도 바다도 아닌, 참혹한 운명에서 항해했다. 지하에서 솟아나 하늘을 떠돌다 산과 들을 넘어 지독한 전장으로 향했다.
– 그 누가 망자의 걸음을 막느냐! 감히 죽음 앞에 당당한 이가 누구냐!
나글파르의 선장, 흐륌이 그리 소리치자 망자들이 더 빠르게 노를 저었다. 그렇게 허공을 헤엄쳐 악마와 마주했다.
강력한 초월자와 수많은 망자가 나타나니 악마들도 잠깐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넓은 마계에 가득한 것이 시체와 죽음이고, 또 널려 있는 것이 타락한 초월자였다. 반응이 빨랐다.
쿵!
해골을 뒤집어쓰고 낡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이가 앞으로 나섰다. 새하얀 해골의 눈구멍에서 푸른 안광이 불빛처럼 흔들리고, 뼈만 남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가득했다.
지고한 경지에 오른 흑마법사였다. 가장 깊이 죽음을 탐색한 네크로맨서였다. 죽음의 비밀과 세상의 진리, 사악한 마법을 탐독하다 못해 스스로 죽음에 몸을 던지고 다시 태어난 자였다.
리치였다. 그저 어설프게 언데드가 된 녀석이 아니라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간 아크 리치였다.
아이반은 예전 리치와 몇 번이나 부딪혔지만, 그 녀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력이 대단했다. 한낱 언데드 마법사의 한계를 넘어서 초월자에 닿은 놈이었다. 죽음 그 자체를 쥐고 흔들 만큼 마력이 강력하고, 또 사악했다.
거의 대악마나 다름없던 썩어 가는 손아귀, 홀로 마리난 제국의 삼 할을 불태운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도 물론 대단했지만, 저 네크로맨서가 그보다 약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마계가 넓고, 대단한 사령술사가 많다고는 해도 이런 수준의 괴물이 흔할 리가 없었다. 델피노는 녀석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망자의 군주…….”
비록 물질계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으나, 마계에서는 아주 흔한 속성이 죽음이었다. 그러나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이 아니니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차이가 있었다.
대악마 죽음의 인도자가 지닌 죽음은 사신이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끝, 공평한 결말.
반면 망자의 군주가 지닌 죽음의 속성은 달랐다. 생명이 떠나고서도 사라지지 않는 집착과 원념,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불사의 군대.
망자의 군주는 마계에서 가장 이름난 네크로맨서였다. 손짓 한 번에 백만의 망자가 움직인다는 죽은 자들의 지배자였다.
녀석이 킬킬 웃었다. 감히 자신에게 덤벼드는 망자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 생명이 떠난 이들은 모두 나의 노예이니 너희도 다르지 않으리라.
사사삿-
망자의 군주가 사악한 마력을 내뿜었다. 망자를 무릎 꿇리고 강제로 충성을 받아 내는 강력한 권능이 나글파르를 스치고 지나갔다.
쿵!
망자의 손발톱으로 만들어진 배가 허공에 멈춰 섰다. 열심히 노를 휘젓던 망자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망자의 군주가 내뿜은 마력이 그들을 막아섰다.
사악한 마력이 계속 속삭였다. 얼른 무릎 꿇으라 재촉했다. 망자라면 응당 복종하라 소리쳤다. 그 힘이 나글파르에 탄 모든 이들의 몸을 짓눌렀다.
이대로 나글파르가 망자의 군주 손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기껏 소환했더니 적의 노예가 되어 창칼을 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반은 그걸 걱정하지 않았다. 나글파르의 선장 흐륌도 그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 감히, 감히……!
나글파르가 멈춘 것은 악마의 수작이 치명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 모욕적이라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글파르의 선장 흐륌이 온몸을 떨면서 분노했다. 참을 수 없는 모욕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흐륌(Hrym), 그 이름의 뜻대로 노쇠한 모습의 늙은 요툰이 거친 살기를 내뿜으며 소리쳤다.
–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뼈다귀 놈이 감히 우리의 주인이 되려 하느냐! 헬헤임의 군대가 그깟 권능에 무너질 정도로 나약해 보였느냐!
쾅!
나글파르를 휘감았던 망자의 군주의 마력이 단번에 밀려났다. 라그나로크에서 아홉 세계를 두렵게 만들었던 헬헤임의 군대가 그 저열한 수작을 떨쳐 냈다.
나글파르의 망자들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지상에 남은 자들이 아니었다. 저승으로 가기 싫어서 억지로 버티던 자들이 아니었고, 저승의 틈으로 몰래 빠져나온 자들도 아니었다.
이들은 죽음의 회피자가 아니며, 저승의 도망자도 아니었다. 정당한 죽음의 주민이며, 저승의 군대였다. 죽은 자들의 진정한 지배자, 여신 헬이 가호하는 헬헤임의 전사였다. 감히 악마 따위가 주인을 자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 너에게 진정한 죽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헬헤임의 가장 깊은 곳으로 끌고 가 너의 영혼을 불태우겠다!
둥!
둥!
두둥!
흐륌이 소리치자 북소리가 울리고 다시금 나글파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짙은 그림자에서 끊임없이 죽은 자의 손발톱이 나타나 달라붙어서 나글파르의 크기를 키웠다.
일찍이 옛 노르드의 왕, 귈피(Gylfi)과 대화하며 오딘이 말했다.
“세상의 선박 중에 가장 좋은 솜씨로 만들어진 배는 스키드블라드니르요, 가장 거대한 배는 나글파르다.”
아홉 세계 모든 망자의 손발톱이 바로 나글파르의 재료였다. 아홉 세계의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하며, 나글파르가 완성되는 것을 늦추기 위해 죽은 자의 손발톱을 짧게 깎았다고 했다.
그러고도 막아 내지 못하여 라그나로크가 도래하자 헬헤임의 병사를 이끌고 비그리드 평원에 나타났으니, 이것이 곧 라그나로크 최후의 전쟁이었다.
나글파르는 곧 종말을 상징하는 배였다. 어설픈 수준으로는 감히 막아설 수 없었다.
– 그래, 이 정도도 막지 못하면 파멸의 마왕이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없겠지.
자신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 걸 깨달은 망자의 군주는 뼈만 남은 손에 달랑달랑 매달린 보석 반지들을 쓰다듬다가 지팡이를 내리쳤다. 수백 년간 축적한 마력이 단번에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