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72
그걸 무시하고 어느 곳에서나 완전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마왕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마왕은 자신이 있는 곳이 곧 마계가 되는 권능이 있으니까.
“마왕이 둘이나 움직였으니, 저쪽 상황도 좋지는 않겠지. 일단 그리 돌아가야겠소.”
아홉 세계가 마계를 직접 공략하기로 천상과 계약했지만, 아홉 세계 홀로 마왕 하나와 싸워서 버티라는 조건은 없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행동도 달라져야겠지.
“악마들이 아홉 세계와 이어진 통로를 막으면 곤란하니 그 주변 지역만 지키도록 하고 우리는 떠납시다.”
비록 허무의 마왕이 개입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허무의 마왕이 파멸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지키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까지 할 의리는 없을뿐더러, 파멸의 마왕으로서도 아홉 세계의 침공만큼이나 신경 쓰이는 것이 허무의 마왕이 뒤통수를 치는 것일 테니까.
일단 마계의 상황은 어느 정도 소강상태로 놓고서 본격적인 승부는 물질계에서 하고 싶겠지. 허무의 군세도 결국은 그리 향할 테고.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군.’
파멸의 마왕은 차라리 잠깐 물러나서 아홉 세계의 군대를 완전히 털어 냈어야 했다. 허무의 마왕은 적당히 경고만 주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서 쓸어버렸어야만 했다.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아홉 세계가 순순히 후퇴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걸 후회해야만 할 거다. 아홉 세계의 힘은 이게 전부가 아니니까. 다음은 더욱 강해질 테니까.
깡!
깡!
깡!
아홉 세계에서 출발한 마계 원정군은 약간의 정기를 챙기고 물러났다.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었으나, 그 약간의 정기로 아홉 세계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니다벨리르의 용광로가 더욱 커지고, 난쟁이는 더욱 바쁘게 무기를 만들었다. 알파헤임의 요정들이 오래된 마법으로 세상을 일깨우고, 헬헤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악마의 영혼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아스가르드는 물론이고 미드가르드에서 부활한 인간들마저 다시 헬헤임으로 갈 각오를 마치고 전쟁을 준비했다.
전쟁의 뿔피리가 울리고 적의 피로 몸을 덥혔다. 상처 입은 자존심으로 아홉 세계가 모두 들끓었다.
아홉 세계 모두가.
* * *
“음?”
마계에서 돌아와 니다푤에 발을 디딘 아이반이 문득 느껴지는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반의 시선이 저 멀고도 먼 곳으로 향했다. 여덟 개의 세계를 넘어서 그곳을 보았다. 세상의 끝과 끝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다.
화르륵!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눈이 타들어 가는 듯 따가웠다.
그리도 뜨거운 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가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아직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듯이.
아스가르드의 몇몇 신만이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리고서 호들갑을 떨었다. 누군가는 재미있다는 듯이 껄껄 웃었고, 누군가는 못마땅한 듯이 눈을 찌푸렸다.
무스펠헤임의 수호자가 반응했다. 그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던 자가 아이반을 보았다.
“그를 어찌 생각하시오?”
아이반이 고개를 돌려 아스가르드에 있는 옛 주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오딘은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서 침묵했다.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을 불태운 화염 거인 수르트는 아홉 세계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자였다. 세상에 그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나, 정작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는 위미르가 최초의 요툰이니 그의 자식이 아니겠냐고 추측했지만, 다른 이는 위미르의 가장 오래된 형제일 것이라 말했고, 또 누군가는 수르트가 위미르의 아비일 것이라 속삭였다.
오래전 직접 위미르를 죽이고 그 시체로 세상을 창조한 오딘도 정확한 사실은 몰랐다. 수르트는 그보다 오래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아마 우주의 비밀을 탐닉하는 볼바조차 그의 탄생과 사멸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리라.
– ···수르트는 아홉 세계의 새로운 주인을 인정했어. 그 속이야 어찌 짐작하겠느냐마는 당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침묵하는 오딘을 대신해 로키가 그리 속삭였다. 어차피 수르트는 제어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 깊이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신 로키는 다른 것에 집중하라 했다.
– 마왕과 싸우려면 우리의 족쇄를 벗거나 놈들을 끌어내려야만 한다.
아홉 세계가 아닌 땅에서도 온전히 힘을 발휘할 방법을 찾거나, 마왕들도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거나.
‘그러니 천상이 마왕을 끌어들여서 처리하고자 했겠지.’
이전에는 그들의 선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천상의 아홉 신격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면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마왕이 공격하는 것은 정해진 미래였다. 지금 바로 닥치는 일이냐, 먼 미래의 일이냐 하는 차이에 불과했다.
짧은 생이 전부인 필멸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감각이지만, 불멸하는 초월자가 보기에는 그 시간적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고 닥칠 일이라면 차라리 상황이 유리한 지금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 거다.
그러나 침공하는 마왕이 둘이 되었으니 상황이 곤란해졌다. 아무리 천상이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마왕 둘을 감당할 수는 없으니까.
아홉 세계가 돕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이나 요툰헤임의 거인들도 아홉 세계를 벗어나면 힘이 약해지니까.
어설픈 놈들이라면 그런 조건을 무시하고 밀어붙여도 쓰러뜨릴 수가 있겠지만, 마왕을 그렇게 쓰러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놈들을 아홉 세계로 끌어들여야만 할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러면 따로 정기를 모을 필요도 없이 아홉 세계의 허신들이 모두 싸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제 겨우 새롭게 태어난 아홉 세계에서 그만한 전쟁이 벌어지면 다시금 위그드라실이 불타 버릴 거다. 아직 아홉 세계는 그런 전쟁을 버틸 정도로 튼튼하지 못했다.
같이 죽자는 게 아닌 이상 놈들을 아홉 세계로 끌고 올 수는 없었다. 애초에 마왕들이 순순히 끌려오지도 않을 테고.
“난감하군. 방법이 있소?”
– 방법이 있다.
아이반이 별다른 기대 없이 물었는데 뜻밖에 로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상황을 반전할 방법이 있노라 단언했다.
“쉽지 않은 일인데 확신하는 말투로군.”
– 듣기로 악마들의 왕은 자신이 밟은 땅을 마계로 만드는 권능이 있다지. 그것으로 어느 세계에서나 제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중이잖소?”
–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권능으로 상황을 뒤집으면 되는 일이다.
마왕의 권능은 다른 세상을 침략하는 데 특화된 힘이었다. 애초에 차원 방벽으로 막는 것이 아니라면 어쩔 방도가 없을 만큼 강력한 권능이었다. 과연 아홉 세계에 그와 비견되는 권능이 있단 말인가.
– 나의 아들은 가장 높은 하늘에서 가장 낮은 땅까지 한입에 세상 모든 것을 삼켰다. 세상을 창조한 오딘마저 먹어 치웠어. 그러니 마계도 잡아먹을 수 있을 거야. 악마의 왕이 가진 권능을 삼키고 녀석들을 끌어내릴 수 있겠지.
로키가 낳은 아이는 몇이나 되었으나, 그중에 진실로 자식으로 여기는 것은 셋이 전부였다.
아득한 옛날, 그들이 라그나로크를 불러오리라 볼바가 예언한 이후 로키의 세 자식은 모두 세상의 가장 깊은 곳으로 버려졌다.
막내는 창세 이전부터 존재했던 얼음과 안개의 땅에 버려져 죽은 자들을 이끄는 저승의 지배자가 되었다.
둘째는 끝도 없이 깊은 바다에 버려지고도 세상을 휘감을 정도로 성장하여 세계뱀이 되었다.
그리고 로키가 자랑스러워했던 첫째 아들.
한때 친구라 생각했던 자들에게 배신당해 매달려 있다가 라그나로크가 일어나자 가장 먼저 족쇄를 끊어 버리고 신들의 왕을 집어삼킨 자.
아홉 세계를 통틀어 가장 거대하고 가장 강력한 늑대.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펜리르······.”
그러자 그 이름을 들은 아홉 세계의 모든 늑대가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고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마치 늑대의 왕을 경배하듯 소리쳐 울다가 몸을 낮췄다.
아우우우우-
늑대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면서 아홉 세계를 휩쓸었다. 태양과 달을 쫓아서 달리던 늑대들이 문득 멈춰 서니 밤낮과 시간의 흐름마저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로키가 흥분한 듯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때가 왔음을 알고서 아들을 위해 소리쳤다.
– 펜리르를 불러라!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홉 세계의 고민을 해결할 것이다!
276화 헬헤임의 깊은 곳
노르드 신화, 아홉 세계의 수많은 괴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자가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펜리르였다.
라그나로크를 일으킬 것이라 예언된 로키의 자식, 한입으로 세상을 삼켜 버린 늑대, 오딘의 대적자.
따로 그를 부르길 바나르간드(Vánagandr: 반 강의 괴물)라고 했고, 또 흐로드비트니르(Hróðvitnir: 유명한 늑대)라고도 했다.
아홉 세계에 늑대가 제법 많지만, 그 무엇도 펜리르 앞에 설 수는 없었다. 진정으로 늑대의 왕이라 불릴 만한 존재였다.
펜리르의 이름은 아홉 세계의 늑대들만이 아니라 아스가르드의 신들도 흥분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요툰헤임의 강력한 요툰 군주들조차 기겁했다.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끼고 아이반이 로키에게 물었다.
“오직 펜리르만이 답이란 말이오?”
– 내 아들이 아닌 그 누구도 한입에 세상을 잡아먹을 수는 없겠지.
로키의 답변을 들었음에도 아이반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팔짱을 끼고서 깊이 고민했다.
이 빌어먹을 로키의 제안은 항상 겉으로는 그럴듯하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으나 과정이 더럽게 위험했다. 당당히 밝히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많았고, 쉽게 알려 줄 수 있는 일조차 최대한 어렵게 전했다.
옛 발드르가 자신의 이름과 권능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니드호그 입에서 으적으적 씹히고 있었을 텐데 어찌 로키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겠나.
어차피 결국에는 그리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도 영 떨떠름하기만 했다.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몸이 굼떴다.
이번에는 얼마나 개고생을 하게 될지 벌써 숨이 턱 막혔다.
‘펜리르, 펜리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