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74
살아 있는 자는 누구라도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지독한 냉기였다. 초월자조차 몸놀림이 둔해지고 영혼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끼니 함부로 올 곳이 아니었다.
오직 죽은 자만이 이 가혹한 세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얼어붙을 육신 자체가 없었고, 남아 있는 영혼은 헬헤임이 가호하고 있었으니까.
한 호흡, 한 걸음이 끊임없이 생존을 시험할 정도로 위험했다. 일행이 모두 초월자가 아니라면 진작 얼어붙어서 숨이 끊어졌을 거다.
그렇게 지독한 추위를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데, 어째 온도가 점차 올라갔다. 뼈가 시리고 살점이 터져 나갈 정도로 사나운 냉기가 사라지고 후끈했다.
동굴의 입구까지는 분명 차가웠는데, 어느새 미지근해졌다가 지금은 덥기까지 했다. 두꺼운 털옷을 입고 있던 델피노가 코트를 벗었지만 이미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웬만큼 춥고 더워도 멀쩡한 초월자가 땀을 흘릴 정도면 이 더위도 평범한 것은 아니란 소리였다.
“사우나를 하기 딱 좋은 온도다!”
사나운 이빨이 그리 외치며 껄껄 웃었지만 따라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년을 동료로 지내도 리자드맨의 농담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제법 긴 동굴을 지나니 새로운 출구가 보였다. 그 너머는 덥고 습한 밀림이었다. 바닥은 단단하지 못하고 물렁물렁했으며, 축축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 발이 푹푹 빠질 것 같았다.
“동굴의 끝에 이런 곳이 있다니 신기하군요.”
델피노는 그리 말하며 주변에 가득한 풀과 나무를 가까이서 살피려 했으나 샬피가 말렸다.
“함부로 건들지 않는 게 좋습니다. 여기는 펜리르의 영역이니까요.”
그는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쉴 새 없이 나무 사이를 살피고, 불안한 듯 땅을 바라보았다.
나무가 많고 땅은 물렁물렁하니 달리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샬피의 가장 강력한 권능이 봉인된 셈이다.
“이곳이 원래 이런 땅이 아닐 텐데, 펜리르가 바꿔 놓은 모양입니다. 하긴, 이제 글레이프니르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겠죠.”
강력한 초월자가 머무는 곳은 자연스럽게 환경이 변했다. 초월자의 힘과 의지가 워낙 대단하다 보니 그 흔적이 남아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대체로 불이 가득한 곳에 불의 신이 자리 잡고, 물이 가득한 곳에 물의 신이 자리를 잡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반대로 초원에 불의 신이 자리 잡으면 들판이 바싹 마르고, 사막에 물의 신이 자리 잡으면 샘이 솟았다.
저쪽 세상이야 차원 방벽이 만들어지면서 웬만한 초월자는 죄다 물질계 밖으로 쫓겨나 다른 차원으로 움직였기에 쉽사리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본디 초월자는 이처럼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상의 법칙을 뒤흔들고 주변 환경을 바꾸었다.
거대한 늑대와 발이 푹푹 빠지는 습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으나, 사실 이름 자체가 그러했다.
“펜리르(Fenrir)는 늪지대의 거주자라는 뜻이오. 이곳이 그에게는 익숙한 환경이란 소리지.”
아이반은 그리 덧붙이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존재감이 그의 몸을 쿡쿡 쑤시고 있었다. 시선만으로 온몸이 잘게 찢어지는 것 같았다.
“펜리르! 그대와 이야기를 하고 싶소!”
아이반이 그리 외치자 늪지대가 잘게 떨렸다. 질퍽한 땅과 길게 뻗은 풀과 나무까지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 이야기? 그런 것은 필요 없다. 나는 더는 너희를 믿지 않으니까.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정신파가 퍼졌다. 짙은 분노와 불쾌감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는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아홉 세계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오! 로키가 직접 당신을 추천했소!”
– 필요 없다고 했다! 너희의 간악한 수작에 당하는 것은 한 번이면 충분하니 어서 꺼져라!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은 동생들과 달리 펜리르는 한때 아스가르드에서 다른 이들과 우호적으로 지냈다. 가끔은 신들과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썩 괜찮은 관계였다.
그러나 볼바의 예언을 듣고서 아스가르드 신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펜리르는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으나, 단지 미래에 아홉 세계를 위협할 괴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모두 그를 경원시했다.
밧줄로 묶고 힘으로 끊어 내는 것을 놀이처럼 하여 익숙하게 한 뒤에 누구도 풀 수 없는 마법의 끈, 글레이프니르로 단단히 묶어서 라그나로크의 그날까지 이 척박한 땅에 박아 넣었다.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이 그를 속였다. 심지어 결투와 전쟁, 법률과 용기의 신인 티르마저 거짓말로 그를 농락했고, 더러운 수작으로 묶어 놓았다.
그리하여 가장 지엄하고 영광스러워야 할 결투의 신이 정당하지 못한 행동을 하여 스스로 신성을 더럽혔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오른팔을 잃어버렸다.
한때 오딘과 비슷한 영광을 누리던 티르는 그 자리를 잃고 영락했다. 그러고도 대신격을 유지하고 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옛 영광과 비교하면 초라하기만 했다.
그렇게 법률과 결투의 신마저 속이고 외면했으니 펜리르가 입은 마음의 상처가 깊고도 깊었다.
그의 동생들은 처음부터 버려졌기에 복수심은 있을지언정 배신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활한 아홉 세계와 뜻을 같이하고, 아스가르드와 협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펜리르는 한때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친구라 여겼기에 배신감이 지독했다. 단순한 복수심보다 더욱 강렬했다. 세상이 한 번 무너지고 다시 태어나도 지울 수 없을 만큼 진했다.
– 그리 뼈저린 경험을 하고도 다시금 속을 줄 아느냐! 나는 너희의 말을 듣지 않겠다!
그르르르르-
펜리르의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펜리르의 영역이 주인의 사나운 감정에 반응하여 거칠게 휘몰아쳤다. 갑자기 몸을 짓누르는 압력에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 내가 지금 당장 너희를 씹어 삼키지 않는 것은 기껏 부활한 아홉 세계를 다시금 불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아홉 세계의 주인이라는 그 알량한 자리가 끓어오르는 나의 분노를 억누르고 있으니, 다시는 나의 앞에 나타나지 마라!
펜리르가 그리 소리쳤지만 아이반도 물러설 수 없었다. 마왕과 싸우려면 펜리르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당신의 분노는 정당하오. 그러나 아홉 세계를 위해서라도 나의 말을 들어주시오.”
– 그렇다면 아홉 세계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나! 영원토록 매달려 나를 괴롭혔던 것 또한 너희는 아홉 세계를 위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분노를 참지 못한 펜리르가 몸을 일으켰다.
두두두두-
늪지대가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나무가 뽑혀 나가고 축축한 웅덩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멀리서 마치 세상이 몸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다. 호수를 마시고 산을 씹을 만큼 거대한 짐승이 아이반을 노려보았다.
불타는 두 눈은 마치 해와 달처럼 빛났고, 숨결은 용암보다 뜨거웠으며, 또 만년설보다 차가웠다.
지금껏 수많은 거인을 보았으나 펜리르는 그 모든 거인보다 더욱 거대했다. 진실로 세상을 한입에 삼켰다는 라그나로크의 늑대다웠다.
– 역겨운 아스가르드의 신들아, 나는 더 이상 너희에게 속지 않겠다!
펜리르가 앞발을 들어 내리치자 땅이 무너지고 용암이 끓어올랐다. 산의 뿌리가 흔들리고 하늘을 찢으며 강력한 폭풍이 몰아쳤다.
펜리르 역시 라그나로크의 끝에 목숨을 잃고 허신이 되었으나, 이곳은 헬헤임의 일부라 살아 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펜리르가 자신의 영역을 만들었으니 그가 가장 강력하던 시절과 비교해도 결코 밀리지 않으리라.
“젠장,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아이반이 욕설을 내뱉으며 신성을 일으켰다. 펜리르를 상대로 어설프게 간 보며 버틸 수는 없었다. 시작부터 최대로 힘을 끌어내야만 했다.
우웅-
등에 새겨진 위그드라실이 빛을 뿌리며 나타나고, 그 가지가 아홉 세계에 닿았다. 아홉 세계의 모든 힘이 아이반을 뒤에서 든든히 지지했다.
꽃이 핀 겨우살이 가지를 들고서 아이반이 펜리르를 노려보았다. 그의 주변으로 어두운 용의 발톱, 묠니르, 피의 검 브리카가 나타나 빙글빙글 돌았다.
휘이잉-
치지직!
스스슥-
어두운 용의 발톱에 오딘의 권능이 깃들어 궁니르를 닮아갔다. 묠니르에서 토르의 번개가 뿜어져 나오고, 피의 검 브리카는 프레이의 힘을 받아 스스로 움직여 거인을 베는 검이 되었다.
‘하여간 이 빌어먹을 세계는 대화하는데도 쌈박질이 필요하군.’
이 모든 것이 아스가르드 신들의 업보였다. 그걸 알면서도 오딘의 후계자가 되었던 아이반의 잘못이었다.
쉬이익!
아이반이 겨우살이 가지를 휘두르니 세 무기가 공간을 뛰어넘어 펜리르를 공격했다. 오딘과 토르, 프레이의 힘이 거대한 늑대를 후려쳤다.
쾅!
“바기 울프스(Bági ulfs: 늑대의 적)”
“바디 비트니스(Váði vitnis: 늑대의 적수)”
“바푸드 궁그니스(Váfuðr Gungnis: 궁니르를 휘두르는 자)”
“툰드(Þundr: 천둥소리를 내는 자)”
펜리르가 비틀거리는 사이 아이반은 단번에 주문 몇 개를 연달아 읊으면서 그를 억누르고 자신의 힘을 강화했다. 전신에 새로운 힘이 솟구쳤다.
아우우우-
아이반의 마법이 달라붙는 것을 느낀 펜리르가 길게 고개를 빼들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강력한 마법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깜짝 놀란 아이반이 뒤로 물러날 때 사나운 이빨은 불꽃으로 만든 날개를 활짝 펼치고 펜리르에게 달려들었다. 저렇게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나운 이빨은 뱀신 모르나의 인도를 통해 용의 심장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였다. 사브리나마저 동족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니 화염 드래곤이 내뿜는 불길과 그의 불길은 차이가 없었다.
화르륵!
용의 불길이 펜리르의 털을 불태웠다. 그러나 워낙 덩치 차이가 심해서 그 정도로는 치명상이라 할 수 없었다.
쿵!
펜리르가 앞발을 휘두르니 사나운 이빨이 저 멀리 날아갔다. 산을 찰흙처럼 짓뭉갤 수 있는 위력이었기에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델피노가 제때 방어막을 만들어서 아주 심각한 상처는 입지 않았다.
“빛이여!”
델피노가 소리치자 허공에서 빛의 사슬이 나타나 펜리르를 묶었다. 그러나 채 한 호흡도 견딜 수 없었다. 펜리르가 몸을 뒤틀자 빛의 사슬이 모두 터져 나갔기 때문이다.
– 겨우 이런 것으로 나를 붙잡을 수는 없다!
그사이 아이반도 주문을 읊었다. 옛 노르드 언어로 마법을 쏟아 냈다.
“발레위그(Báleygr: 불타는 눈)”
“보드게디르(Bǫðgæðir: 전투의 증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