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76
“씨부럴, 그러면 말이라도 할 기회를 주던가. 듣지도 않고 대뜸 덤벼들었으면서 말이랑 행동이 다르긴, 개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아이반이 펜리르를 바라보았다.
“이들을 봤으면 알겠지만, 힘으로 억누르고자 했다면 이미 그러했을 거요. 당신이 강하다고는 해도 이들을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처음으로 돌아가 차분히 대화나 해 봅시다.”
– 대화? 도대체 무슨 간교한 말로 또다시 나를 속이고 이용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간교한 말과 수작은 당신 아버지, 로키가 부렸지. 나는 로키가 당신을 추천했기에 찾아왔을 뿐이오.”
아이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자 공간이 쩍 갈라지며 로키가 나타났다. 그리고 하하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 아들아, 요즘도 기운이 넘치는구나. 내가 너를 그 비루한 자리에서 꺼내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
로키는 시대가 바뀌었음을 알렸다. 옛 원한은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영광이 시작되었노라 말했다. 아홉 세계가 새로이 탄생했으니 그와 자식들도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 너의 동생들은 그에 동의했다. 요르문간드가 아스가르드에 합류하고 헬라가 아홉 세계를 위해 헬헤임의 문을 열었다. 그러니 너도…….
– 아버지.
– 그래, 내가 너의 아비…….
– 좀 닥치십시오. 후려갈기기 전에.
펜리르는 자신의 아버지 로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 아스가르드의 일원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던 그가 헬헤임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은 결국 로키의 자식이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로키가 진정으로 자식들을 위한다면 그는 애초에 자식들이 버려지는 것을 막았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음을 펜리르는 원망했다.
‘훈훈한 부자 관계로군. 이렇게 콩가루 같아야 진짜 아홉 세계다운 일이지.’
아이반은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로키를 밀어냈다.
“그리 존경받는 아비는 아니군. 그러면 저리 꺼지시오.”
– 으흠, 요즘 첫째 아이가 사춘기가 와서… 원래 첫 아이 육아는 경험이 없으니 쉽지 않은 일…….
항상 여유롭고 음흉하던 로키가 당황했는지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무시하고 펜리르에게 말했다.
“그동안 아스가르드가 했던 일에 대해서 사과하겠소. 워낙 쌈박질밖에 모르는 빡대가리 새끼들이라 일 처리가 매끄럽지 않았소.”
듣고 있던 아스가르드 신들이 팍 인상을 찡그리며 뭐라 떠들어 댔지만 아이반은 그 또한 무시했다. 오로지 펜리르만 바라보았다.
“나는 이들과 다르오. 그러니 이제 이성적으로 대화해 봅시다. 하나도 속이지 않겠소.”
한참이고 아이반을 바라보던 펜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일단 듣는 것 정도라면.
279화 복수를 위하여
펜리르와 대화를 시작한 아이반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상황을 설명하고 딱 잘라서 말했다.
“악마가 날뛰고 있소. 놈들을 잡아먹어야만 아홉 세계가 완전히 부활할 수 있고, 그러지 못하고 밀린다면 다시금 위그드라실이 불타고 아홉 세계가 무너질 것이오. 그를 막기 위해 도와주시오.”
그러자 펜리르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 나는 이미 아홉 세계의 모든 것을 불태우겠다고 다짐했었고, 실제로 그리하였다. 내가 태도를 바꿔야만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는 운명에 지는 것이니까. 당신은 예언으로 억압받았으나, 결국 예언대로 행동했지. 배신감과 복수심에 참을 수 없었겠지만, 아스가르드는, 아홉 세계는 예언이 결국에는 옳았다고 말하고 있소. 당신의 억울함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 당연한 일이리라 믿소.”
– …그래서 내가 잘못했다는 거냐? 그 분노를 품고서도 끝까지 참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냐?
펜리르가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아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옛일에 관심이 없소. 굳이 따지자면 당신의 행동이 옳았다고 믿지.”
– 그럼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가?
“아홉 세계는 다시 태어났소. 이제 세상을 옥죄던 예언도 없고, 정해진 미래도 없소. 그런데 또다시 족쇄를 두를 생각이오?”
아홉 세계를 불태운 악신 로키는 아스가르드로 돌아왔다. 평생 깊은 바다에서 홀로 살았던 요르문간드는 이제야 다른 이와 함께할 수 있었고,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던 헬라도 이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모두가 외면하던 삶에서 이제야 영광된 자리를 찾았다. 두렵고 증오스러운 괴물이 아니라 당당한 신이 되었다.
“옛일을 잊으라고 말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또다시 그 참혹한 삶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어둠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 세월이 길었으니, 이제는 빛으로 나오시오.”
– 말은 쉽지. 하지만 무엇으로 내 분노를 달랜단 말이냐? 이미 나를 배신하고서 또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만 했다. 그 지독한 배신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한 번 위그드라실이 불타고 아홉 세계가 무너졌지만, 그것으로 펜리르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 …대가라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침묵하며 지켜보고 있던 티르가 나섰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결투의 신이 펜리르를 바라보았다.
– 옳지 않은 일이라면 막았어야 했다. 정당한 결투가 아니라면 인정하지 않아야 했고, 부당한 수작질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티르가 내뱉는 마디마다 후회가 흘러나왔다. 누구보다 공정해야 할 법과 결투의 신이 부정을 저질렀으니 세상의 질서가 무너졌다.
한때 아홉 세계는 진정으로 전사다운 이들로 가득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협잡과 수작이 당연시되었다. 음모와 배신이 일상처럼 벌어졌다.
모두 티르가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법과 결투의 신부터가 공정하지 못하니, 세상 어디에도 공정함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 그대에게 나를 바치니 마음 가는 대로 다루어도 좋다. 뼈와 살이 갈라질 정도로 거세게 매질을 하여도 좋고, 목줄을 매달고 위그드라실의 가장 높은 가지부터 가장 깊은 뿌리까지 끌고 다녀도 좋다. 나를 벌하여 그대의 분노를 녹여라.
티르가 그리 말하자 펜리르가 거대한 앞발로 그를 짓누르고는 사납게 소리쳤다.
– 하라고 한다면 못 할 줄 아느냐? 그리고 겨우 너 하나로 나의 분노가 모두 사라질 줄 아느냐? 아스가르드가 모두 나의 분노를 받아야 할 것이다! 아홉 세계가 모두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날카로운 발톱이 살을 찢었다. 지반이 무너지고 땅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강력하게 짓눌렀으니 티르가 느끼는 압박감이 작지 않으리라.
그러나 티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펜리르의 눈을 마주 보면서 되물었다.
– 그래서 또다시 세상을 부술 건가? 아홉 세계를 무너뜨리고 또다시 지독한 고독 속에서 고통스러워 할 것인가?
– 그래야 내 분노가 사라진다면! 얼마든지! 몇 번이라도!
– 그럴 필요 없어. 자네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네. 부디 우리가 옛 실수를 돌이킬 기회를 주게.
펜리르가 으르렁거리며 한참이나 티르를 노려보았다. 주변에 서 있는 아스가르드의 신들과 아이반을 보았다.
여전히 남아 있는 분노가 그를 붙잡았다. 헛소리는 듣지 말고 당장 뿌리치라고 소리쳤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티르를 조각내고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잡아먹으라고 속삭였다.
펜리르는 그 유혹을 간신히 이겨 냈다. 멈출 수 없는 분노가 깊은 배신감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뒤집히다가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펜리르는 어쩐지 힘이 빠졌다. 조금 전까지 그를 불태우고 있던 분노의 불길이 허무하게 잠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했는데 혼자 과거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분노는 여전한데, 어째 그 분노조차 이제는 낡은 것처럼 느껴졌다. 화를 내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졌다.
– …그래, 시대가 변했군.
펜리르는 시대의 흐름을 느꼈다. 아홉 세계가 진정으로 바뀌었음을 알았다. 참 허무하고 허무했다.
– 그대를 돕겠다. 그러나 그건 그대를 위해서도, 아스가르드나 아홉 세계를 위해서도 아니다.
“물론이오. 원하는 것이라도 있소? 아홉 세계의 주인 자리를 걸고 최대한 들어주겠소.”
펜리르는 아이반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해와 달을 열심히 쫓던 스콜과 하티 흐로드비트니손, 펜리르의 아들들이 제 일조차 까먹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그(vargr), 괴물 늑대.
이제 그런 악명을 벗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펜리르는 기쁘기보다는 그저 심란하기만 했다.
– …할 일이 다 끝나면 그저 편안히 자고 싶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무엇도 미워하지 않고 실컷 자다가 상쾌하게 깨어나고 싶어.
죽은 자의 땅에서 펜리르가 일어났다. 세계를 삼키는 늑대가 아홉 세계의 바깥으로 향했다.
* * *
대륙의 절반이 전쟁터였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고, 피가 흐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천상과 녹색 만신전이 모두 문을 열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수많은 하위 신격이 그들을 따라 창칼을 들었다. 그러고도 상황이 좋지 못했다.
파멸의 마왕은 물론이고 허무의 마왕이 보낸 군단마저 하나씩 이 땅에 닿았다. 후방을 흔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아홉 세계가 후퇴하였으니 악마를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다.
대악마는 물론이고, 그에 밀리지 않을 고대 악마들도 몇이나 나타났다. 악신들도 여기저기서 날뛰고 있으니 버티기가 힘들었다.
한때 승리를 자신했으나, 이제는 생존을 걱정해야만 했다. 상대는 점점 더 강해지고, 아군은 점점 지쳐만 갔다.
“결국, 크게 당했소. 균형이 무너진 탓이지.”
투신 바르투이가 딱딱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는 옆구리가 쩍 벌어져서 제대로 아물지 않고 있었다. 대악마 악의의 증명이 남긴 상처였다.
“살아난 게 다행이오. 그때 병력의 절반이 쓸렸으니까.”
뱀신 모르나와 투신 바르투이를 적의 세력으로 침투시켜서 겨우 빼내 온 수많은 동물신이 그야말로 학살당했다고 했다.
“대악마 홀로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아이반이 물으니 투신 바르투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는 아니었지. 파멸의 마왕이 움직였소.”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최우선 경계 대상이었으나, 갑자기 적이 늘어나니 제대로 막을 수가 없었다. 잠깐의 틈이 생기자 그대로 찔러 들어온 것이다.
“천상의 다섯 신격이 급히 나타나 막았으나 그사이 동물신이 완전히 쓸려 나갔소. 목숨을 건진 것을 몇 되지 않지.”
영락한 동물신들은 비록 지금은 초월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는 초월자였던 자들이다. 하나둘이라면 몰라도 모이면 웬만한 대신격도 밀어붙일 수 있을 텐데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홀로 동물신들의 사지를 찢어서 시체의 산을 쌓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