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77
“실로 강력했소. 어찌 반항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무리 강한 자를 보더라도 두려움보다 호승심이 앞서는 투신이 질린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마왕의 힘이 그만큼 압도적이었다는 뜻이다.
“뱀신 모르나는 어찌 되었소?”
“그녀도 어찌 잘 몸을 빼냈소. 하지만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이더군. 한참을 갈등하다가 요정의 숲으로 향했소.”
뱀신 모르나는 세계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요정에게 버림받았고, 세계수는 요정이 선택하였으니 열등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뱀신 모르나가 제 발로 요정의 숲으로 가다니, 어지간히 화가 났던 모양이다.
“모르나는 신격답지 않게 감정이 진하지. 흥미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조차 버릴 수 있지만, 또 남이 자신의 것을 건드리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내고는 해. 하긴, 그게 그녀의 본질이지. 탐욕, 쾌락, 질투, 분노. 태초의 일곱 요정이 남긴 감정의 찌꺼기.”
이레인이 나른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나타났다. 오랜만에 곰방대를 들고서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 오랜만이야. 마계에서는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지?”
“빌어먹을 마왕이 하나 더 나타날 줄은 몰랐으니까.”
아이반은 그리 대답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도 이제 초월자가 되었군. 느낌이 어떻소?”
“나쁘지 않아. 하지만 음, 또 아주 좋지도 않네. 책임이 정말 무거워.”
이레인 뒤로 연결된 영혼의 흐름이 너무나 찬란해서 마치 빛의 장막 같았다. 그 얇은 실 같은 것 하나하나가 엘프의 정신과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세계수 네트워크의 또 다른 핵이 되었다.
‘…예상보다 더 성장했군. 거의 세계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아. 갓 초월자가 되었다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단순히 격을 얻어 초월자가 된 것이 끝이 아니라 세계수와 이레인이 서로를 보완하고 있었다. 그 시너지가 상당했다.
“모르나와 세계수가 협력하고 있어. 지금의 힘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근원적인 힘을 끌어내려는 중이지.”
“지금도 제법 강해 보이는데 여기서 더 강해질 방법이 있단 말이오?”
“세계수와 모르나가 나눠 가진 옛 선조의 힘을 다시 합치려는 거야.”
이 세상 모든 엘프의 근원인 일곱 요정이 남긴 힘을 되살리고 있다 하였다. 신화시대 거인과 드래곤, 신들에게 밀리지 않았던 옛 힘을 모으는 것이다.
“이미 갈라지고 흩어진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그걸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이오?”
“그 정도는 되어야 마왕과 싸울 수 있다고 판단했어. 해내야만 하는 일이지.”
천상의 다섯 대신격과 맞서 싸우면서도 오히려 밀어붙이는 마왕의 위용을 본다면 누구나 그리 여길 수밖에 없었다.
마왕은 홀로 세상 하나를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괴물이니 초월자 중에서도 격이 달랐다.
두두두두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서늘한 살기가 바람에 섞여서 이곳까지 불어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이닥치는 악마의 군대였다.
최근에는 한 번 싸울 때마다 전선을 뒤로 물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만큼 악마의 기세가 좋았다.
“이제 나서야겠네. 병사들 밥 먹을 시간 정도는 벌어야지.”
그리 말하는 이레인을 붙잡고 사나운 이빨이 껄껄 웃었다.
“그러면 저 녀석들은 우리가 다 먹어도 되는 건가?”
아이반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계에서 당한 빚은 갚아야지.”
280화 종말을 위한 제물
아이반이 성벽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걸음 한 번으로 거리를 훌쩍 좁혀서 어느새 악마의 군세 코앞에 닿았다.
허무의 마왕 때문에 마계에서 물러나고, 아홉 세계에서는 펜리르를 설득하느라 얻어맞았다.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가 작지 않았다. 아이반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악마의 영혼을 쥐어짜서 아홉 세계의 양분으로 삼아라!”
아이반이 그리 소리치며 발할라의 문을 열었다.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가 전장에 닿고, 니다벨리르에서 만든 튼튼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에인헤랴르가 크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 아이반을 위하여!
– 아홉 세계를 위하여!
아이반은 아홉 세계의 주인이며, 에인헤랴르의 군주였다. 그는 결코 혼자 움직이지 않으니, 아홉 세계의 위대한 전사들이 그와 함께했다.
뿌우우우-
둥!
두둥!
뿔피리가 하늘을 울리고 북소리가 땅을 두드렸다. 에인헤랴르의 발걸음이 전장을 짓눌렀다.
– 용맹을 증명하라!
– 영광을 쟁취하라!
쾅!
에인헤랴르가 악마의 머리를 방패로 후려치고 칼로 심장을 찔렀다. 촉수를 끊어 내고 창을 던져 날개를 꿰뚫었다.
아홉 세계가 강해질수록 에인헤랴르 역시 강해졌다. 니다벨리르가 아홉 세계의 전사들을 위해 만든 무구로 세차게 전장을 휩쓸었다.
악마들은 물론 질기고 강했지만, 에인헤랴르는 모두가 이름 날리던 위대한 전사들이었다. 가장 위험한 순간에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머쥔 용사들이었다.
그들이 다녀간 전장은 언제나 그들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고,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싸움조차 더없이 영웅적이었기에 발키리의 인도를 받을 수 있었다.
세계 멸망, 종말의 순간을 위해 가장 치열한 전장을 목표로 단련한 자들이었다. 숨이 끊어진 후에도 매일같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싸워 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노련한 베테랑이었으며, 가장 패기 넘쳤고, 삶과 죽음을 따로 보지 않는 두려움 없는 전사였다. 다시금 발할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전사의 투지는 가장 잔인한 악마조차 움찔 몸을 떨 만큼 지독했다.
스걱!
발할라의 전사 하나가 악마의 목을 베자, 다른 악마가 촉수를 뻗어 전사의 배를 꿰뚫었다. 내장을 파내고 피를 흡수했다.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발할라의 전사는 오히려 활짝 웃으며 촉수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기어이 녀석에게 칼을 쑤셔 넣고서야 발할라로 돌아갔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해 비틀거리는 악마를 옆에 있던 전사가 마무리했다. 시커멓고 역겨운 악마의 체액을 뒤집어쓰고, 지독한 독기에 몸이 타들어 가면서도 껄껄 웃으며 다른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 죽어라, 악마 놈들아! 아홉 세계의 거름이 되어라!
발할라의 문은 그 수가 오백 하고도 사십이었다. 하나의 문마다 팔백의 전사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옛 라그나로크는 물론이고 지금도 그 커다란 발할라를 모두 채울 만큼 에인헤랴르를 모을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에인헤랴르의 활약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에인헤랴르가 날뛰기 시작하자 거세게 달려들던 악마의 군대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성이 없는 마물이 등을 돌려 달아나려다 독전관을 맡은 고위 악마에게 몇이나 찢겨 죽었기에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아이반은 전장을 둘러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저 뒤에 있는 악마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파장을 보면 틀림없이 격을 얻은 놈들이었다.
탁!
아이반이 묠니르를 불러와 한 손에 쥐었다. 그대로 악마의 골통을 부수고 천둥신의 힘을 해방했다.
“토르!”
아이반이 소리치자 아스가르드에서 지켜보고 있던 토르가 힘을 보탰다. 직접 강림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런 식으로나마 달랬다.
치지직!
쾅!
묠니르가 몇이나 되는 악마를 고깃덩이로 만들고서 멀리 날아갔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대악마를 노렸다.
몰아치는 번개와 폭풍에 근처에 있던 악마가 지워지듯 사라졌다. 땅이 움푹 파이고 하늘이 요동쳤다.
그러나 정작 아이반이 노렸던 악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막아 냈다. 누더기 같은 날개를 길게 펼치고서 네 개나 되는 눈동자로 아이반을 노려보았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손톱과 근육 가득한 몸, 온몸에 휘감고 있는 불길한 마력과 다른 악마조차 두려워할 정도로 짙은 살기.
아이반은 녀석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놈이 악의의 증명이군. 투신 바르투이의 옆구리를 갈라놓은 대악마.’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 밑에 있는 다섯 대악마와 무수히 많은 고대 악마 중에서 최고의 전사를 말하라면 이견의 여지가 없이 저 녀석이었다.
아무리 바르투이가 아직 초월자로는 그리 대단치 못하다고는 해도 명색이 투신이었다. 싸움의 재능이 초월자들 사이에서도 남달랐기에 세계가 기꺼이 싸움의 신이라는 신명을 주었다.
그런 바르투이를 한 방 먹이고 옆구리를 뜯어먹었으니 방심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아이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투신보다 잘 싸울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시작은 조심스럽······.’
미처 생각을 다 마무리하기도 전에 악의의 증명이 사라졌다. 그리고 섬뜩한 느낌이 밀려오니 아이반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묠니르를 휘둘렀다.
스으윽-
쾅!
커다란 손톱이 허공을 휘젓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아이반이 만들어 낸 마력 장벽이 쩍 갈라지고 핏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묠니르로 중간에 쳐내지 않았다면 몸이 조각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이반의 모습이 흐려지고 멀찍이 뒤로 물러나 나타났다. 조금 전 공격을 환상으로 돌리고 멀쩡한 모습을 되찾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