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78
주르륵-
잠깐이라면 세상조차 속이는 로키의 권능을 무시하고 아이반의 몸에 상처가 남았다. 대악마의 권능이 그만큼 지독했다.
‘처음부터 환상을 꿰뚫어 보았나?’
환영으로 거짓 형상을 만들고, 공간의 사각지대에 몸을 숨기고, 또 세상을 속여서 과정과 결과를 뒤바꾸고.
아이반이 환영을 사용해 적을 속일 때는 그런 식으로 몇 겹의 노림수가 있었다. 치열한 싸움 와중에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는 어려워서 대신격도 왕왕 속아 넘어가고는 했다.
그런데 대악마 악의의 증명은 처음부터 속지 않았다는 것처럼 역으로 빈틈을 찔렀다. 우연이라기엔 몹시 의심스러웠다.
‘악의의 증명, 이름이 그런 이유가 있단 소리겠지.’
아이반이 잔뜩 경계하고 있으니 갑자기 뒤에서 공격이 날아왔다. 황급히 고개 숙여 피하고 반격하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앞에 있던 대악마가 그 틈을 노리고 달려왔다.
쾅!
묠니르로 녀석을 후려치고 피의 검 브리카를 뽑아 옆을 베었다. 그러자 검붉은 핏물이 솟구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아이반과 대악마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렸을 리는 없고, 환상? 내가 역으로 환영에 당했다고?’
쉬이익!
다시금 있을 수 없는 방향에서 공격이 날아오고, 또 대악마가 아이반을 노렸다.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공격과 달라진 반응이었다. 그리고 아이반이 간신히 피하고 반격하니,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상대의 온갖 거짓을 한눈에 꿰뚫어 보고 그 이상 은밀하고 사악한 수작으로 적을 공격한다. 실패하면 처음으로 돌아가 그 무엇도 없던 것처럼 사라진다.
녀석 앞에서 세상의 모든 거짓이 드러나니 악의요,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반복하니 증명이라. 그런 권능을 가진 주제에 첫손가락에 꼽히는 전사라니, 대악마는 대악마였다.
“재미있는 기술이야. 이러니 바르투이가 못 이겼지.”
아이반이 그리 말하자 대악마 악의의 증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 알아차렸군. 신격이라 해도 쉽게 깨닫지 못하는데.
순식간에 몇 가지 과정이 겹쳐졌다가 흩어졌다. 그걸 반복하다 최상의 결과가 나오면 현실로 고정된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아니고, 흔한 환상도 아니었다. 확정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건드리는 권능의 힘이었다.
그건 신격이라 해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미래를 엿보는 강력한 예언자만이 자신이 본 미래와 어긋나는 현실에 어렴풋이 깨달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반의 신성은 곧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었다. 잠깐이나마 미래의 한 갈래를 현실로 불러오는 권능을 가졌으니 대악마가 사용한 권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치지직!
순간적으로 대악마와 아이반의 권능이 부딪혔다. 대악마가 원하는 미래는 아이반이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기에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졌다.
아이반 뒤에는 아홉 세계가 있었다. 신성의 크기나 권능의 격만 놓고 비교하자면 대악마라고 해도 아홉 세계의 주인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걸 깨달은 대악마 악의의 증명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한껏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 이것도 막을 수 있겠나!
악의의 증명은 그렇게 강력한 권능이 없어도 여전히 강했다. 마왕을 제외하고는 따라올 자가 없는 최강의 악마 전사였다.
마치 중간 과정을 잘라 낸 듯 대악마가 다가왔다. 권능을 사용할 때보다 그냥 몸을 움직일 때가 훨씬 더 빠르고 강력했다.
쾅!
“윽!”
묠니르로 막았기에 몸이 구멍 나는 것은 피했지만 단번에 팔이 부러지고 내장이 터져 나갔다.
초월자이기에 겨우 그 정도로 목숨을 잃지는 않으나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우웅-
등에 새겨진 위그드라실의 문양에서 청춘의 여신 이둔이 내뿜은 신성이 흘러들어 왔다. 비릿한 피 냄새를 뚫고 싱그러운 사과 향기가 코끝을 스치니 아이반의 육신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아이반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대악마는 끝을 보고자 했으나, 용의 형상으로 나타난 브리카가 앞을 가로막았다.
크르르르르-
피의 검에 저장된 막대한 양의 마력이 움직였다. 브리카는 화염 드래곤 사브리나의 영혼을 일부 머금었기에 미약하게나마 용언의 힘이 담겨 있었다.
쿵!
물론 진짜 용이 눈앞에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을 대악마는 한 방에 브리카를 때려눕혔으나, 그 짧은 순간에 아이반은 이미 몸을 회복하고 반격할 준비마저 마쳤다.
“흘레프레위르(Hléfreyr: 무덤의 주인).”
아이반이 짧게 주문을 읊으니 뼛속까지 시린 니플헤임의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홉 세계의 문을 열고서 새로운 자가 육신을 뒤집어쓰고 죽음에서 부활했다.
우트가르다 로키(Útgarða-Loki).
아홉 세계를 통틀어도 능히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대마법사는 이 땅에 나타나자마자 흘깃 대악마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 역겹게 생긴 놈이구나.
요툰 군주가 그리 말하며 지팡이를 흔드니 그의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강철 벽이 몇 겹이나 나타나 악의의 증명을 가뒀다.
그러고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던 우트가르다 로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악의의 증명이 날뛸 때마다 거대한 강철 벽이 이리저리 휘어지고 땅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 이 무슨 무식한 힘인지. 저 녀석은 뭐하는 놈이오?
“대악마. 마왕을 제외하면 악마 중에서는 최고의 전사지.”
– 오래는 붙잡지 못하겠어. 아홉 세계의 주인께서는 무엇을 위해 나를 이리 부르셨소? 정기가 여유롭지 않을 텐데. 또 순서가 밀렸다면서 토르가 날뛰고 있을 거요.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우트가르다 로키는 예를 갖추고 있었다. 아이반을 진정한 아홉 세계의 주인으로 인정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녀석을 제물로 위그드라실 밑에 잠든 니드호그를 불러와야겠소.”
281화 아홉 세계의 선언
니드호그는 위그드라실 아래에서 사악한 힘을 토해 내고 있었다. 거칠고 음습하며, 질척거리는 마력을 위그드라실의 양분으로 보내고, 깨끗이 정화된 기운을 받아들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그건 짧은 시간으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상적이라면 신격조차 아득할 정도의 세월이 흘러야만 가능했다.
그렇기에 우트가르다 로키가 필요한 거다. 물질과 관념의 경계를 마음대로 주무를 정도의 대마법사가.
“가능하시겠소?”
아이반이 물으니 우트가르다 로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아홉 세계의 주인께서는 몹시 어려운 일을 주문하시는군. 그건 마법의 신이라는 오딘이나 프레이야, 나와 이름이 같은 라우페위의 아들이라 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오.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뜻이오?”
–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소.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이 녀석을 먼저 때려눕혀야겠는데… 미리 말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는 없소.
대악마 악의의 증명을 가둬 둔 강철 벽이 거칠게 찌그러지고 있었다. 녀석이 곧 탈출하려는 모양이다.
쾅!
두꺼운 강철 벽을 찢어 버리고 뛰쳐나온 대악마 악의의 증명이 우트가르다 로키를 노려보았다.
세상의 법칙을 찢어 버리는 손톱으로도 단번에 탈출할 수 없을 만큼 강철 감옥이 튼튼했다. 그걸 지팡이 한 번 흔들어서 만들었으니 실로 놀라운 수준의 대마법사였다.
“해야 할 일을 하시오! 나머지는 내가 준비할 테니!”
아이반은 그리 소리치며 묠니르를 쥐었다. 세상의 모든 파괴적인 권능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천둥신의 힘이 그를 도왔다.
치지직!
쾅!
천둥 걸음, 말 그대로 천둥을 밟고 나아간 아이반이 묠니르를 휘두르자 우트가르다 로키를 노려보고 있던 대악마가 고개를 돌렸다. 손톱을 휘둘러 아이반의 육신을 꿰뚫었다.
푸슉!
아이반의 심장이 터졌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육신은 고깃덩이가 되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대악마 악의의 증명이 그걸 깨닫는 순간, 모두 없던 일이 되어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아이반은 묠니르를 들고 달려들고 있었다. 악의의 증명도 손톱을 내밀고 있었다.
– …내 권능을 훔쳤구나!
“결이 비슷하니 대충 요령이 보이더군.”
대악마가 분노하고 아이반이 비웃으며 대꾸했다.
일순간에 여러 과정을 반복하여 원하는 현실을 고정하는 대악마의 권능과 갈래갈래 뻗은 무수한 가능성을 현실로 불러오는 아이반의 권능은 닮은 점이 무척이나 많았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잠깐이라면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다. 대악마의 권능이 그에 대항하니 결국에는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하고 잠깐 스쳐 지나가는 환상이나 기시감에 불과했으나 그것만으로 대악마를 도발하기엔 충분했다.
쾅!
대악마 악의의 증명이 우트가르다 로키를 노리던 것을 포기하고 아이반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주먹이 아이반을 후려쳐 날렸다.
녀석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아이반을 갈기갈기 찢으려 했으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실이 몇 겹이나 겹쳐져 대악마의 팔을 붙잡았다.
세상의 온갖 모순으로 만들어 힘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다는, 아홉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봉인구.
글레이프니르의 힘으로 대악마의 공격을 막아 낸 아이반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타이밍이 어긋났으면 잘릴 뻔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