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80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 미움을 받던 예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 줌의 바람과 한 뼘의 땅, 피부를 스치는 추위와 더위까지. 세상 모든 것이 증오하던 니드호그는 사라졌다.
생명체라면 가장 기본적인 행위, 숨을 들이켜고 내뱉는 것조차 세상과 싸워야만 가능했던 과거는 이제 과거로만 남았다.
그는 평생 평온과 행복을 몰랐고, 증오와 분노만 알았다. 그러나 그저 세상의 모든 것이 저주하고 적대하지 않는 것만으로 니드호그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아홉 세계의 가장 불길한 곳에서도 가장 끔찍하던 마력은 모두 사라졌다. 마계의 악마들조차 두려워하던 사악한 권능은 사라졌다.
그러나 니드호그는 살아 있었다.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른 위치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 나는 아홉 세계의 일원으로서 너와 싸우겠다.
니드호그의 선언에 파멸의 마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 그래, 예전과는 너무나 다르구나. 그리 약해진 모습으로 감히 덤비려 하느냐? 사악한 마룡이 어둠의 힘을 모두 버리고 어울리지도 않는 모습으로 얼마나 싸울 수 있겠느냐?
그러자 이번에는 니드호그가 웃었다. 너무나 유쾌한 듯이 웃음을 터트리다가 말했다.
– 얼마든지.
고오오오-
사악한 마력을 위그드라실의 양분으로 던져 주고 새로운 힘을 얻은 니드호그가 마력을 터트렸다. 그러자 모두 사라졌다고 여겼던 어둠의 힘이 솟구쳤다. 죽음의 악마보다 더욱 짙은 죽음이 살랑거리며 나타났다.
애초에 아홉 세계는 마냥 선하고 순수한 곳이 아니었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가장 훌륭한 사기꾼이자 깡패, 배신자, 도둑들이며, 훌륭한 전사들은 죄다 피에 미친 광전사였고, 세상의 가장 훌륭한 장인이라는 난쟁이는 온갖 음습한 욕망을 지닌 사악한 존재였다.
니드호그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들 갑자기 성스러운 빛을 뿌리고 선을 권장하는 신룡이 될 리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홉 세계의 방식대로, 아홉 세계의 드래곤이었다.
니드호그는 여전히 종말의 용이었다. 이제 그 종말이 아홉 세계의 종말이 아닐 뿐이다.
파바밧!
종말의 마력이 흘러나오자 세상이 요동쳤다. 그것을 느낀 창조주의 분신, 드래곤들이 다급히 공간을 넘어 찾아왔다. 그 수가 모두 열넷이었으니 세상에 남은 드래곤이 모두 나타난 셈이었다.
고고하게 날개를 펼치고 세상의 종말을 논하는 니드호그를 보며 드래곤들이 몸을 떨었다. 물질계의 조율자를 자처하는 그들과 저 이계의 드래곤이 완전히 다른 성향과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한 번 니드호그를 본 적이 있는 사브리나만이 침착했다. 지금 이렇게 몸이 떨릴 정도로 사악하고 잔인한 마력조차 예전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순해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니드호그는 적이 아니었다. 사브리나가 그리 판단하고 동족들에게 알리자 드래곤들은 니드호그를 견제하는 것을 멈추고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를 노려보았다.
아이반, 사나운 이빨, 델피노, 이레인, 바르투이, 우트가르다 로키와 니드호그, 천상의 아홉 신격에 드래곤 열넷까지.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대단하다고는 해도 섣불리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대악마 악의의 증명을 눈앞에서 잃어버리고도 참아야 했다.
– …나는 대가를 치렀다. 인내는 이번뿐이니, 다음은 나의 차례로다.
파멸의 마왕이 그리 중얼거리며 사라지자 아이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말이 아군을 향한 것이 아닌 듯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곳에 있는 아군의 세력이 강하지만, 그래도 파멸의 마왕이 순순히 물러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지?’
홀로 하나의 세상과 겨룰 수 있다고 전해지는 것이 마왕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일방적인 손해를 감수할 리가 없었다.
‘다른 노림수가 있나?’
아이반이 그리 생각하는 사이 천상이 소란스러워졌다. 천상의 신격들이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곳이 아홉 세계였다면 아이반 역시 빠르게 알아차렸겠지만, 그의 세상이 아니기에 세상 전부를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스스슥-
그때 주변에 굴러다니던 나뭇가지에 흙과 모래가 달라붙어 늙은 오크의 형상을 만들었다.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보낸 분신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마왕의 기운과 주변에 가득한 초월자들. 틀림없이 치열한 싸움의 현장을 살피고는 테잔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도 제법 치열했군. 그러니 어쩔 수 없었지.”
테잔의 목소리에 허탈한 감정이 가득했다. 표정이 밝지 못하고 힘이 없었다.
“무슨 일이오?”
아이반은 상황을 대충 짐작했으나, 테잔의 대답을 듣고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구도자 테잔이 말했다.
“녹색 만신전이 패퇴했네.”
* * *
아이반이 대악마 악의의 증명과 싸우던 그 시각, 피의 동맹도 적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악마를 때려죽이고, 조금 전까지 등을 맞대고 싸우던 동료가 언데드가 되어 물어뜯으려는 것을 불태웠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전투였다. 그러나 전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 오늘도 그러했다.
“시커먼 공간의 문이 열리고, 낯선 악마들이 나타났다네. 악마 놈들이야 워낙 개성적으로 생겨서 항상 낯설고 또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좀 달랐어.”
악마는 같은 계통에 있는 놈들끼리는 마력이 닮았다. 평범하게 충성을 맹세하는 놈들이 아니라 힘으로 상대를 제압한 후에 반항하지 못하도록 마력으로 제약을 걸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니 파멸의 마왕이 부리는 군대는 모두 크툴라스와 비슷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와 너무나 다른 마력을 가진 놈들은 곧 다른 마왕의 군대란 뜻이었다.
“허무의 마왕이 움직였어. 놈이 부리는 군대가 밀려왔지.”
본디 하나의 세상이 하나의 마왕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허무의 마왕은 무척이나 낯선 존재였다. 오죽하면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 정도였다.
“허무의 마왕은 강했다네. 파멸의 마왕만큼이나 말이야. 녹색 만신전이 그리 허무하게 밀릴 줄은 아무도 몰랐지.”
피의 동맹은 최후의 전쟁을 위해 녹색 만신전을 이 땅에 소환했다. 가장 먼저 녹색 만신전의 주인인 오크투신 타르칸이 내려왔고, 뒤이어 트롤왕을 비롯해 그린스킨의 온갖 조상신들이 나타났다.
신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그린스킨의 가장 위대한 자들이 모두 모였으니 악마라도 두렵지 않았다. 피의 동맹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그게 한 번에 무너졌다. 허무의 마왕과 녀석의 군대는 가장 튼튼한 요새를 모래성처럼 무너뜨렸다.
“위대한 아버지 타르칸의 도끼가 부서지고, 트롤왕의 심장이 뽑히고 팔다리가 열두 번이나 잘렸다네. 모든 초월자 중에서도 손꼽히는 재생력을 자랑하는 트롤왕이 아니었다면 버틸 수가 없었을 거야.”
그들이 허무의 마왕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나마 후퇴라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비록 녹색 만신전의 삼분지 일이 무너졌지만, 허무의 마왕을 붙잡았던 타르칸과 트롤왕이 살아 돌아왔으니 최악은 아니라며 쓰게 웃었다.
“녹색 만신전은 대지의 심장까지 후퇴하기로 했어. 대스승께서 마침내 결심하시고 합류하셨으니까. 현재 남아 있는 대주술사 전원이 힘을 합쳐 방어막을 만들고 있어. 그게 완성되면 마왕이라 해도 잠깐은 막을 수 있겠지.”
자연의 구도자 테잔도 그에 참여하고 있다 하였다.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이리 분신을 보내긴 했지만 지금도 저쪽에서는 대지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기를 엮어 거대한 주술을 만드느라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것이다.
“완성되기 전에 마왕이 공격하면?”
“그러지 않기를 빌어야지.”
대지의 심장은 동맹의 깊숙한 곳에 있었다. 거기까지 후퇴한다면 예전 전쟁으로 확장했던 영역 거의 전부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았다.
한 뼘의 땅을 얻기 위해 흘린 피가 산을 뒤덮고 강이 되어 흐를 정도인데 실로 허무했다. 무엇을 위해 그리 싸웠는지 알 수 없었다.
피의 복수자들은 어이없게 고향을 되찾았으나, 기쁘지는 않을 거다. 곧 악마가 점령할 테니까.
“마왕끼리 제법 손발이 잘 맞아. 둘 사이를 제대로 갈라놓아야만 할 텐데…….”
예전 계략으로 악마와 악신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결국, 악마가 악신을 믿지 못하고, 악신도 악마를 경계하니 서로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멸의 마왕이 새로운 파트너로 허무의 마왕을 데려오지만 않았다면 아주 훌륭한 결과였을 거다.
“한 타이밍만 빠르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아홉 세계가 완전히 부활하려면 막대한 정기와 시간이 필요했다. 아홉 세계가 옛 힘을 되찾으면 감히 마왕이라 해도 가뿐히 쓰러뜨릴 자신이 있건만,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저에게 조금만 더 예산과 시간을 주신다면……!’
아이반의 귓가에 어느 연구원의 외침이 아련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 예산과 시간. 모든 일의 해결 방안이자 모든 일의 문제점이었다.
“…악신은 지금 이 판에 소외되어 있지. 일단 마왕이 넘어온 순간 악마에게 악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 그들을 끌어들여야겠소. 예전에는 적이었어도, 잘 이용하면 써먹을 수 있겠지.”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델피노가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악신은 제어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정 미친 자들이라 악마들보다 더욱 위험하지요. 개인적인 불쾌감은 접어 두고라도 그들을 이용한다는 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군요.”
“물론 그럴 것이오. 쉽지 않은 일이지. 그러니 이간질에 아주 뛰어난 자가 필요하오.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조차 말 몇 마디로 철천지원수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선동가가.”
아이반이 시선을 돌려 아홉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금 옥좌 흘리드스캴프에 앉아서 후긴과 무닌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아홉 세계는 그대가 필요하오. 그러니 더는 숨지 마시오.”
그러자 부서진 미드가르드의 파편 속에서 누군가 위그드라실의 재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 …내가 나서면 틀림없이 니드호그가 죽일 거요. 니플헤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부활의 때를 기다리고 있을 흐레스벨그도 그러할 테지.
“그건 내가 막아 주겠소. 그들이 당신 목숨을 빼앗지 못하게 보호하지.”
– 진정 그리하시겠소? 아홉 세계의 주인의 이름을 걸고서?
“물론이오. 지금 나는 그대가 필요하오.”
– 이제야 나를 진정으로 알아주는 자가 나타났군!
영겁의 시간 위그드라실을 오르내리며 아홉 세계의 사교법을 익힌 최고의 외교관 라타토스크가 깔깔 웃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 누구든 말만 해 주시오! 가장 친한 친구조차 서로 증오하게 만들 테니!
283화 마왕의 군대
라타토스크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니드호그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위그드라실의 가장 깊은 뿌리에 살면서 평생 만나고 대화했던 존재라고는 라타토스크밖에 없었으나, 그게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라타토스크는 언제나 가장 간교한 혀 놀림으로 니드호그를 도발했고,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흐레스벨그를 원수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