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81
그가 오가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내버려 뒀을 뿐, 라타토스크의 심성이 아주 비틀려 있다는 사실을 니드호그라고 모르지 않았다.
물론 니드호그가 어떻게 반응할 것이라는 건 라타토스크도 잘 알고 있었기에 결코 니드호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 아쉽군. 한 번쯤 씹어 삼키고 싶었는데.
니드호그가 으르렁거리는 동안 라타토스크는 잽싸게 움직였다. 솔직히 아이반도 어떻게 그가 악신과 마왕을 갈라놓을지 알 수 없었으나, 라타토스크가 자신했으니 실패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이제 타이밍이 문제로군. 가능할지 모르겠어.”
여기저기 흩어진 아군의 힘을 모으면 마왕 하나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자존심을 굽히고 허무의 마왕을 부른 것은 홀로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니까.
라타토스크가 성공적으로 악신을 끌어들여서 파멸의 마왕을 견제하면 아주 약간의 여유가 생긴다. 그 틈을 잘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녹색 만신전이 패퇴했다고는 하지만 오크투신을 비롯해 핵심 신격은 멀쩡하오. 대지의 심장에서 대주술사들이 힘을 합쳐 결계를 만들면 마왕조차 쉽게 넘을 수 없는 요새가 될 거요.”
그걸 알고 있다면 허무의 마왕도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결계가 완성되기 전에 한 번은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허무의 마왕을 그리 끌어들여서 기를 꺾어야겠소.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크툴라스가 끼어들지 못하게 막으시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이반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하자 천상의 아홉 신격이 그를 받아들였다.
진정 악신이 방향을 꺾어 마왕을 공격하고, 천상의 아홉 신격이 붙잡는다면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라고 해도 쉽게 뿌리칠 수는 없을 거다.
– 그러나 과연 그대가 허무를 감당할 수 있겠나? 아홉 세계의 강함은 익히 알았으나, 낯선 땅에서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는 없을 텐데.
불의 신 쿤다라가 뜨거운 횃불을 쥐고서 그리 물으니 아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있소. 아홉 세계에 시간을 준 것을 악마는 후회해야만 할 거요.”
지금도 아홉 세계의 전사들의 마계에서 악마를 때려잡으며 차원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씩 정기를 모아 아홉 세계로 보내고, 또 새로운 전사가 부활해 아홉 세계의 영토를 넓혔다.
비록 마왕들은 이 땅에 내려와 있으나, 아홉 세계의 확장을 경계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지닌 대악마와 고대 악마가 몇이나 마계에 남아 있으니 저들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마왕을 온전히 감당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 군세에서 밀릴 것은 없다는 소리다.
어떻게든 마왕을 붙잡고 시간을 끌면 결국 힘의 추는 역전되기 마련이다. 정기와 시간만 있다면 아홉 세계는 반드시 옛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이반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피로 시간을 벌어 주시오. 승리를 위해.”
최대한 치열하게 싸우고, 끈질기게 버텨라. 처절하게 죽어서 한 호흡의 시간이라도 벌어라.
아이반의 요청이 물질계의 모든 군대로 퍼져 나갔다. 성황청의 신성 군대부터 왕국 수호병, 엘프 레인저와 오크 전사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필멸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를 올렸다. 신들은 그 기도를 받아 신성을 가다듬었다.
믿음은 곧 힘이었다. 투철한 신념은 강철 갑옷보다 튼튼했다. 밀려오는 악마의 군대를 향해 오히려 달려들었다.
승리를 위해. 이 모든 고통 너머에 있을 승리를 위해서.
* * *
한때 인간의 땅이었고, 또 오크와 트롤, 오거의 땅이었으며, 이제는 악마의 땅이었다.
살아 있는 자보다 시체가 많았고, 때론 시체가 몸을 일으켜 산 자를 물어뜯기도 했다.
평화롭던 마을은 불탄 지 오래고, 찬란한 초원은 썩은 살점과 삭은 무기로 더러워졌다. 시원한 바람마저 악마의 역겨운 체취가 섞여 기분 나쁘기 그지없었다.
피의 동맹이 급하게 후퇴하느라 버려진 것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처절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너머에 악마가 있습니다. 마왕의 존재감이 저릿하게 느껴지는군요.”
델피노가 그리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이 점차 마계에 물들고 있습니다. 빛이 사라지고 있어요.”
얼마 전에 직접 마계에 다녀온 적이 있었기에 델피노는 알 수 있었다. 이 땅이 점차 마계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푸석푸석한 세계가 되고 있었다.
“마왕이 밟은 땅은 마계가 되는 법이지. 그러니 마왕의 곁에서는 평범한 악마도 마계에서와 똑같은 힘을 발휘할 거요.”
반대로 이 땅의 존재는 약해졌다. 세상이 마계가 되니 본래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녹색 만신전이 형편없이 밀렸다는 것도 사실 그런 이유였다. 그동안 이 세계에서 쌓은 신성이 제약되니 마왕과 싸울 때는 항상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지의 심장에 결계가 완성될 때까지 버텨야만 하오. 당신의 결계로 마왕을 속일 수는 없겠소?”
아이반이 우트가르다 로키에게 물었다. 아홉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마법사이자 환술의 달인이니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거대한 요툰 군주는 저 멀리 허무의 마왕이 있는 곳을 살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이 땅은 아홉 세계가 아니라 나의 마법이 완벽하게 통하지 않소. 다른 이라면 몰라도 마왕을 속이긴 어렵겠지.
세상마다 법칙이 달랐다. 마법은 그 법칙을 이리저리 비틀며 자기 입맛대로 편집하는 기술이었기에 세상이 달라지면 미묘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결계술은 마력과 법칙을 아주 섬세하게 다뤄야만 하는 마법이었다. 보통이라면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마왕쯤 되는 자가 빈틈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쉽군. 마왕은 과연 세월에 무릎 꿇는지 궁금했는데.”
우트가르다 로키는 자신의 궁전 내에서라면 관념을 인격체로 만들어 부하로 부릴 수 있을 정도의 대마법사였다.
생각이나 불에 인격을 부여해 부하로 부리기도 하고, 술잔과 바다를 잇거나 요르문간드를 고양이처럼 보이게 하고, 세월과 씨름 붙이는 등 현실과 관념을 제멋대로 주무르곤 했다.
토르나 로키조차 농락할 정도의 환술을 이 땅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면 마왕을 속이며 버티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아이반이 아쉬워하니 우트가르다 로키가 쯧쯧 혀를 찼다.
– 니드호그를 소환하느라 마력을 많이 쓰지만 않았어도 솜씨를 보였을 텐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니드호그를 소환하는 것은 꼭 필요했으니까.
“대신 니드호그가 활약을 해 주겠지.”
그리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뒤에서 오크투신이 걸어왔다. 그 옆에 커다란 덩치의 트롤이 있었는데, 초면이긴 했으나 그가 바로 트롤왕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무의 마왕에게 제법 고생을 했다고 들었는데, 괜찮소?”
아이반이 물으니 오크투신이 껄껄 웃었다.
“싸움이란 응당 그러한 법이지! 강력한 적과 싸울 수 있음이 그저 기쁠 뿐이다!”
오크투신 타르칸을 비롯해 녹색 만신전의 신격들은 농담이라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행색이 무척 초라했고, 상처를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투쟁심은 여전히 높았으니, 과연 오크투신이 이끄는 녹색 만신전답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무의 마왕과 싸워 보니 어떻소? 그는 어떤 자였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위를 자신하지 마라. 평생 쌓아 온 전사의 기술조차 허무의 마왕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오크투신 타르칸은 몹시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적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노라, 그리하여 항상 허를 찔렸노라 설명했다.
“자세한 것은 싸워 보면 알 것이다. 나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능숙하지 못하니.”
예전 심상 공간에서 싸웠을 때보다 지금 오크투신 타르칸이 더욱 강해 보였다. 거대한 전쟁을 맞이해 강자와 싸우면서 무뎌졌던 전투 감각이 완전히 돌아온 모양이다.
“도끼가 부서졌다고 들었는데, 이거라도 쓰시겠소?”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투박하게 생긴 도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오크투신 타르칸은 아무렇지 않게 그걸 받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날카롭군! 튼튼하기도 하고!”
부웅-
오크투신 타르칸은 도끼를 받아들고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평생 써 온 무기보다 손에 착 달라붙는 것이 틀림없이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이 도끼가 생긴 것은 화려하지 않아도 니다벨리르의 난쟁이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 전에 오크투신 타르칸이 어떤 도끼를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 봐야 니다벨리르의 난쟁이들이 보기엔 돌도끼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불과할 테니 오크투신 타르칸이 감탄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거면 악마의 골통을 부수기가 더 쉽겠어. 손맛이 궁금해 미치겠군.”
오크투신 타르칸은 껄껄 웃으면서 살기를 흩뿌렸다. 그는 광전사의 신이니 치열한 전투야말로 그의 본질이나 다름없었다.
“때려 부술 악마 대가리가 부족하지는 않겠지. 빽빽하게 밀려올 테니까.”
그리 대꾸하면서 아이반은 고개를 돌렸다. 검신 카락취가 팔짱을 낀 채로 검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썩 대단찮은 무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대도 새로운 검이 필요하오? 괜찮은 검이 많은데.”
니다벨리르에서 밤낮없이 무기를 찍어 내니 장비는 넘쳐 났다. 개중에 신기라 불릴 물건도 몇이나 되었다.
검사라면 좋은 검을 탐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카락취는 아이반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이거면 충분하다.”
검신 카락취에게 좋은 검은 필요가 없었다. 가장 나약한 고블린이 가장 위대한 검신이 된 것처럼, 낡고 평범한 검으로도 땅을 가르고 하늘을 벨 수 있었다.
언뜻 미련한 고집처럼 보이지만 아이반은 이해할 수 있었다. 무기란 결국 손에 익숙한 것이 제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원래 쓰던 것이 편하다면 굳이 바꿀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그게 검신의 삶이라면, 검신의 신념이라면 아이반이 지적할 것은 아니었다. 검은 결국 검신이 가장 잘 알 테니까. 그가 필요하지 않다 여긴다면 그걸로 족했다.
우웅-
그때 대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인한 지맥의 힘으로 대주술사가 몇이나 달라붙어 결계를 만들었다. 바닥에서부터 벽돌을 쌓듯 아주 섬세하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이제 대주술이 겉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으니 사흘은 꼬박 계속될 터였다. 다른 말로 사흘을 지켜야만 한다는 뜻이다.
둥!
두둥!
대지의 심장에서 나온 피의 동맹 전사들이 북을 치고 고함을 내질렀다. 전쟁을 알리는 포효로 서로를 축복했다.
피의 동맹 전사 상당수가 빨갛고 파란 염료로 온몸에 그림을 그렸다. 질 수 없는 전쟁에 나서며 승리의 주술을 거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