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84
밝은 스파크가 튀더니 토르의 시체가 사라졌다. 아이반의 육신에 남은 기운을 사용해 토르가 만든 환영이었다.
원치는 않았지만, 예전 토르는 여장을 하고서 여신 프레이야라고 적을 속인 일이 있었다.
물론 덩치가 커다랗고 근육이 우락부락한 토르가 그저 옷을 갈아입었다고 적이 속을 리가 없었고, 로키의 마법 도움을 받았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잔재주를 부린 거다.
– 이런 간단한 함정마저 파악하지 못하다니……!
토르는 한심한 꼴을 보이는 가짜를 노려보다가 묠니르를 집어 던졌다. 공허 토르는 어차피 달라질 것이 없다며 맞받아쳤지만 어째 지금까지와 달리 밀리기 시작했다.
– 어째서? 나는 모든 면에서 너와 똑같다! 아니, 더 우월하다!
공허 토르가 그리 소리치며 천둥을 내뿜으니 아홉 세계의 토르가 비웃음을 날렸다.
– 그런 생각이 잘못된 거다. 토르는 결코 둘이 될 수 없으니.
아득한 세월 요툰과 싸워서 쌓아 올린 힘이었다. 그걸 그냥 복사할 수는 없었다. 그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것이 바로 토르, 아홉 세계 최강의 투신이었다.
화아아-
하늘이 환하게 빛을 뿌렸다. 하늘의 불을 땅에 가져왔으니, 그게 바로 천둥이었다. 세상 가장 파괴적이고 신성한 힘이었다.
토르의 천둥은 삿된 것을 물리치는 힘이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묠니르로 부수고 세상을 환하게 만들었다.
치지직!
쾅!
공허 토르의 몸이 잘게 부서지며 저 너머로 사라졌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로 돌아갔다.
토르는 그렇게 자신을 이기고 빠져나왔지만 다른 이들도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지친 모습으로 정신을 차린 것이 몇 명, 대다수는 아직도 공허에서 기어 나온 자신의 분신과 싸우느라 동공이 풀려 있었다.
– 나의 전장에 삿된 것이 있을 자리는 없다!
쿵!
토르는 양손에 쥔 묠니르를 서로 부딪쳐 번개를 내뿜었다. 짜릿한 번개가 땅을 가르고 아군을 스친 후에 하늘로 솟구쳤다. 삿된 것을 정화하는 힘이 거짓된 형상을 지웠다.
캬아아악!
하늘로 날아오른 니드호그가 종말의 기운을 가득 담아서 용의 숨결을 내뱉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막대한 기운이 마왕의 권능을 억누르고 마계를 갉아먹었다.
마계의 힘이 약해지니 오크투신 타르칸이 더욱 강한 힘을 내뿜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하늘에서 거대한 도끼의 형상이 나타나며 허무의 마왕을 내리찍었다.
탁!
허무의 마왕이 한 손으로 도끼를 붙잡았다. 산을 조각 낼 만큼 거대한 도끼가 마왕의 손끝에서부터 쩍쩍 갈라져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마왕은 니드호그의 숨결까지 공허의 바다로 던져 버리고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숨이 끊어졌던 악마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언데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빠져나간 생명이 돌아온 듯했다.
트롤왕과 사나운 이빨, 델피노가 쓰러뜨렸던 대악마마저 멀쩡히 몸을 일으키자 아군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죽고 죽여도 끝이 없으니 절로 패배가 떠올랐다.
그러나 오크투신 타르칸은 즐거운 듯이 웃었다. 끝없는 전투와 치열한 전장이야말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의 신성이 가장 힘을 발휘하는 곳이었다.
– 죽이고 죽여도 끝나지 않으니 이곳이 바로 낙원이구나!
오크투신 타르칸의 기운이 점차 부풀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광전사의 축복이 전장에 깃들었다.
우웅-
오크 전사들의 덩치가 커졌다. 힘이 세지고, 더욱 날래졌으며, 자잘한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눈이 붉은색으로 변하고 숨이 거칠어졌다. 흥분할수록 더욱 강해졌다.
“위대한 전투를 위해!”
“우리의 아버지를 따르라!”
오크 전사들의 사기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늘로 치솟았다. 이전보다 더욱 거세게 적을 도륙하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날뛰었다.
마왕을 상대로 필멸자들이 이리 용맹하게 싸운다는 것이 놀라웠다. 과연 세상의 끝을 논할 만큼 위대한 전쟁이었다.
토르는 껄껄 웃으면서 묠니르를 쥐었다. 전장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 그의 마음마저 아이처럼 들떴다.
– 훌륭하다, 훌륭하다!
전사란 무릇 이러해야 했다. 절망 속에서 웃으며 싸우고, 고통과 공포를 즐길 줄 알아야 했다.
– 내가 너희에게 영광을 가져다 주겠다!
힘의 허리띠 메긴기요르드가 토르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쇠장갑 야른그레이프로 하얗게 달아오른 묠니르를 쥐고서 하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 천둥이 너희와 함께한다!
치지직
쾅!
땅에서부터 하늘로 번개가 솟구쳤다. 하늘의 빛이 땅에서 솟아나 하늘을 꾸짖고 세상에 소리쳤다.
모든 세계관, 모든 신화에서 번개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신의 상징이었으며, 의지였다. 천둥신 토르가 그리 다짐했으니 삿된 자들을 천벌로 징치했다.
휘이잉-
폭풍이 몰아치고 되살아난 악마들이 다시금 쓰러졌다. 신성한 번개가 놈들의 삿된 영혼마저 태워 버렸다.
대악마마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이레인의 화살에 심장이 꿰뚫렸다. 겨우 빠져나온 저승으로 다시금 사라졌다.
– 오라, 마왕아! 너의 골통을 깨부숴 주마!
쓰러진 대악마의 머리를 발로 짓밟으면서 토르가 소리치자 허무의 마왕이 여유를 지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고오오-
초월자마저 숨이 턱 막힐 만큼 강렬한 살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초목이 말라죽고, 투지가 넘치던 전사들마저 눈을 까뒤집으며 심장이 멈췄다.
세상을 죽이고 다니는 마왕의 살기였다. 가장 강력한 의지를 가진 자조차 영혼채로 말라붙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토르는 온몸을 찌르는 그 따끔따끔한 살기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진정으로 목숨 걸고 싸울 만한 전장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토르와 마왕이 맞부딪혔다.
쾅!
286화 천둥신의 각오
부우웅-
번개를 머금은 토르의 망치가 마왕의 머리를 깨부수기 위해서 떨어졌다. 새하얀 번개가 몰아치고 묠니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마치 허공을 가르듯 마왕의 육신을 통과했다. 반쯤 공허의 바다와 동화된 허무의 마왕은 실존과 비실존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쿵!
토르의 공격을 흘려 낸 허무의 마왕이 손을 뻗어 천둥신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러나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토르가 휘두른 묠니르만큼의 힘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휘두른 망치에 얻어맞은 꼴이 된 토르가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다. 배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겉보기보다 속은 더 좋지 않아서 내장이 완전히 으깨져 반죽이 되었다.
솔직히 그대로 두 동강이 날 뻔했다. 토르가 신성으로 보호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러했을 거다.
토르가 힐끗 상처를 살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 나약하기는…….
비록 신성과 영혼은 토르의 것이지만, 육신은 아이반의 것이었다. 아무리 아이반의 육신이 단련되었다고는 해도 본래의 육신만은 못하니 토르는 영 아쉬웠다.
– 이 정도 충격은 기합 한 번으로 버텨 낼 것이지, 단번에 엉망이 되다니.
물론 그건 너무나 불합리한 말이었다. 아홉 세계의 수많은 전사 중에서 토르의 기준에 적합한 육신이 과연 몇이나 되겠나.
아이반의 태생이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놀랄 정도로 단련된 육체였다. 육신의 한계는 개인의 노력보다 타고난 재능과 핏줄의 영향이 강한 만큼 여기서 더 많은 것을 원해도 의미가 없었다.
인간이 아무리 단련한다고 한들 순수한 육신의 성능으로 거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홉 세계의 모든 요툰과 신 중에서도 손꼽히는 토르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 무리한 것을 바라지 마시오.
아스가르드의 가장 높은 곳, 영광스러운 발할라의 황금 옥좌 흘리드스캴프에 앉아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반이 그리 말하니 토르가 사납게 웃으며 대꾸했다.
– 정말로 그리 생각하나? 이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나?
– 그거면 되었지. 인간이 그만큼 육신을 단련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소?
– 그래서 네가 인간인가? 평범한 인간이었나?
토르가 쯧쯧 혀를 찼다. 아홉 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품은 발드르가 겨우 그런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 너는 너의 육신을 온전히 다루지 못했다.
치지직!
토르의 신성이 빛을 뿜었다. 온몸에서 번개가 뿜어져 나와 상처를 태우고, 육신에 달라붙은 불완전함마저 태웠다.
시스템, 능력치, 스킬 포인트.
아이반에게 깃든 축복은 초월자조차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하고도 초월적인 힘이었다. 그건 멸망을 회피하고자 하는 세상의 의지였고, 아홉 세계의 모든 가능성을 의미하는 옛 발드르의 신성이 닿았기에 가능한 힘이었다.
‘이리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따위로밖에 쓰지 못하다니.’
토르는 아이반의 멍청함을 욕하면서 그 축복으로 육신을 개조했다. 중구난방으로 뻗어 나간 힘을 아홉 세계 최강의 전사가 다듬고 다듬어서 새롭게 육신을 만들었다.
으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