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86
델피노가 가까이 다가와 회복의 빛을 내리쬐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이건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토르를 소환한 대가였다. 그런 식으로 쉽게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괜찮지 않지. 그러나 곧 괜찮아질 거요.”
아이반이 그리 대꾸하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허리를 폈다.
참으로 치열한 전투였다. 그사이 죽어 나간 전사들이 산을 이루고 흐른 피가 강이 되었다. 주변에 가득한 시체를 보면 참담한 심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싸웠는데, 그래도 피해가 심각하군. 초월자들이 날뛰는 판에 필멸자가 쉽게 버틸 수는 없었겠지.”
아이반이 그리 중얼거리니 오크투신이 타르칸이 걸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사들은 제 역할을 했다. 용맹하게 싸웠고, 마왕을 막아 냈으니 모두 훌륭했다.”
오크투신 타르칸은 생명이 끊어지고 육신을 빠져나온 전사들의 영혼을 녹색 만신전으로 인도했다. 살아서 용맹하게 싸운 위대한 전사들에게 영광의 문을 열어 주었다.
용맹한 그린스킨의 전사들은 죽어서 녹색 만신전으로 올라가 위대한 선조들과 지내다가 때가 되면 훌륭한 전사의 아이로 다시 태어나곤 했다.
그게 바로 피의 동맹이 믿는 위대한 영혼의 순환이었다. 지금 당장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그저 과정일 뿐이니 기꺼이 광전사가 되어 날뛸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전사의 영혼이 녹색 만신전으로 향하는 것을 본 발키리들은 아쉬워했다. 저들 중 몇몇은 발할라로 데려올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차마 오크투신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 그럴 수는 없었다.
아홉 세계가 부활하고 헬헤임에 있는 수많은 자가 다시 생명을 얻고 있는 대격변의 와중에도 발할라를 완전히 채우기엔 에인헤랴르가 여전히 부족했다.
새로 아홉 세계의 주인이 된 아이반은 오딘과 성향이 달라서 발키리에게 에인헤랴르를 적극적으로 모집하라 요구하지 않았지만, 아득한 세월 몸에 새겨진 영업직의 본능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반은 마치 찬란한 별빛 같은 영혼의 흐름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대지의 심장이 열리고 대주술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몹시 지쳐 보였다. 마왕을 막아 낼 수 있는 결계를 만든다는 것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대주술사들은 지금 반쯤 탈진해서 한 줌의 기운도 없을 거다.
“마왕을 막아 내었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머리카락은 식물의 잎과 뿌리였다. 눈동자와 손발톱은 보석이었으며, 피부는 흙이었고, 뼈는 돌이었다. 심장은 피 대신 마그마를 뿜었으며, 땀 대신 순수한 물이 흐르고, 들이켜고 내뱉는 숨결은 따스한 봄의 훈풍과 시린 겨울의 폭풍이 깃들었다.
마치 대자연이 뭉쳐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한 대스승 크뮨이 느릿하게 걸어왔다.
그는 세상 모든 주술사의 대스승이었다. 이 땅에서 최초로 주술을 깨닫고, 그것을 퍼트렸던 자연의 화신이었다.
각성의 순간 수많은 미래를 엿보았고, 그 모든 미래가 파멸로 이어져 있음을 알았기에 오랜 세월 고뇌하고 고뇌하던 자였다.
아득한 세월 수많은 미래를 살피면서 세상의 종말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 땅의 파멸을 막을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종말 너머의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침묵하고 있었으나, 얼마 전에야 겨우 마음이 바뀌었다.
마왕이 둘이나 강림하는 것은 그가 엿본 그 어느 끔찍한 미래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최악보다 더욱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가 보았던 미래와 너무나도 달랐기에 오히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도저히 바꿀 수 없다고 여겼던 운명의 큰 줄기조차 바뀔 수 있음을 알았다.
시작은 한 사내였다. 모든 운명의 바깥에서 온 특이점. 그러나 일개 인간에 불과했던 자가 이리도 커져서 세상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대스승 크뮨이 아이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세상이 그대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아이반은 그 말 너머에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피식 웃었다.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소. 상황은 더 위험하지.”
“모든 것이 바뀌었지요. 저는 이 모든 것이 희망을 향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 가장 비관적이던 자답지 않게 대스승 크뮨은 몹시 희망적이었다. 마왕 둘이 건재한데 그는 이미 그들을 물리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갑자기 바뀐 태도가 아이반은 어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확신이 있으니 크뮨처럼 신중한 자가 침묵을 깨고 나선 거겠지.
“일단 허무의 마왕을 막고 결계를 완성했소. 어둠의 군세에 대항할 가장 튼튼하고 강력한 요새가 세워진 셈이지.”
그러나 방어만을 위한 것이라면 달라질 것이 없었다. 이 아래 쪽은 모두 허무의 영역이 되었고, 지금도 빠르게 마계로 바뀌고 있었다. 세상이 오염되니 이 땅의 존재는 점차 약해지고, 사악한 자들은 점차 강해질 게 분명했다.
좋지 않았다. 하지만 대스승 크뮨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시간을 벌어서 강해지는 것이 적만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피로 시간을 벌어 달라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자가 그리하고 있지요. 그게 의미 없는 희생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이오. 피의 무게만큼 확실한 성과를 보여 주겠소. 오직 승리의 영광만이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 테니.”
아이반은 저 멀리 들판에 누워 쉬고 있는 니드호그를 보았다. 그가 삼킨 수많은 시체와 영혼을 보았고, 사악한 마력과 정기를 보았다.
위그드라실의 뿌리에서 다시 태어난 니드호그는 여전히 종말의 용이었으나, 그 종말은 아홉 세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니드호그가 삼킨 모든 것은 위그드라실의 가장 깊은 뿌리로 향하고, 거름이 되어서 아홉 세계를 살찌우고 있었다.
허무의 마왕과 싸우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으나, 그런 위험을 감수한 만큼 얻은 것도 무척이나 많았다. 초월자의 시체와 영혼, 신성과 정기를 이처럼 많이 챙겼으니 수많은 전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부서지고 무너졌던 아홉 세계가 어느 정도 제 모습을 되찾았으니 이제 소비되는 정기보다 생산되는 정기가 많았다.
외부의 공급으로만 겨우 유지하던 것을 벗어나, 자체적인 정기만으로 아홉 세계가 자라나고 있으니 손익 분기점을 넘긴 셈이었다.
그래서 아이반은 토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홉 세계가 진정으로 부활했음을 알리는데 그보다 제격인 자가 없었으니까.
토르는 정기 효율이 아주 좋지 않았으나, 이제 아홉 세계는 그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
“마왕은 우리의 역량을 확인했다 여기겠지만, 우리 또한 마왕의 힘을 확인했소. 그리고 확신했소.”
마왕이 그 어떤 힘을 숨기고 있더라도 이길 수 있다. 마왕이 강하다고 해도 아홉 세계의 진정한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동안은 정기가 부족해 모든 힘을 발휘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다를 거다. 전쟁이 중반을 넘어섰고, 후반은 아군의 차례였다.
“저들이 짧은 승리를 즐기도록 하시오. 놈들의 끝이 머지않았으니까.”
* * *
허무의 마왕이 대륙의 동쪽 깊숙한 곳까지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때 인간의 땅이었던 곳은 그린스킨의 땅이 되었고, 이제는 악마의 땅이 되었다.
자신의 고향을 짓밟은 그린스킨을 향해 복수를 선언한 피의 복수자들은 그린스킨이 형편없이 밀려나는 것을 보며 환호했다. 그들의 복수를 악마가 대신하고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피의 복수자들에게 그린스킨은 악마보다 더한 놈이었다. 그들이 세상의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해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린스킨을 멸망시키기 위해 악마의 손이라도 붙잡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복수심이며,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 대의명분 따위는 의미 없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소. 그래서는 안 되오. 우리의 명예는 아무 의미가 없었으나, 죽은 옛 동료와 가족들의 명예마저 더럽힐 수는 없으니까.”
개새끼, 병신, 쓰레기, 복수에 미친 괴물.
그는 온갖 욕설을 들어도 괜찮았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니 욕을 듣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어차피 그깟 말 몇 마디로 불타는 복수심을 잠재울 수 없었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옛 동료와 가족들은 명예로워야만 했다. 자신은 욕먹을지언정 옛 동료와 가족을 욕되게 할 수는 없었다.
“증오스러운 오크 놈들을 찢어 죽이는 것은 웃으면서 할 수 있소. 그러나 악마와 손을 잡을 수는 없소. 우리의 고향을 악마가 짓밟아서는 안 되오.”
그리하면 옛 동료와 가족들의 명예가 진흙탕으로 처박힌다. 그들의 이름에 악마 같은 더러운 것이 묻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라스 백작은, 한때 피의 복수자들을 이끌던 남자는 악마와 싸웠다고 했다. 악마가 점령한 땅에서 옛 친구와 가족들이 언데드가 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고생했군. 편히 쉬게.”
라인하르츠 공작이 그리 말하자 피를 토하며 말을 내뱉던 라스 백작이 정신을 잃었다.
제법 상처가 깊었다.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약도 사제도 부족하여 그가 과연 다시 눈을 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은 기절한 라스 백작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예전에는 며칠 밤을 계속 싸워도 힘이 남아돌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쉴 때 쉬지 못하면 다시 싸울 수가 없었다.
‘나도 참 늙었군.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초월자에 반쯤 발을 걸치고 있었으나, 그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필멸자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죽음이 코앞에서 어른거렸다.
따지고 보면 평범한 인간의 세 배는 족히 살았다. 그런 늙은 몸으로도 멀쩡히 창을 휘두르고 있으니 복된 삶이라 해도 좋았다.
평생 초월자가 되기를 소원했고, 마지막까지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삶의 끝자락에 서니 그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초월자의 경지를 포기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덤덤했다. 평생을 짊어지고 살았던 그것이 어찌나 무거웠는지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저 평범히 늙어 죽지 않음을 감사했다. 이 지독한 전장에서 여전히 싸울 수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공작님! 포션을 가져왔습니다!”
저 멀리서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모든 것이 부족한 이 전장에서 참으로 귀하고 귀한 것이었다.
‘다 떨어진 줄 알았는데, 운이 좋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라인하르츠 공작이 말했다.
“이 친구에게 먹여라.”
“예?”
“신념이 있는 자는 쉽게 죽지 않는 법이지.”
남부 제국 마리난은 완전히 무너졌다. 피난민을 북쪽으로 이끌긴 했으나 그래 봐야 찬란하던 제국 인구의 일부에 불과했다.
영토는 모두 악마의 손아귀로 넘어갔고, 황실의 핏줄은 끊어졌다. 이름난 귀족 중에서도 살아남은 자는 거의 없었다.
제국이 둘로 갈라져서 내전을 일으키고, 황제를 자칭하는 자들이 모두 악마와 손을 잡았다가 무너졌으니 찬란한 역사가 무색하게도 치욕적인 끝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무하지만은 않았다. 라인하르츠 공작은 제국이 마지막까지 제국다울 수 있도록 노력했다. 끝없이 밀려오는 악마를 상대로 이만큼 버텼으니 아주 한심하지만은 않았다.
제국을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누군가 새로운 신념을 품은 자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제국이 최후의 순간에는 하나가 되어 악마와 싸웠다는 것을 그들만은 알아줄 터였다.
땡땡땡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