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87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퍼졌다. 다시 악마가 밀려오고 있다는 뜻이다.
라인하르츠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로가 다 사라지지 않아서 손끝이 잘게 떨리고 뒷목이 뻣뻣했지만, 창을 들어 올렸다.
항상 깃털보다 가볍던 창이 지금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평생 창이 이리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그리 싸울 자세를 잡던 라인하르츠 공작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느껴지는 기운이 악마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성벽 위로 올라가니 저 멀리서 흙먼지를 넘어 새로운 자들이 나타났다. 발걸음과 손끝마저 완벽히 일치하여 마치 한 몸처럼 느껴지는 군대였다.
“악마는 아닌 것 같은데, 저들은 대체 누구지?”
기사 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으나 워낙 멀리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원래라면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시야를 당겨서 보여 주었겠지만 다들 뻗어 있는 상태였다.
새로운 적인가 싶어서 다들 긴장하고 있을 때 라인하르츠 공작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요정 군단이었다. 그 뒤로 드워프와 수인, 나가와 리자드맨, 라이칸스로프와 노르드 전사들이 보였다.
“지원군이야. 반격의 시간이 찾아왔군.”
288화 삶의 끝에서
지원군은 그냥 오지 않았다. 요정의 숲의 비옥함으로 생산한 식량으로 굶주린 병사의 배를 채우고, 나가의 섬세한 손놀림으로 만든 약으로 환자를 치료했다.
계속된 전투로 창칼이 부러지고, 변변찮은 방패조차 하나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이들에게 드워프가 만든 장비가 전해졌다.
밤낮없이 싸우느라 병사는 모두 지쳐 있었다. 초인인 라인하르츠 공작조차 몸이 무겁다 느낄 정도니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나.
새로 온 자들이 경계를 대신하니 기존 병사들에게 꿀 같은 휴식이 주어졌다. 모두 기절하듯 잠들어서 다음 날 아침 늦게 일어났다.
충분한 식사, 적절한 치료, 적당한 휴식.
아직도 악마는 저 너머에 가득했으나, 그것만으로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모두 마지막을 준비하던 절망적인 표정에서 벗어나 웃음이 피어났다.
한때 남부 제국 마리난은 인간이 가장 우월하다 여겼고, 드워프나 엘프를 제외한 다른 종족은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런 것도 없었다.
식량을 주고 치료도 해 주며, 심지어 경계 근무마저 대신 서 주는데 그깟 종족의 차이가 뭔 소용인가.
“그대들의 도움은 참으로 적절했소. 고맙구려.”
라인하르츠 공작이 그리 말하자 요정 군단의 지휘관, 필레인 그레이우드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적과 싸우고 있으니.”
짐짓 차갑고 퉁명스럽게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인하르츠 공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엘프는 원래 세계수 네트워크로 종족 모두가 이어져 있기에 개인의 감정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일이 드물었다. 극도로 이성적인 자들이니 말뜻을 이리저리 곡해할 필요가 없었다.
“동쪽도 완전히 악마의 땅이 되었다지. 그린스킨이 한참이나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렇다면 다른 곳은 어떠하오?”
계속 악마와 싸우다 보니 다른 지역의 소식은 잘 알지 못했다. 이런저런 곳에서 흘러 들어온 병사들을 규합하다 보면 온갖 소식을 듣기도 하지만, 그들이 아는 정보 역시 너무나 지엽적인 수준이라 전체적인 현황을 살피는 것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너무 정보가 없어서, 때로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당장 밀려오는 악마와 싸우다 보면 정보를 확인할 시간도 없었고.
마법 통신이 끊어진 것이 벌써 며칠이었다. 지금 상황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동쪽에서는 허무의 마왕이 깊숙하게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대지의 심장을 경계로 마왕을 막아 내었지요. 지상에 강림한 녹색 만신전과 요정의 수호자, 아홉 세계의 주인, 용전사, 빛의 대리인, 세계에 남아 있는 모든 대주술사가 힘을 합쳤습니다.”
필레인 그레이우드는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해 주었다. 이레인 팔라시온, 엘프의 새로운 종족신이 그곳에 있었기에 모든 정보가 아주 정확했다.
“서쪽은 악신이 움직였습니다. 그들이 파멸의 마왕을 습격했죠.”
“···악신들이 마왕을 공격했단 말이오? 정말로?”
“그렇습니다.”
솔직히 필레인도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이반이 아홉 세계에서 어떤 초월적인 존재를 불러왔고, 그가 악신들을 부추겨 파멸의 마왕을 습격하도록 이끌었다는 것만 들었을 뿐이다.
물론 원래부터 악신과 악마는 목적이 다른 자들이었다. 단순히 과정이 겹치기에 손을 잡았을 뿐이다. 거기에 계획과 달리 마왕이 둘이나 강림했으니 세력이 너무 밀린다는 생각에 악신들이 초조해졌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리 쉽게 이간계에 성공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홉 세계에는 대체 어떤 괴물들이 산다는 말인가.
“파멸의 마왕을 쓰러뜨리는 것은 실패했습니다. 악신들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파멸의 마왕은 멀쩡하다더군요. 그러나 마왕을 묶어 둘 수는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작을 부려서 악신과 악마의 사이를 벌리긴 했지만 설마 악신이 방향을 틀어 공격할 줄은 몰랐으리라.
파멸의 마왕은 악신을 모두 찢어 버리고 진격을 계속할 수도 있었으나,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 뒤에는 천상과 드래곤들이 튼튼한 장벽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파멸의 마왕은 자신이 질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들마저 뚫어 내려면 제법 힘을 쏟아야만 했다.
허무의 마왕이 파멸의 마왕을 경계하는 만큼,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도 허무의 마왕을 경계하니 무리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악마는 조금씩 세상을 잡아먹고 있었다. 대륙 남부는 파멸의 영역이 되었고, 동부는 허무의 영역이었다.
땅덩어리만 보자면 이미 절반 가까이 장악한 셈이니 굳이 급하게 몰아칠 이유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땅의 존재는 약해지고 악마는 강해질 테니까.
마왕들이 이 땅에 나타난 뒤로 세상의 법칙이 흔들렸다. 지진, 해일, 화산 폭발과 폭풍, 가뭄과 장마가 제멋대로 몰아쳤다.
세상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천상의 아홉 신격이 지상에 강림하여 악마와 싸우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악마의 역겨운 이빨이나 날카로운 발톱, 녹슨 창칼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점차 죽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자가 굶주렸고, 재해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있었다.
아이반은 피로 시간을 벌어 달라고 했으나, 그렇게 시간을 끄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점점 더 불리해지는 것이 아닌가?
라인하르츠 공작은 아이반을 믿었으나, 아이반을 잘 모르는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대로 버티고 버티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말라죽느니, 차라리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시원하게 한판 붙어 보고 명예롭게 끝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을 벌어서 이길 수 있는가? 나는 나의 병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마지막 시간을 가족과 보내라는 명령 대신에 마지막까지 싸우고 싸워서 처절하고 치열하게 죽으라고 명령할 이유가 있는가?’
아마 모든 지휘관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갔을 거다. 지금 있는 자리를 반드시 사수하라는 명령이 모든 전선에 전해진 것이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건만, 그 짧은 세월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모든 이가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 명령을 따랐으나,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의지를 시험하는 지독한 날들이었다.
“···그래도 지연작전은 제법 성공적이었군. 다행이야.”
“당신들의 분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다른 지역의 소식이 끊어져서 걱정했었다. 혹시 다른 곳이 이미 뚫려서 포위당한 상태가 아닐까, 사실 모든 것이 끝났는데 우리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불안감 속에서 병사들은 버티고 또 버텼다. 피와 죽음으로 벽을 세우고, 악마와 싸우고 또 싸웠다.
그렇게 작전은 성공했고, 마왕들의 진격을 멈춰 세웠다. 아주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었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정 군단의 지휘관, 필레인 그레이우드는 대단한 일이었노라 말했다. 의미가 있었다고 단언했다.
허언을 하지 않는 엘프가 그리 말했다. 이 또한 과장 하나 없는 진실이겠지.
라인하르츠 공작은 옅게 웃었다. 젊은 시절 너무나 냉혹해서 철혈이라 불리던 자답지 않게 참으로 사람 냄새가 나는 미소였다.
세월이 그를 그리 만들었다. 삶의 끝에서야 얻은 깨달음이 그를 사람으로 만들었다.
비록 초월자가 되지 못했지만, 그게 그리 나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였다.
“그리 말해 주어서 고맙소.”
그때 라이칸스로프의 족장 볼타르가 주변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그의 몸은 온통 피로 젖어 있었으나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악마의 피였고, 설령 지독한 상처를 입었다고 할지라도 뛰어난 재생력으로 모두 회복했을 거다.
“악마 정찰대 하나를 처리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조만간 악마들이 몰려오겠지. 아마 예전보다 더욱 많은 수가 더 격렬하게.”
볼타르의 말에 라인하르츠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래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 하룻밤 편하게 잔 것만 해도 충분해. 이곳에서 열심히 싸우는 만큼 다른 전선이 편할 테니 오히려 다행이야.”
그로부터 채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종소리와 긴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벽 위의 병사들과 노르드 전사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적이 다가옴을 알리는 것이다.
평소에도 바글바글한 악마들이 지금은 더욱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하늘에도 비행 악마가 가득했다.
비틀린 짐승 모습의 마수, 움직이는 시체, 악령, 어둠을 뒤집어쓴 부정형의 악마들.
그 너머로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고대 악마, 어쩌면 대악마. 하여튼 초월자가 분명했다.
‘이곳에 있는 전력을 생각하면 그런 놈이 한둘 정도 나타나도 이상하지는 않지.’
그러나 라인하르츠 공작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하나둘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넷, 다섯, 어쩌면 그보다 더.
한동안 조심스럽게 행동하던 악마들이 화끈하게 움직였다. 이만한 전력을 단번에 밀어내면 앞으로가 한결 수월할 테니 제법 투자한 모양이다.
‘아주 치열한 전투가 되겠어.’
어쩌면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그런 생각이 얼핏 스쳤지만 라인하르츠 공작은 코웃음 하나로 털어 버렸다. 두려움보다 투쟁심이 더 크게 솟구쳤기 때문이다.
창을 쥐고서 강한 적을 앞두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늙은 육신에 뜨거운 피가 돌았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전사였다. 제국 최강의 기사란 명칭을 일백 년 가까이 유지한 자가 싸움을 앞두고 그저 허허롭게 웃을 리가 없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을 힐끗 살핀 브릭타가 싱긋 웃었다. 한때 드워프의 세 왕국 중 하나인 강철 모루의 왕자였고, 이제는 하나가 된 드워프를 이끄는 영웅이 바로 그였다.
위대한 자, 앙그소두린의 뜻을 이어받은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어깨에 걸친 채 라인하르츠 공작의 등을 두드렸다.
“어서 외치시게! 이곳은 당신의 성이 아닌가!”
라인하르츠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쳤다. 전투를 선언했다.
“오늘도 악마는 우리의 성을 넘지 못한다! 준비된 자들부터 마음껏 적을 쓰러뜨려라!”
그러자 성벽 위에 자리 잡은 드워프들이 껄껄 웃으면서 조준을 시작했다. 드워프의 기술로 다듬어진 대포가 불을 뿜었다. 큼지막한 포탄이 악마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