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88
하급 악마들은 그대로 몸이 짓눌리고 터져서 사라졌다. 제법 강한 힘을 가진 악마는 날아오는 포탄을 튕겨 내는 신기를 보였으나, 뒤이어 쏟아지는 마력포는 그런 식으로 막지 못했다.
쾅!
비싼 마나석으로 파괴적인 마력탄을 날렸다. 돈을 갈아 땅바닥에 버리는 행위였으나, 효과는 굉장했다. 악마의 강력한 마력저항이 마력 구조를 억눌러 마법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순수한 마력의 폭발은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우웅!
요정 군단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순간적으로 정령의 기운이 퍼지니 마치 정령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푸슉!
상대가 점처럼 보이는 먼 거리에서도 엘프 궁수의 화살은 빗나가지 않았다. 높은 하늘에서 급강하하면서 성벽을 노리려던 비행 악마들은 전신에 화살에 꿰뚫려 추락했다.
아- 아아-
나가여왕 시르오네를 시작으로 나가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세이렌과 몹시 비슷한 힘을 지녔기에 노랫소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악마들마저 매혹될 정도였다.
나가는 모두가 한때 뱀신을 품었던 신의 화신이었기에 영적인 능력이 대단한 주술사였다. 그들이 노랫소리는 세상을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술법이었다.
아군의 기력이 샘솟고, 상처가 회복되었으며, 용기가 차오르고, 적의 마법과 저주를 막아 냈다.
특히 리자드맨이 나가의 축복을 가장 강렬하게 받아들였다. 나가의 주술은 뱀신의 신성력을 바탕으로 했으니 뱀신을 믿는 자들에게 가장 효과가 좋은 게 당연했다.
쉭- 쉬이익-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저 섬뜩한 리자드맨의 언어가 흘러나왔다.
뱀신과 용전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기도문이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먹잇감을 앞두고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악마를 찔러 죽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들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렇게 성벽 앞에 시체가 쌓일수록 그걸 밟고서 달려드는 놈들이 점차 많아졌으나, 요정 군단과 드워프 중보병, 나가 주술사와 리자드맨, 라인칸스로프와 노르드 전사의 조합은 제법 단단해서 그 모두를 어렵지 않게 막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지켜보고 있던 놈들이 움직였다. 악마의 초월자,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고대의 악마들.
비단 높은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살 만큼 산 자라면 누구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끝이 어디쯤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은 그때가 지금임을 알았다.
‘내 삶의 마지막 전장과 마지막 상대로 부족함은 없겠군.’
창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 신수의 피가 섞인 애마를 타고 성벽을 뛰어내렸다.
제국 최강의 기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289화 하나의 전사
창을 휘둘러 악마의 육신을 찢었다. 시뻘건 피가 바닥을 적시고, 길을 만들었다. 인생 최후의 싸움을 위해 스스로 레드 카펫을 깔면서 라인하르츠 공작이 그리 나아갔다.
히이잉!
라인하르츠 공작의 애마는 신수의 피가 섞인 특별한 말이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바람을 따라잡을 만큼 빨랐고, 험한 돌산조차 단번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강인했다. 쏟아지는 화살과 창칼을 스스로 피하며 앞발과 뒷발로 적을 후려칠 만큼 용맹하고 똑똑했다.
물론 라인하르츠 공작의 기마술이 어디서 밀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그가 그동안 더 편하게 싸운 것은 애마가 도왔기 때문이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통했다. 가장 가까이서 함께 싸우는 동료였다. 인마 일체로 느끼는 동질감은 그 어느 전우보다도 짙었다.
히이잉!
공작은 여기가 자신이 죽을 자리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나 애마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슬픈 울음을 내지르면서도 용맹하게 달렸다.
쾅!
말을 탄 기사의 돌격은 무척이나 빠르고 강력했다. 단기 돌격임에도 신기의 영역에 도달한 기술로 앞을 가로막은 악마를 호쾌하게 베어 넘겼다.
그러던 어느 순간 창에 걸리는 악마의 수가 줄었다. 마치 그가 어디로 가는 줄 알고 있다는 듯 비웃으며 길을 열어 주는 것만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악마들이 모두 사라졌으나 라인하르츠 공작은 오히려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자잘한 악마 수십, 수백이 덤벼드는 것보다 저 거대하고 강인한 녀석의 시선이 훨씬 위험하게 느껴졌다.
강렬한 존재감이 사정없이 내리누르니 온몸이 저릿했다. 그의 애마도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근육의 움직임이 둔탁했다.
그러나 그의 애마는 그 두려움을 이겨 내고 달렸다. 마지막 임무를 위해 나아갔다.
차르륵!
고대 악마가 채찍을 휘둘렀다. 녀석이 그동안 죽인 적의 살가죽을 벗겨서 뼛조각과 함께 엮어 만든 불길하고도 강력한 무기였다.
공간을 찢으면서 채찍이 날아왔다. 라인하르츠 공작은 창을 휘둘러 그걸 막아 내다가 이를 악물었다.
지나치게 빠르고 무거웠다. 채찍에 깃든 원념과 저주가 너무나 짙었다.
으드득!
미처 흘리지 못한 충격이 애마까지 타고 들어갔다. 거칠게 몰아치는 마력에 살갗이 찢어지고, 끔찍한 저주가 신수의 피를 이은 녀석의 육신을 파괴했다.
틀림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애마는 그걸 참고서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라인하르츠 공작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데려다 주었다.
쾅!
고대 악마가 재차 채찍을 휘두르자 라인하르츠 공작은 애마의 등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뒤에서 굉음이 들리고 뜨거운 핏물이 쏟아졌다. 그 피의 무게만큼 힘을 담아서 창을 내질렀다.
쉬이익!
쿵!
라인하르츠 공작의 창이 고대 악마의 어깨를 꿰뚫었다. 끔찍할 정도로 질기고 두꺼운 가죽을 찢고, 녀석의 어깨를 날려 버렸다.
첫수에 팔 하나. 오랜 동료의 목숨으로 이룬 성과였다.
휘리릭!
고대 악마는 팔 하나를 잃었지만, 그걸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채찍을 휘둘렀다. 소리의 속도를 가볍게 넘어서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사이 검붉은 것이 꿈틀거리며 잘려 나간 고대 악마의 팔에서 솟아났다. 뛰어난 재생력으로 팔을 재생하려는 모양이다.
그걸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 라인하르츠 공작이 위험을 감수하며 밀고 들어갔다. 폭풍 같은 채찍질의 틈새로 창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상대는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고대 악마였다. 격을 얻은 악마의 초월자였다. 의외의 일격을 당했다고 한들 라인하르츠 공작보다 강한 것만은 분명했다.
차르륵!
“컥!”
창이 고대 악마의 육신에 닿는 것과 동시에 채찍이 라인하르츠 공작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마력을 내뿜어 방어했음에도 고대 악마의 채찍은 그걸 가볍게 깨부수고 들어왔다. 몸이 잘려 나가지는 않았으나, 한 방에 살갗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다. 라인하르츠 공작이 한참이나 바닥을 구르고 구르다 피를 토했다.
–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그게 훌륭한 셈법이라 여겼나?
고대 악마가 어리석은 기사를 비웃으며 다가왔다. 팔은 잘려 나갔고 가슴에도 긴 자상이 생겼으나 악마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격을 이루지 못한 자의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이깟 육신의 상처는 쉽게 회복할 수 있으니 오히려 그걸 미끼로 끌어들였을 뿐이다.
스스슥-
고대 악마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의 공격은 고대 악마를 조금도 위협하지 못했다.
그리 여기도록 만들었으니 지금껏 했던 공격이 의미 없지 않았다.
푸슉!
고대 악마의 심장이 꿰뚫렸다. 창을 휘두르는 행동조차 본 적이 없으나 어느새 창이 몸에서 자라나듯 고대 악마의 육신에 나타났다.
위대한 초월의 한 자락이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이 평생을 노력해서 겨우 엿본 위대한 힘이었다.
그를 완성하기에는 시간도 재능도 부족하여 반쪽짜리밖에는 되지 않았으나, 고대 악마의 거짓된 육신을 넘어 녀석의 영혼에 닿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 으으음!
고대 악마의 육신이 흩어지다가 다시 재구성되었다. 피를 한껏 쏟아 내고 또 마력이 흔들렸다. 심장을 꿰뚫은 상처마저 단번에 회복했으나, 영혼의 상처만큼은 단번에 지울 수가 없었다.
– 그래, 하찮은 녀석이 한 수는 가지고 있었군.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고대 악마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라인하르츠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심하던 마음을 지우고 전력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휘이잉!
공간을 찢고 나타난 채찍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그저 흔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동시에 덮쳤다.
라인하르츠 공작은 이를 악물고 창을 들었다. 자신이 그동안 쌓은 실력을 모두 쏟으며 그를 막아 냈다.
팅!
티딩!
그러나 창이 끝에서부터 잘려 나갔다. 몰아치는 채찍을 막고 튕길 때마다 창이 조금씩 부서져 길이가 짧아졌다.
결국, 채찍이 멈췄을 때는 라인하르츠 공작도 팔 하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어깻죽지에서부터 뚝 잘려 나가 바닥을 굴렀다.
스스슥-
팔이 잘린 상처로 사악한 마력이 스며들었다. 지독한 저주가 파고들어 라인하르츠 공작의 기운을 뒤흔들었다.
온갖 환영이 보였다. 원한 가득한 환상과 실제로 있을 리 없는 끔찍한 통증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그 속에서 라인하르츠 공작은 옛날의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은 흐릿한 기억이었다. 처음 창을 잡았을 때의 추억.
사실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나, 라인하르츠 공작이 처음부터 창을 쥐고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