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89
놀랍게도 어린 시절의 라인하르츠 공작은 날붙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는 것도 싫어했다.
그는 겁이 많았다. 창칼의 서늘함이 두려웠다. 그가 검 대신 창을 주무기로 고른 것은 그나마 상대와 멀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뿐이었다.
어린 시절 그가 부러워하던 동료와 선배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제대로 꽃피기도 전에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가장 겁이 많던 녀석이 세월이 흘러 제국 최강의 기사가 되었고, 평범한 인간의 세 배는 족히 되는 삶을 살았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탁!
라인하르츠 공작의 눈빛이 돌아왔다. 아득한 옛 기억이 스치고 지나가니 정신이 맑아졌다. 그를 괴롭히는 고통과 환상이 진해질수록 오히려 그의 정신은 선명했고, 영혼은 단단해졌다.
스걱!
고대 악마의 채찍에 남은 팔 하나마저 잘렸다. 그러나 라인하르츠 공작의 창 역시 녀석의 팔을 끊어 냈다.
인간인 라인하르츠 공작은 지금 당장 팔을 회복할 수 없고, 고대 악마는 재생할 수 있으니 손해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투의 흐름은 그렇지 않았다.
라인하르츠 공작은 두 손을 모두 잃었으나 그의 창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자유로웠다.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오로지 의지 하나로 창을 쥐고 있으니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창조차 그의 마음으로 만든 것이었다. 평생 한 몸처럼 여기고 살아온 창을 의지만으로 구현했다.
창이 바로 그의 의지였으니, 라인하르츠 공작의 의지가 부러지지 않는다면 창은 부러지지 않았다.
쾅!
부딪칠 때마다 라인하르츠 공작의 육신은 엉망이 되었으나, 창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어찌 보면 그의 영혼과 정신이 점차 성숙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겨우 한 발만 걸치고 있던 초월자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건 안 되겠군.’
부족했다. 몹시 부족했다. 초월자란 오로지 정신과 영혼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육신과 기운 역시 중요한 요소였다.
기운이 쇠약하고 육신이 죽어 가니 끝내 초월자가 될 수는 없으리라.
그걸 깨달은 라인하르츠 공작이 못내 아쉬운 마음을 삼켰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모든 미련을 버렸다고 여겼으나 아쉬움이 남았던 모양이다. 그깟 초월자가 뭐라고, 그깟 것이 다 뭐라고.
우웅-
라인하르츠 공작의 창이 더욱 거세게 움직여 악마를 공격했다. 어쩌면 초월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남자가 영혼마저 불태우며 몰아붙이니 고대 악마가 오히려 밀려났다.
고대 악마는 한낱 인간을 쓰러뜨리기 위해 영혼을 불태울 수 없었다. 설령 패하여 목숨을 잃는다 하여도 언젠가 부활할 불멸자가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 차이가 싸움의 결과를 뒤집었다. 둘의 각오가 달랐고, 태도가 달랐다. 초월자는 진정으로 초월자다운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한없이 초월자에 가까웠던 인간은 인간으로서 싸우다 죽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초월자를 쓰러뜨리는 위업을 달성했다.
퉁-
소리는 가벼웠다. 그러나 그 작은 소리와 함께 고대 악마의 육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악마의 강대한 영혼이 마계로 돌아가고, 길 잃은 기운만 거칠게 흘러나왔다.
그 장면을 라인하르츠 공작은 보지 못했다. 이미 생명이 한계에 닿아 오감이 맛이 갔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비릿한 냄새도 사라지고, 육신의 고통과 입안 가득한 피의 맛도 흐려졌다. 청력만 어렴풋이 남아서 주변 상황이 들렸다.
요정 군단의 지휘관과 드워프의 영웅, 나가 여왕과 라이칸스로프 족장, 노르드의 대전사가 고대 악마들과 싸우고 있었다. 라인하르츠 공작이 하나를 쓰러뜨렸지만, 악마의 초월자가 몇이나 남아 있었다.
‘도와야 하는데······.’
라인하르츠 공작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심장은 이미 멈췄다. 기운은 이미 흩어졌고, 영혼의 불길마저 사그라졌다. 초월적인 정신마저 점차 흐려지며 힘을 잃었다.
그리하여 라인하르츠 공작이 죽음의 길에 들었을 때, 누군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이대로 떠나기엔 너무 아쉽지 않소?”
– 아쉬울 것이 무엇인가? 할 만큼 했는데.
“그렇다면 왜 당신은 마지막까지 그리 노력했소?”
말문이 막힌 라인하르츠 공작의 영혼을 아이반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대의 신앙이 투철하다면 모르겠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아쉬움이 남았다면 세상을 갈아타는 것은 어떻소?”
발할라, 죽음을 맞이한 진정한 전사들의 전당.
언젠가 들었던 노르드 신화를 떠올린 라인하르츠 공작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니, 매의 날개를 지닌 여전사가 나타나 환한 얼굴로 날아다니며 뿔피리를 불었다. 찬란한 빛으로 그를 축복하고 꽃가루를 뿌려 환영했다.
그렇게 아홉 세계의 밖에서 최강의 에인헤리가 탄생했다.
290화 이 땅의 모든 군대
숨이 끊어졌던 라인하르츠 공작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던 영혼마저 막대한 정기와 신성이 스며들어 이전보다 더욱 찬란히 빛났다.
니다벨리르에서 만든 창을 한 손에 쥐고서, 황금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은 채 눈을 떴다. 마리난 제국의 공작 라인하르츠는 죽고, 발할라의 전사 라인하르츠가 태어났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달랐다. 스치는 바람조차 가볍지 않았다.
‘이제 선명히 보이는군.’
아무리 애써도 닿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초월자의 경지가 눈앞에 있었다. 자신이 이미 반쯤 넘어왔음을 깨달았고, 나머지 절반을 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히이잉!
그때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애마의 소리였다.
라인하르츠가 발할라의 전사가 된 것처럼 그의 애마도 그러했다. 신수의 피가 각성하여 새하얀 날개를 펼친 채 애마가 하늘을 날아서 돌아왔다.
라인하르츠는 훌쩍 뛰어올라 페가수스에 올라탔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달려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새로 영입한 전사가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반이 고개를 돌렸다. 몇이나 되는 악마의 초월자가 있었으나 전혀 두렵지 않았다.
휘리릭!
가볍게 창을 돌리며 고위 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피의 검으로 다른 녀석의 목을 잘라 버렸다. 피의 검이 녀석의 정기를 한껏 빨아들이며 브리카의 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쿵!
브리카가 날카로운 드래곤의 앞발로 악마를 짓밟고 용의 숨결을 내뱉었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악마를 불태웠다.
그렇게 브리카가 잡다한 놈들을 처리하는 사이 아이반은 근처에 있던 고대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악마의 초월자는 민첩하게 반응했으나 아이반은 그보다 더 빠르고 강했다.
치지직!
쾅!
사마귀의 앞발을 닮은 악마의 팔을 피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무방비한 가슴을 묠니르로 후려쳐 으깨 버렸다.
굵은 번개가 고대 악마의 육신과 영혼을 붙잡아 불태웠다. 녀석의 사악한 마법과 저주가 완성되기도 전에 흩어졌다.
쾅!
재차 망치를 휘두르니 고대 악마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그러고도 악마의 몸이 움직이며 아이반을 공격했으나, 그는 힘으로 찍어 누르며 녀석의 영혼을 뜯어냈다.
– 으아아악!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마계로 돌아가야 할 영혼이 아이반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대악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으나 아이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 영혼을 아홉 세계로 던져 버렸다.
토르가 재구성한 육신은 성능이 아주 좋았다. 예전이라면 제법 시간이 걸렸을 상대조차 가볍게 이길 수가 있었다.
분명 능력치는 그리 큰 차이도 없을 텐데, 새로이 균형을 맞추고 최적화하는 것만으로 성능이 확연히 달라졌다. 육신의 한계가 훌쩍 늘어났다.
처음 토르가 강림했다가 돌아갔을 때는 온몸이 걸레짝이라 그런 걸 느낄 수가 없었는데, 회복하고 나니 그 차이가 놀라울 정도였다.
그런데 토르는 이런 육신조차 본래 자신의 몸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떨어진다고 불평했으니, 과연 아홉 세계 최강의 전사였다.
어쨌든 고대 악마가 둘이나 당하니 악마들이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단번에 요새를 점령하고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오히려 손해만 보았으니 더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반이 있는 곳에 아홉 세계가 있었다. 마왕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면 아홉 세계를 가볍게 짓누를 수 없다는 건 이미 악마들도 잘 알고 있었다.
“악마가 도망간다!”
드워프의 영웅 브릭타가 껄껄 웃으며 그리 소리쳤다. 그도 악마의 초월자와 싸웠기에 제법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소두린의 유지를 받들어 드워프의 세 왕국이 하나가 된 이후로 브릭타는 드워프의 삼 신기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초월자라 해도 그를 쓰러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망가는 놈들을 쫓아 직접 대가리를 깨부수던 브릭타가 적당한 지점에서 되돌아왔다.
초월자 몇이 쓰러졌다고 해서 악마의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다. 전략상 후퇴를 하는 거지, 여전히 위협적인 군대였다. 아군은 방어전이라면 몰라도 추격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쉽군. 이럴 때 처리해 둬야 하는 건데.”
브릭타가 힘의 망치 갈라로자를 쓰다듬으면서 그리 말하자 아이반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일단은 아군을 추스르는 것이 먼저지. 놈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그 다음이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았소.”
대지의 심장에 펼쳐진 결계는 몹시 단단했다. 마왕이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니 그보다 훌륭한 요새는 없었다.
옛 마리난 제국의 병사들과 성황청의 신성 군대, 천상의 아홉 신격과 드래곤이 힘을 합쳐 파멸의 마왕이 움직이는 것을 막았으니 세상의 절반을 내주고서야 제대로 된 방벽을 세운 셈이었다.
마왕들이 마음먹고 공격했다면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방벽이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온 힘을 다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땅의 절반은 악마가 점령했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이 땅의 존재는 힘을 잃었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멸망으로 치닫고 있으니 승리는 정해진 것, 그다음 단계를 위해 마왕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비록 파멸의 마왕이 허무의 마왕을 불러왔다고는 하지만 둘이 사이가 좋을 수는 없었다. 목표가 같았으니 처음에는 손발이 잘 맞아도 결국, 경쟁자이니 뒤에는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악신과 악마가 그러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