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9
“분명 동굴로 들어갔는데 나오니 숲이로군요.”
“던전은 기묘한 이차원 세계니까 꼭 입구와 출구가 반드시 같으리란 보장은 없지.”
그렇게 대답한 아이반이 몸을 돌려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자, 악마를 섬기던 흑마법사는 모두 죽었소. 그들이 노리던 물건은 내 손에 있고, 던전은 해결되어서 사라졌지. 이제 그대들은 어떻게 하시겠소?”
배신을 하려면 배신하라.
내 손에 들고 있는 이 생명의 구슬이 탐나지는 않은가?아이반은 그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어서야 엘레나 이븐우드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미 말했던 대로 그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악마의 추종자가 숲에서 사라지고 위험을 제거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그저 사실을 읊을 뿐이라는 듯 그녀가 말을 했지만 아이반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말로 관심이 없었다면 대답이 그렇게 느리지 않았겠지.
욕심은 있지만 뺏어가지는 않겠다는 거야.’ 그것이 아이반의 강함을 보고 내린 결론인지, 아니면 정말로 양심적이어서 나온 생각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군. 방금 전까지 힘을 쓴 것만으로 충분히 나의 신들을 만족시켰으니까 말이오.”
“우리는 그렇게 야만스럽지 않습니다. 욕망을 못 이겨 약속을 번복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글쎄, 스스로 성격 좋다고 말하는 사람치고 정말로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직까지 못 만나봐서.”
엘레나 이븐우드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덧붙였다.
“언젠가 우리들의 숲으로 오십시오. 우리는 그대를 손님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손님? 저 폐쇄적인 귀쟁이들이? 잠깐 같이 싸운 것 정도로 마음을 열 종족이 아닌데?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무슨 뜻이오?”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그대를 손님으로 환영할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수의 전언입니다.”
” 그렇군.”
세계수의 전언이라는 표현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수는 엘프들의 정신이 모여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신앙이 집약되어 탄생한 초월자이기 때문이다.단순한 시스템이나 네트워크로서가 아니라 초월자로서의 세계수가 자신의 성녀로 삼은 것이 바로 세계수의 무녀.
그런 세계수의 무녀와 같은 성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세계수의 전언이라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이븐우드.
평범한 귀쟁이 년은 아니란 소리군.’ 아이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그리하겠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물론 한참 기다려야만 할 거다.
아이반은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곳에 갈 생각이 없으니까.
서로 감정과 생각을 나눌 수가 있는 엘프들의 합격술은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다.
모이면 모일수록 시너지가 강한 종족이니 그 본거지로 들어가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고도 단단히 준비를 해야만 하리라. 게다가 수백, 수천의 엘프들이 돌아다니는데 하나같이 무표정에 감정 없는 말투라니,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
“그러면 이만.”
그렇게 엘프들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떠났다. 주위에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이반은 힘을 거둬들였다. 그의 창에서 여태까지 이글거리고 있던 로키의 불꽃이 사그라지고 몸 안에서 충만하게 솟아오르던 힘마저 휘발되어 날아갔다.
단번에 많은 체력과 힘을 써버려서 몸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피곤함에 눈이 감길 정도였다. ‘그래도 이게 있으니 좀 낫군.’ 아이반은 생명의 구슬을 들어올렸다. 그동안 얼마나 혹사당한 것인지 이리저리 금이 가고 상태가 영 엉망이었다. 아까 전에 던전에서 봤었던 그 대단한 모습은 이제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던전에서 뿜어냈던 힘 정도라면 금방 강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역시 무리였나보다.
“하긴, 씨부럴. 적일 때는 강하던 녀석이 동료가 되면 귀신같이 약해져서 짐 덩어리 병신이 되는 게 이 바닥 법칙이지.”
생명의 구슬을 다시 집어넣은 아이반은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마치 지팡이처럼 사용해 숲을 빠져나왔다. 뒈지게 배가 고팠다.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뜯고 맥주나 벌컥벌컥 들이켜 마시면 그걸로 족할 것 같았다. 물론 야채는 말고.
던전에서 살아 움직이던 풀 쪼가리를 워낙 많이 봤더니 그건 썩 당기지가 않았다. 고사리 무침이 산 낙지처럼 꿈틀거린다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식욕이 뚝 떨어질 거다.
‘도시에 도착하면 푹 쉬어야겠어.’ 빡세게 달렸더니 몸이 삐걱거렸다.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하면서 몸을 조율하고 다시 싸우러 나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아이반은 곧 씁쓸해졌다. 어쨌든 결론이 싸우는 것으로 이어져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러했고, 앞으로의 길이 그러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무언가와 싸워 이긴다는 뜻이었다.
전사의 영광이나 투쟁의 즐거움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입 안이 쓰다.
얼른 맥주로 이 텁텁한 감정을 씻어내려야 할 것 같다.보드라운 베개와 이불의 감촉이 무척이나 포근했다.
아이반은 사실 한참 전에 깨어났음에도 그 따뜻한 느낌이 좋아서 억지로 눈을 감고 뒤척거렸다. 잠깐의 게으름, 그리고 밀려오는 자괴감. 이렇게 누워 있어봐야 뭐하나 싶은 마음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팡팡!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침대를 두드렸다.
모처럼 자신을 위해 휴식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비싼 숙소를 잡았더니 침대부터 남달랐다.
볏짚을 이불삼아 덮고 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성공한 느낌이었다. 이게 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벌어들인, 그야말로 피 같은 돈 덕분이다.
아이반은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비싼 숙소인 만큼 방에 전용 화장실과 샤워실이 붙어있었다. 마법세공까지 사용해서 뜨거운 물도 콸콸 나오는 훌륭한 시설.
덕분에 가격은 아주 살인적인 곳이었다.
1박 가격이 동화가 아니라 은화를 단위로 했으니까.
보통은 돈 많은 상인, 혹은 귀족들이나 머무르는 숙소였다. 아이반이 제대로 사치를 부린 셈이다. 뜨거운 물로 깨끗이 씻고 나온 아이반은 직원을 불러 자신의 방으로 아침식사를 배달해줄 것을 요청했다.
보통은 식당에 내려가서 먹겠지만, 기왕 비싼 숙소에 머무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더 그곳을 즐기려는 의도였다. 식사 후 교양을 익히는 것처럼 우아하게 기초마법서를 펼쳐든 아이반은 채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더럽게 어렵네.”
몇 번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개소리를 더욱 복잡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해서 지은 것만 같았다. 평생 이런 것만 보고 있으니 마법사들이 다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지.
독서는 접고 숙소를 떠났다. 아이반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용병길드.
딱히 의뢰를 수행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아보기에는 이곳만한 장소가 없었을 뿐이다. 끼익- 경첩이 삐걱거리는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쪽에 있던 용병들이 흘깃 아이반의 얼굴을 살폈다. 보통은 그러고 나서 금방 시선이 흩어졌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머무는 시간이 긴 것 같았다. ‘뭐지?’ 아이반이 의아한 기색을 감추며 길드 접수원 앞에 앉았다. 역시나 친절하고 미소가 예쁜 여직원 따위는 없었고, 얼굴에 칼자국이 하나 그어져있는 대머리 마초 남자 직원이었다. 보통 베테랑 용병들이 은퇴하고 접수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같은 경우인 모양이다.
척 보기에도 험악하게 생긴 것이 숙련된 살인마의 관상이었다.
‘사람 잘 쑤시게 생겼군.’ 그는 아이반의 얼굴을 보자마자 툭 말을 내뱉었다.
“요즘 화제의 인물이 찾아왔군.”
“화제의 인물? 그게 무슨 뜻이오?”
아이반이 되묻자 그는 모르고 있었냐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얼마 전부터 용병 하나가 리무네 호텔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거기는 더럽게 비싼 곳이라 용병들이 머무는 경우는 별로 없으니까. 그런 의미지.”
“이거 서러워서 돈지랄도 못하겠군. 목숨 걸고 벌어들인 돈을 쓸 때도 눈치를 봐야만 한다니.”
“흐흐, 사실 단순히 용병이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 때문은 아니오. 당신이라서 그런 거지. 아이반 에시르손.”
그 말에 아이반은 쓴웃음을 흘렸다.‘씨부럴, 인스타나 페북, 트위터 같은 SNS를 할 때에도 팔로워 하나 없었는데 여기서 유명해지는군.’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았음에도 누군가가 알아본다는 사실이 참 기분이 묘했다. 명성이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아이반의 명성은 모두 칼을 휘둘러 만든 것이 아닌가.
명성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악연도 많다는 뜻. 그는 자기 목에 걸린 현상금이 높을수록 좋아하는 소년만화 주인공이 아니었다.
“동부전선에서 오크 전사들을 아주 토막을 쳐서 쓸어버렸다고 하더군.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아들을 죽였다지? 녀석의 이름이 아마 발크룬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 맞소?”
전에는 히드라에, 이번에는 오크로드의 아들인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무슨 트로피도 아니고 하나씩 수식어가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명성이나 칭호, 타이틀 뭐 그런 거. 추가 능력치가 붙어서 갈아 끼울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하나둘씩 잘도 늘어난다.
괜히 사람 난감하게.
하긴, 어디 산 속에서 폐관수련을 한 것도 아닌데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겠지.
“글쎄, 이미 죽은 놈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해서. 그놈이 떠들기를 자신이 카르타크의 스물 몇 번째인가, 서른 몇 번째인가 되는 아들이라는데, 아마 그 정도면 지 애비도 이름을 잘 모를 거요. 그걸 자랑이라고 떠들고 다니다니, 병신 새끼였지.”
“흐흐, 안타깝지만 그건 아닌 것 같군. 아들을 잃은 오크로드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동부를 두드리고 있다고 하니까. 꽤 아끼던 아들이었던 모양이오.”
아이반이 떠나온 이후 그쪽은 전투가 더욱 크게 번졌다고 한다.
덕분에 근처에 있던 용병들이 죄다 그쪽으로 몰려가서 여기는 오히려 의뢰가 남아돌 지경이라 했다.
“온 김에 의뢰 하나 가져가시겠소? 당신 정도면 골라가도 괜찮지. 지금은 일손이 많이 딸리는데 잘되었군.”
“의뢰 때문에 온 것이 아니오. 정보를 얻으려고 온 거지.”
“으흠, 그렇소? 이거 잠깐 기대했는데 아쉽군.”
길드직원은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보이면서 의뢰목록을 옆으로 툭 치워버렸다. 그리고 심드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정보가 필요하시오?”
“이 근처에서 쓸 만한 정보는 없는지, 요즘 북부는 상황이 어떤지.”
“북부? 아하, 그러고 보니 당신은 노르드 출신이었군.”
길드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