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92
반면 악마들은 기세등등했다. 마왕이 등장하며 마계의 기운이 더 강해지자, 악마들도 더 강해졌다.
그저 마왕이 나타난 것만으로 전장의 추가 조금씩 기울었다. 승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군이 준비한 것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이대로 꺾일 것이라면 감히 전쟁을 끝내겠다고 말하지 않았을 거다.
우웅-
이레인의 몸에서 막대한 힘이 흘러나왔다. 전장의 모든 엘프가 그와 공명했다. 찬란한 영혼의 빛이 하늘을 뒤덮듯 새겨졌다.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 요정의 숲에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던 자들이 손을 맞잡고 옛 힘을 끌어냈다.
둘은 몹시 닮았고, 또 아주 이질적이었다. 태생이 같았으나 방향성이 달랐으니 서로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 둘이 힘을 합쳤다. 오로지 옛 선조, 그들의 근원을 불러오기 위함이었다.
치지직!
팔라시온의 활, 이리딘의 지팡이, 오필리아스의 검, 라그네르자의 목걸이, 마이네르의 반지, 시릴의 마법서, 베이론의 갑옷.
일곱 요정이 남긴 신기들이 나타나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존재감을 키웠다. 세계수와 뱀신 모르나가 품은 요정의 옛 기억과 영혼의 조각을 더듬어 지금은 저 머나먼 요정의 고향으로 떠난 그들을 불러냈다.
엘프의 선조, 이 땅에 내려온 최초의 요정들.
일곱 요정의 형상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각자 자신이 남겼던 신기를 쥐고서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 너희가 우리의 후손이구나.
팔라시온은 이레인의 곁에 나타나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세계수에 남은 기억을 읽으며 그들이 떠나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을 알았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았다. 이미 사라진 옛 선조를 애타게 부를 만큼 위급한 상황이라는 것도 알았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아득한 옛 시절에도 이 땅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었다. 언제고 그가 다시 이 땅을 노릴 거란 걸 알았는데, 그때가 지금인 모양이다.
– 마음 같아서는 파멸의 마왕과 싸우고 싶지만, 그건 우리의 몫이 아니구나. 옛 흔적을 더듬어 우리를 불러온 것은 그런 의도가 아니야. 그렇지?
모든 것을 알면서도 팔라시온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물었다. 거기에 담긴 따뜻한 감정을 느끼면서 이레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의 아이들을 지켜 주세요.”
그 말에 일곱 요정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천상의 아홉 신격과 눈을 마주하다가 이 땅의 모든 병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웅-
일곱 요정의 힘이 마왕의 기운을 밀어내고 아군을 보호했다. 요정의 숲보다 더욱 정령계에 가까운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아군을 품었다.
일시적으로나마 차원 방벽과 유사한 것이 생겼다. 악마의 초월자를 밀어내고 새로운 전장을 만들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그걸 보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필멸자들 따위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어차피 초월자를 모두 꺾으면 필멸자의 반항은 의미가 없었다.
–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드디어 세상을 바칠 생각이 들었나?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비웃듯이 천상의 아홉 신격을 바라보며 그리 말하자 빛의 신 아룬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 우리 세상은 이제 영원한 평화를 얻을 것이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그 말을 듣고서 낮게 말했다.
– 모든 것이 파멸한다면 그 또한 영원한 평화일 테지.
그리고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앞으로 나서니 악마의 초월자들이 일제히 그를 따랐다. 위기를 벗어난 신성의 배신자도 이전보다 더욱 강렬한 기세를 뿌리며 움직였다.
쾅!
초월자들이 뒤엉키며 맞붙었다. 신성의 배신자가 투신 바르투이를 몰아붙이고, 바람의 신 테스와 강철의 신 델루가가 신성의 배신자를 공격했으며, 고대 악마들이 나타나 그들을 방해했다.
달의 여신 셀룬이 고대 악마의 팔을 날려 버리고, 사나운 이빨이 그녀의 뒤를 노리는 또 다른 악마의 공격을 막았다.
델피노의 빛이 전장을 가로지르고, 대악마 음습한 모략이 힘을 발휘하니 아군이 서로를 공격하다가 흠칫 놀라며 물러섰다.
모두가 각자 상대를 찾아 싸우다 보니 정작 마왕을 상대할 이들이 부족했다. 아홉 신격 중 남은 것은 빛의 신 아룬과 불의 신 쿤다라가 전부였다.
둘이 천상에서 가장 강한 신격이었지만 과연 그들만으로 마왕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그때 대악마 음습한 모략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사악한 지혜로 전장을 확인하고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아이반, 아홉 세계의 주인은 어디로 갔지? 종말의 드래곤은 왜 보이지 않지?’
그러다 문득 불의 신 쿤다라와 눈이 마주쳤다. 쿤다라는 망치를 들고서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망치?’
그 생각과 동시에 천둥을 머금은 망치가 대악마 음습한 모략의 머리를 깨부수기 위해 날아왔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중간에 후려쳐 날리지 않았다면 대악마의 머리가 허무하게 날아갔을 것이다.
치지직!
쿤다라의 모습이 흔들리다가 아이반으로 변했다. 어느 틈엔가 그가 쿤다라의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거다. 잠시라면 세상조차 속이는 로키의 환영이었다. 제대로 힘을 쓰기 전에는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홉 세계의 주인이 쿤다라의 흉내를 냈다? 그러면 진짜 쿤다라는 어디로 갔지?’
음습한 모략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파멸의 마왕은 먼저 움직였다. 무슨 수작이든 힘으로 찍어 누르면 결국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스걱!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손을 휘두르자 세상이 길게 찢어지며 아이반에게 닿았다. 미처 피할 시간도 없이 다가온 공격을 가느다란 빛 하나가 멈춰 세웠다.
쿵!
빛의 신 아룬은 마왕의 공격을 막았으나 표정이 밝지 않았다. 가볍게 휘두른 공격조차 가볍지 않았다.
크툴라스는 아득한 옛 시절보다 지금이 더 강한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이 아주 약해졌거나.
휘리릭!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의 손짓에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쪼개졌다. 빛의 신 아룬은 그것을 간신히 피하고 막아 내면서 뒤로 물러났다.
몸이 무거웠다. 이곳이 마계가 되어서 힘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예전과 비교해도 몸놀림이 아주 둔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항상 전투를 갈망하는 광전사의 신, 오크투신 타르칸조차 녹색 만신전의 주인이 되고서 전투 감각이 떨어졌노라 말했는데, 천상의 주인이 그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옛 신화시대 이후로 빛의 신 아룬은 진정으로 싸워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이가 빛을 찬양하고 무릎 꿇었으니 징벌이라면 모를까 치열하게 싸울 일이 없었다.
완벽한 상태로도 마왕을 혼자 감당할 수는 없을 텐데, 지금은 더욱 그러했다. 단번에 쓰러지지 않은 것이 용했다. 싸울수록 옛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진작 마왕의 손길에 온몸이 찢어졌을 거다. 아이반이 같이 싸운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끔찍할 정도로 파괴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닿는 모든 것을 부수고 무너뜨리는 파멸의 권능 때문에 스치는 것조차 조심해야만 했다.
쉬이익!
그때 빛의 신 아룬의 턱끝까지 다가왔던 마왕의 손길이 멀어졌다. 그 무엇보다 신성한 불길이 마왕을 노렸기 때문이다.
하늘이 붉게 변하며 불의 신 쿤다라가 나타났다. 모습을 감췄던 그는 다소 지친 표정이었다. 온몸에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의 곁에 아홉 세계의 일등 외교관 라타토스크가 잔뜩 몸을 움츠린 상태로 서 있었다. 종말의 드래곤 니드호그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질겅질겅 씹으며 노려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놈들을 처리하고 왔다. 늦지는 않았군.
니드호그가 씹고 있는 고깃덩이는 바로 미쳐 버린 악신들이었다.
라타토스크가 충동질하여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를 공격했던 그들은 아주 큰 상처를 입은 채 숨어 있었는데, 불의 신 쿤다라와 종말의 드래곤 니드호그가 은밀히 움직여 놈들을 끝장내고 돌아온 것이다.
니드호그가 으적으적 씹고 있는 놈들의 시체와 영혼, 신성은 그대로 아홉 세계로 넘어갔다. 그리고 위그드라실의 뿌리로 휘감아 정기를 뽑아 정화하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자에게 전해졌다.
치지직!
쾅!
굉음과 함께 토르가 아홉 세계에서 넘어왔다. 텁텁한 마계의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는 만족한 듯이 씨익 웃었다.
– 그래, 역시 이 맛이지.
천둥신이 허신을 벗어나 육신을 되찾았다. 그 누군가의 몸을 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었다.
아스가르드 최강의 전사가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나 마왕을 노려보았다. 묠니르를 빙글빙글 돌릴 때마다 하늘이 요동치고 천둥이 울려 퍼졌다. 강대하고 파괴적인 힘이 새어 나왔다.
쾅!
토르가 단번에 달려가 묠니르를 휘둘렀다. 세상이 울리는 굉음과 함께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를 내리찍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한쪽 팔로 묠니르를 막았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왕의 강대한 육신이 한 방에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쿵!
크툴라스는 그대로 토르를 후려쳤다. 그러나 토르가 주먹을 얻어맞고 날아가는 것을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공간이 무너져 내릴 정도로 강력한 파멸의 권능을 담았기에 저리 날아가서는 안 된다.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가루가 되었어야만 했다.
– 크하! 주먹 한번 화끈하군!
파멸의 권능이 담긴 주먹을 맞고 날아가던 토르가 몸을 뒤집어 멈춰 섰다. 땅이 움푹 꺼질 정도로 강력했으나 그는 그저 껄껄 웃었다.
토르의 육신은 아홉 세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설령 세상을 부수는 파멸의 권능이라도 견딜 수 있었다.
한 방에 피를 토하고 무너져 내렸던 아이반의 나약한 육신과는 달랐다. 이게 아스가르드 최강의 투신이었다.
쾅!
토르가 휘두른 묠니르를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맞받아쳤다. 끔찍한 충격파가 주변으로 퍼졌다.
그 틈을 뚫고 빛의 신 아룬이 마왕을 공격했다. 불의 신 쿤다라와 종말의 드래곤 니드호그, 아홉 세계의 주인 아이반이 함께했다.
그렇게 마왕 사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