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93
293화 라그나로크
거대한 빛의 기둥이 하늘을 찢고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후려치니 빛의 기둥이 순식간에 어둠에 물들었다.
화르륵!
어둠에 밀려 흩어지는 빛 사이로 불의 신 쿤다라가 횃불을 휘둘렀다. 신성한 불길이 마왕의 사악한 마력을 삼키며 밀려들었으나,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그 불길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며 쿤다라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 크억!
불의 신이 땅에 처박히자 지반이 내려앉고 흙과 바위가 녹아내렸다. 갈라진 틈새로 용암이 흘러나오며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불타는 평원 위로 종말의 드래곤이 날았다. 니드호그가 한껏 숨을 들이켰다가 마력을 섞어서 내뱉었다. 종말의 숨결이 쏟아지자 세상이 비명을 질렀다.
사사사삿-
그 어느 드래곤보다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이 밀려왔다. 걸리는 모든 것을 죽이고 부수며 거칠게 달려왔다.
그러나 종말과 파멸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크툴라스는 오히려 웃으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쾅!
종말의 숨결이 쩍 갈라졌다. 마왕 크툴라스의 마력은 가장 파괴적인 드래곤의 권능을 꿰뚫고 지나갔다.
니드호그의 날개가 끝에서부터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파멸의 마력이 스며들어 강대한 드래곤의 육신을 빠르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콰직!
니드호그는 스스로 날갯죽지를 물어뜯어서 파멸의 마력이 더 스며드는 것을 막았으나, 날개를 잃은 드래곤은 땅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파멸의 마력은 실로 지독하여 잘린 날개를 재생하는 것조차 방해했다.
마왕 크툴라스는 떨어지는 니드호그의 목숨을 끊기 위해 달려들었다. 아이반은 그걸 방해하기 위해 창을 집어 던졌다. 궁니르의 권능을 담은 어두운 용의 발톱이 마왕 크툴라스의 심장을 노렸다.
그러나 반드시 명중하는 권능이 무너졌다. 마왕 크툴라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하고 사악한 마력은 모든 법칙을 무너뜨렸다. 아이반의 창이 영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다행히 마왕 크툴라스의 손길이 니드호그의 목덜미에 닿기 직전에 묠니르가 끼어들었다. 토르의 망치가 마왕 크툴라스의 공격을 막아 냈다.
쾅!
– 흐아아압!
토르의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아스가르드 최강의 투신은 마왕 크툴라스가 내뿜은 파멸의 마력을 오직 힘으로 맞받아쳤다.
크툴라스가 뒤로 밀려나자 빛의 신 아룬이 신성한 빛을 엮어서 사슬을 만들어 마왕을 붙잡았다. 예전 악신들을 차원 너머에 유폐했던 봉인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힘이었다.
끼기긱!
그러나 마왕을 묶는 것과 동시에 빛의 사슬이 비명을 질렀다. 이 땅의 가장 강대한 신의 권능조차 마왕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파각!
빛의 사슬을 끊어 버린 크툴라스는 토르의 망치를 피하고 아룬을 후려쳤다. 천상의 주인을 바닥에 처박았다.
파멸의 마력이 빛의 신 아룬을 삼키지는 못 했으나, 그 충격만으로 세상이 흔들렸다. 천상을 중심으로 하던 세상의 법칙이 기울고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과연 마왕은 마왕이었다. 여기에 누구 하나 우습게 볼 이가 없는데, 그들을 상대로 압도하고 있었다.
고오오-
마왕이 내뿜는 마력은 처음과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그게 진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군은 점점 약해지고 악마는 점점 강해졌다. 일분일초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세상의 빛이 이리도 하찮구나. 그 옛날 용맹하던 전사는 어디로 가고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만 남았군.
마왕은 빛의 신 아룬을 짓밟고 그리 말했다. 옛 승리자가 추하게 땅을 구르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빛의 신 아룬은 자신을 짓밟고 선 마왕을 노려보며 그리 말했다.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손을 뻗어 기어이 마왕을 붙잡았다.
화아아-
아룬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파멸의 마왕을 옭아맸다. 크툴라스를 평범하게 묶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몸으로 그를 멈춰 세웠다.
그래 봐야 순간일 뿐이다. 아주 잠깐 발을 묶었을 뿐이었다.
크툴라스는 몸을 던져 겨우 발을 붙잡는 것으로 만족하는 아룬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예전 자신을 몰아내고 이 땅의 지배자가 되었던 옛 승리자가 이리도 하찮아진 것을 애도했다.
– 화려한 영광이 너를 무디게 만들었구나.
그러나 크툴라스는 몰랐다. 그 아주 약간의 틈이 아룬이 기꺼이 몸을 날릴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땅에서 이빨이 돋았다. 하늘에서 침이 떨어졌다. 아래턱은 세상의 가장 깊은 곳에, 위턱은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닿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씹어 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늑대는 한입에 세상을 꿀꺽 삼켜서 뱃속에 집어넣었다. 언젠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리했다.
펜리르가 나타났다. 아홉 세계에서 건너와 이 땅에 스며든 마계를 삼키고 당당히 섰다.
세상을 으적으적 씹으면서 펜리르가 낮게 말했다.
– 마계는 조금 텁텁한 맛이군. 나쁘지는 않아.
그 거대한 늑대를 바라보면서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빛의 신 아룬을 공격하던 손마저 거두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마계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곧 마계가 되는 마왕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혼란스러웠다. 크툴라스의 길고 긴 삶에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계가 되었던 땅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곳은 이제 더는 마계가 아니니 한없이 강해지던 악마의 기운이 줄어들고, 이 땅의 모든 자가 힘을 되찾았다.
자신에겐 유리하고 상대에겐 불리한 전장을 강요하는 마왕의 권능이 사라졌다. 전쟁의 흐름이 또다시 요동쳤다.
화아아-
억눌려 있던 빛의 신 아룬의 기운이 크게 치솟았다. 이 땅은 본디 천상의 영역이니 마왕의 권능만 없다면 오히려 그를 위한 전장이었다.
아군은 힘을 되찾고 악마는 약해졌다. 세상이 자신을 공격한 악마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군을 축복하고 악마를 저주했다.
확 바뀐 전장의 분위기를 보면서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가 낮게 웃었다.
– 그저 발악만은 아니었단 소리군.
궁지에 몰린 쥐가 무는 것이 아니었다. 참고 또 참아서 승리의 가능성을 확인하고서야 밖으로 나선 것이었다.
그를 위해 세상의 절반을 내주었으니 참으로 인내심이 훌륭했고, 또 미련했다.
반쯤 목숨을 끊어 놓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제법 날카로운 이를 들이밀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그리 생각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허무의 마왕을 견제하느라 숨기고 있던 힘을 끌어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훌륭하다. 훌륭한 적이다. 과연 내가 그토록 노렸던 세상다운 반항이다.
마계와 연결이 끊어져 크게 줄었던 마왕의 마력이 다시 치솟았다. 이전보다 더욱 강한 기운이 샘솟았다. 홀로 세상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마왕의 진정한 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왕이 품은 사악하고 거대한 마력이 세상을 뒤덮었다. 자신이 밟은 땅을 마계로 만드는 권능이 아니더라도 마왕은 자신이 품은 힘만으로 이 땅을 파멸로 이끌 수가 있었다.
옛 승리자들이 찬란한 영광에 취해 끝없이 약해지는 동안, 그는 진정한 승리를 위해 힘을 쌓고 또 쌓았다. 단 한 순간도 이전보다 약해진 적이 없었다.
두두두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세상이 흔들렸다. 강력한 마왕의 기운에 세상이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죽음의 공포로 요동쳤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진다. 공기가 죽어가고 한 줌의 생명력조차 사라졌다.
산처럼 치솟은 해일이 육지를 덮치고, 오랜 세월 침묵하던 화산이 불을 뿜었다. 가장 뜨거운 땅에 폭설이 쏟아지고, 가장 추운 곳에 더위가 찾아왔다. 폭우와 가뭄, 폭풍과 지진이 쉴 새 없이 몰아쳤다.
파멸이 다가왔으니 모든 것이 절망으로 이어졌다. 마왕이 이 땅에 나타났을 때 이 세상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 나는 너희의 파멸이다. 그 의미를 처절히 깨달아라!
빛의 신 아룬의 표정이 굳었다. 천상의 아홉 신격이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마왕을 바라보았다. 이 땅의 가장 강인한 신들조차 두려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잠깐 승리를 확신한 순간도 있었으나, 마왕의 벽은 높고도 높았다. 그 모든 노력을 다하고도 마왕은 여전히 강력했다. 그는 진정한 파멸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천둥신 토르는 오히려 웃었다. 가장 가까이서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와 싸웠기에 그의 강함을 아주 잘 알았으나, 그걸 알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한심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펜리르가 나타난 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의 등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펜리르는 마왕의 권능을 삼킨 것이 아니었다. 마계를 삼키고 그 힘을 빼앗은 거였다. 마왕은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첫 번째는 삼 년간 여름 없이 혹한이 몰아치는 핌불베트르(Fimbulvetr: 혹독한 겨울).
두 번째는 근친상간과 골육상잔이 이어지는 늑대의 시대.
세 번째는 태양과 달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온다.
네 번째는 요툰헤임의 붉은 수탉 퍌라르, 아스가르드의 금빛 수탉 굴린캄비, 헬헤임의 이름 모를 검붉은 수탉과 그니파헬니르 동굴 앞의 가름이 길게 울부짖는다.
그리하여 펜리르가 목줄을 풀고서 나타나니 그게 바로 라그나로크였다. 세상의 종말이었다.
둥-
두둥-
흐릿한 북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무지개다리 비프로스트가 이 땅에 닿고, 아스가르드의 파수꾼 헤임달이 가장 먼저 나타나 전쟁을 알리는 뿔피리, 걀라르호른을 길게 불었다.
뿌우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