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98
“처음 봤을 때 나를 죽이지 못한 순간, 이미 너희는 실패했다.”
처음 아이반이 이 땅에 떨어져 방황하다 죽었으면, 끝까지 동료를 만나지 못하고 홀로 지냈다면, 아스가르드의 화신이 되기를 거부했다면, 아홉 세계가 힘을 되찾기 전에 끝을 보았다면.
어쩌면 마왕이 이 땅을 차지했겠지. 지금의 세상은 무너지고 악마의 영역이 되었겠지. 마계의 일부로 변했겠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 운명이 바뀌었다. 어둠은 세상을 삼키지 못한다.
카아악!
펜리르가 입을 쩍 벌리고 허무의 마왕을 단번에 물어뜯었다. 거대한 이빨로 마왕을 짓눌렀다.
허무의 마왕이 붙잡고 있던 아이반의 모습이 환영이 되어 사라지고, 펜리르는 마왕을 덥석 삼켜 버렸다.
허무의 마왕이 공허의 바다를 열어서 막아 내려 했으나, 펜리르는 공허의 바다마저 삼켜서 열지 못하게 했다.
물론 공허의 바다는 평범한 세상이 아니었다. 단번에 세상을 씹어 삼키는 펜리르가 공허의 바다는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더부룩하게 있다가 곧 내뱉었다.
그러나 그렇게 튀어나오는 허무의 마왕을 노리고 있던 토르가 대뜸 달려들어 묠니르를 휘둘렀다. 아홉 세계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가 마왕을 공격했다.
쾅!
묠니르는 공허의 권능이 봉인된 상태로 막을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허무의 마왕은 그대로 가슴이 으스러지며 피를 토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열기에 녹아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땅에 처박혔다.
치이익!
토르는 허무의 마왕을 짓밟고 섰다. 양손에 묠니르를 하나씩 들고서 마왕을 내려다보며 껄껄 웃었다.
– 네가 가진 허무는 이게 전부냐! 그것으로 감히 아홉 세계를 지우려 했단 말이냐!
쾅!
콰광!
토르는 묠니르를 번갈아 휘두르며 허무의 마왕을 후려쳐 갈겼다. 녀석을 더욱더 깊은 땅속에 처박으면서 거세게 몰아붙였다.
허무의 마왕은 벗어나려 했으나, 땅에서 솟아난 겨우살이가 그의 팔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것이 어찌나 질긴지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붙잡힌 상태에서도 마왕은 마왕이었다. 마냥 당하지는 않았다. 지독하고 지독한 마왕의 마력이 토르에게 스며들었다.
공허의 바다를 다루는 마왕의 권능이었다.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태초의 혼돈이 토르를 무너뜨렸다. 아홉 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육신이 흔들리고 그의 생명을 위협했다.
참으로 지독한 힘이었다. 거세게 반항하는 토르의 기운을 넘어서 교묘하게 번졌다.
튼튼한 육신이 삐걱거렸다. 근육이 끊어지고, 살이 썩어 가며, 뼈가 부서졌다.
지금이라도 뒤로 물러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홉 세계의 힘으로 마왕의 마력을 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르는 오히려 진하게 웃으며 공격을 계속했다. 남은 모든 힘을 털어서 허무의 마왕을 후려쳤다.
토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냥 물러선 적이 없었다. 죽음이 앞에 있다고 발걸음을 늦춘다면 그건 토르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기쁘게 뛰어들었다.
– 나는 토르! 아홉 세계 최강의 전사다!
쾅!
묠니르가 마왕의 머리를 깨부쉈다. 심장을 터트리고 녀석의 가슴에 박혔다.
토르가 어찌나 힘을 줬는지 두 개의 묠니르 모두 뜨겁게 달아올라서 열기를 뿜어내고, 손 모양으로 손잡이가 변형되어 있었다.
토르는 마왕의 신성을 뽑아 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강대한 힘의 덩어리를 쥐고서 바라보다가 아이반에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셋과 넷을 넘어서 어느덧 여덟 걸음.
이미 거기서 한계가 찾아왔지만, 토르는 기어이 한 발을 더 내디뎌서 아홉 번째 걸음을 완성한 후 히죽 웃었다.
– 이번에도 나는 지지 않았다.
토르의 튼튼한 육신이 허무의 마력을 못 이기고 흩어진다. 천둥신은 마왕의 핵을 넘기고서 선 채로 숨을 거뒀다. 예전 그러했던 것처럼 상대를 쓰러뜨린 후 아홉 걸음을 걷고서 목숨을 잃었다.
참 미련했다. 조금 더 현명하게 싸웠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참으로 무식하게 싸웠다. 허신을 벗어나자마자 다시 허신이 되다니.
아이반은 마왕의 핵을 위그드라실의 가장 깊은 곳으로 집어 던지면서 말했다.
“금방 부활할 수는 없을 거요. 정기가 넘쳐도 영혼의 상처를 단번에 지울 수는 없을 테니까.”
마왕의 권능은 천둥신의 영혼까지 스며들었다. 홀로 세상을 무너뜨리는 마왕의 힘이니 토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간단히 털어 낼 수는 없었다.
그 정도는 각오했다는 듯 토르의 영혼이 껄껄 웃으면서 아홉 세계로 돌아갔다. 아스가르드에는 가지 못하고 헬헤임에 들러서 이미 죽은 자들과 술이나 퍼마시겠지.
그렇게 토르가 헬헤임으로 떠났다. 펜리르는 공허의 바다를 삼킨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며 누워 있었다.
그러나 허무의 마왕이 쓰러졌다. 그의 머리와 심장을 터트리고 신성을 뽑아냈다. 그것으로 승패는 결정되었다.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실로 마왕다운 위엄을 떨치며 날뛰었으나, 혼자서 견딜 수는 없었다.
마왕이 가진 마계화의 권능이 힘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마계가 불타고 있으니 악마는 끊임없이 약해졌다.
대악마 음습한 모략의 머리를 뽑고, 신성의 배신자의 심장을 꿰뚫는 것으로 악마의 초월자를 모두 쓰러뜨린 천상의 신격들이 합류했다.
빛의 신 아룬, 불의 신 쿤다라, 생명의 신 에른, 강철의 신 델루가.
천상의 아홉 신격은 이제 천상의 네 신격이 되었고, 그나마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마침내 마왕을 물리칠 수 있다는 생각에 표정만은 밝았다.
아홉 세계의 신이 파멸의 마왕을 둘러싸고, 천상의 신격이 녀석을 내려 보았다. 그러자 크툴라스가 허탈한 듯 웃었다.
– 다 된 줄 알았는데, 이리 실패할 줄이야.
예전 신화시대의 싸움에서 패하고 물러난 이후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힘을 키우고 또 키웠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치열하게 준비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다시 패배할 줄은 전혀 몰랐다.
변수는 단 하나였다. 아이반, 아홉 세계.
아홉 세계의 힘을 경계하며 자존심을 접고서 허무의 마왕마저 끌어들였는데, 그러고도 부족할 줄이야.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는 한때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라 여겼던 빛의 신 아룬을 무시하고서 아이반을 노려보았다.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씹어 먹을 듯 말했다.
– 이번에는 네놈 때문에 쓰러지지만 다음번에는…….
그러나 아이반은 마왕의 유언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적의 최후는 장엄해서는 안 되고, 처절해서는 안 된다. 언제나 허무해야만 했다.
그건 최종 보스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이야기를 질질 끄는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괜히 입을 열어 봐야 욕이나 내뱉겠지. 저주나 걸거나.’
아이반은 그리 생각하며 창을 집어 던졌다. 어두운 용의 발톱이 파멸의 마왕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걸 신호로 주변에 있던 모든 초월자가 달려들었다. 파멸의 마왕은 마지막까지 강력했으나,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티르의 칼이 녀석의 팔뚝을 자르고, 헤임달의 검이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빛의 신 아룬은 거대한 빛의 창을 만들어 녀석의 가슴을 꿰뚫고, 불의 신 쿤다라의 횃불이 육신을 불태웠다.
녀석이 뿜어낸 마력은 오딘과 로키, 프레이야에게 막혔다. 마왕의 핏물이 흐르는 용암을 식히고, 녀석의 몸놀림이 점차 느려졌다.
타오르는 마계처럼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의 생명도 타들어 갔다. 무한할 것 같던 기운이 흩어지고 세상을 위협하던 권능마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눈빛뿐이었다. 날카롭고, 사악하며, 집요한 눈동자.
아이반은 아스가르드의 수많은 신을 곁에 세우고, 찬란한 위그드라실의 문양을 등에 새긴 채 크툴라스를 바라보았다.
감히 이 땅의 파멸을 자처했던 마왕의 눈빛을 마주하면서 창을 휘둘렀다.
“너는 결국 우리의 파멸이 되지 못했다.”
스걱-
파멸의 마왕 크툴라스의 머리가 잘렸다. 녀석의 머리는 몸에서 떨어지고서도 생명력이 남아 있어 끝까지 아이반을 노려보았으나, 뒤이어 쏟아지는 공격에 살점 하나, 뼛조각 하나까지 분해되어 흩어졌다.
그렇게 마왕이 죽었다. 이 땅을 노리던 가장 위험한 적이 사라졌다.
아이반은 무기를 집어넣고 하늘을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승리의 환호성이 세상을 울렸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길었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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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화 또 다른 신화
마왕 둘을 처치하고 마지막 남은 악마마저 쓰러뜨리니 이 땅을 뒤덮은 사악한 기운이 점차 흩어졌다.
차원의 틈에 칼을 박아 넣고서 마계를 불태우던 수르트가 무스펠헤임으로 돌아가니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땅이 천천히 식었다.
초월자조차 감당하기 힘든 열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 반동처럼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이어졌다. 뜨거워진 공기가 차갑게 변해서 쏟아지는 것이다.
피와 시체, 부서진 창칼과 조각난 갑옷, 갈라진 땅과 무너진 산마저 굵은 빗줄기에 모두 씻겨 나갔다.
주변 수십 킬로미터가 모두 뒤집히고 땅이 녹아 버릴 정도니 식물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쏟아지는 빗물을 붙잡을 것이 없으니 그대로 홍수가 되어 전투의 흔적을 삼켰다.
초월자 몇이 홍수가 밀려오는 것을 막는 동안 살아남은 병사들이 빠르게 전장을 정리했다. 아군의 시체를 정성스럽게 수습하고, 적의 시체를 구덩이에 파묻었다.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운 전우를 이런 곳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살아남은 자보다 많은 아군의 시체를 천으로 고이 감싸서 옮겼다.
생존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모두가 크고 작은 부상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시체를 수레에 싣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돌아가니 마치 패잔병처럼 보이기도 했다.
– 전투력은 이미 바닥났지. 천상의 아홉 신격 중 다섯이 목숨을 잃어 허신이 되었고, 남은 넷이라 해도 우리를 감당할 수는 없어. 녹색 만신전이야 오크투신이 쓰러졌으니 별것 없지.
로키가 아이반의 귓가에 그리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