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299
– 지금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 이 세상을 쉽게 먹어 치울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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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뒤통수를 쳐라. 지금이 기회다. 다시는 이처럼 완벽한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아스가르드의 마신이 배신을 부추겼다. 어린아이의 사탕을 뺏어 먹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며 사악하게 떠들었다.
“닥치시오. 대가리 깨버리기 전에.”
어린아이 사탕을 뺏어 먹기는 개뿔. 남의 입에 있는 걸 빼먹으려고 하기는.
아이반은 한심한 눈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제 버릇 못 숨기고 헛소리를 떠들어 대는 마신을 향해 경고했다.
“나는 이 세상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이제 싸움이라면 지긋지긋해.”
기껏 이 세상을 구하려고 그리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배신할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반이 딱 잘라서 말하자 로키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 뒤로 아스가르드의 몇몇 신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니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여간 인성 수준이 남다른 놈들이었다. 아홉 세계의 오랜 전통인 배신과 협잡, 음모와 폭력을 참으로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홉 세계의 주인은 아이반이었다. 그가 딱 잘라서 거절하니 아스가르드의 음흉한 마신들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나치게 쉽게 포기하는 것 같은데?’
아이반은 순순히 물러나는 로키와 오딘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스가르드 신격을 다루기는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홉 세계의 전사들이 마계를 점령하는 중이니 폭력적인 욕망이야 그쪽으로 뿜어내면 된다. 그 또한 하루아침에 끝날 일은 아니니까.
‘내가 반대하는데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아이반이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니 델피노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핏 들리는 말로 상황을 짐작한 모양이다.
방금 마왕을 물리친 상황에서 마냥 농담처럼 느껴지진 않았을 거다. 그동안 아이반이 욕했던 아스가르드 신들의 성향이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아니까.
“그, 좋게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마왕이 아니니까.”
마왕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세상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대륙의 절반이 악마의 손에 넘어가서 반쯤 마계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으니 오죽하겠나.
곳곳에 몰아치는 자연재해가 진정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필요했다.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남부를 되살리려면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흘러야만 할 테고.
수많은 인간이 죽었다. 수많은 엘프와 수많은 드워프, 수인과 나가, 리자드맨과 오크, 고블린, 트롤이 죽었다.
이 땅의 조율자를 자처하는 드래곤도 이제는 다섯을 겨우 넘겼다. 천상의 신격이 반토막 나고, 녹색 만신전의 기세도 크게 꺾였다.
이 세상은 승리를 위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런 세상에 한 짐을 더 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이반은 아직 아홉 세계에 완전히 물들지 않았다. 여전히 초월자의 사고보다는 필멸자의 시선에 익숙했다.
“아홉 세계가 완전히 부활하는 것에 이 땅이 큰 역할을 했는데 어찌 함부로 대할 수가 있겠소?”
이 땅의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싸우고 싸워서 어둠을 밀어냈다.
아이반은 그들과 묘한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다. 가까울수록 배신할 맛이 난다는 아스가르드의 사악한 마신들과는 달랐다.
“그냥 시원한 맥주나 한 잔 마시고 싶군.”
아이반이 그렇게 말하니 옆에 있던 사나운 이빨이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나는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싶다!”
이레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오랜만에 연초나 한 모금 했으면 좋겠어.”
그러자 곁에 있던 자들이 하나씩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위대한 초월자부터 고귀한 혈통의 귀족들, 막내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이 품고 있던 소원을 꺼냈다.
때로는 아주 거창하고, 때로는 아주 간단한 소원이었다. 누구는 그게 뭐냐고 깔깔 웃고, 또 누구는 이룰 수 있을 거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들은 패배자가 아니었다. 세상의 종말을 저 멀리 쫓아 내고 이 땅이 계속 이어지도록 만든 용사들이었다.
쏟아지는 빗물이 그들의 열기에 밀려났다. 차가워지는 몸보다 뜨거운 마음이 먼저였다.
이 땅에 신화가 새겨졌다. 그곳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아아아-
어느 병사 하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유행하던 노래였다. 아무도 그 노래를 알지 못했으나 감정만은 와닿았다.
모두가 각자의 노래를 불렀다. 서로 언어도 다르고, 종족도 다르고, 신분도 다른 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제멋대로 불렀으나, 그 불협화음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영감이 깨어 있는 자들은 마지막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의 영혼들이 따라오다 각자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떠나는 것을 보았다.
망가진 세상을 위로하고, 부활할 이 땅을 응원하는 진혼가이자 군가였다.
예전 아홉 세계와 달리 멸망의 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아스가르드의 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기억의 남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한때 아이반이 느꼈던 생명의 무게는 참으로 가벼웠다. 너무나 값싸고 하찮았다. 겨우 하룻밤 여관비로 사라질 만큼 허무했다.
그러나 지금 아이반은 생명이 이토록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귀하고 소중했다. 세상을 구할 만큼 위대했다.
영웅의 시련이 모두 끝났다.
* * *
이 땅의 어둠이 물러나고 전쟁이 끝났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병사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떠났다.
전쟁터를 떠나도 삶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황폐하게 변한 농지를 새로 개간하고 무너진 수로와 집을 보수하느라 바쁘기 그지없었다.
식량이 충분하지 않아 굶주렸고, 마왕들이 흩뿌렸던 마력에 영향을 받은 마수들이 한층 포악하게 날뛰었다.
그러나 끝인 줄 알았던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절망이 끝나고 희망이 보이니 팍팍한 삶 속에서도 웃음이 피어났다.
엘프는 요정의 숲에서 식량을 생산해 다른 종족에게 전해 주었다. 드워프는 대륙 곳곳을 누비며 파괴된 도시를 이전보다 더욱 근사하게 수리했다.
수인과 리자드맨은 위험한 마수를 때려잡았고, 나가 주술사와 성황청 사제들이 함께 움직이며 사람들을 치료했다.
천상의 네 신격은 무너진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 비틀린 세상의 법칙을 다시 세우고 외부의 위협을 막아 냈다. 허신이 된 다섯 신격은 부활할 때를 기다리며 그들을 도왔다.
피의 동맹과 신뢰의 연합 사이의 경쟁은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피의 동맹이 대규모 이주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허신이 된 녹색 만신전의 조상신들을 빠르게 부활시키기 위해 정기를 찾아 마계로 떠났다.
아홉 세계의 전사들과 함께 마계에서 악마를 때려잡으며 정기를 모으고 모아서 녹색 만신전을 재건하겠다는 것이다.
많은 피가 흐를 터였다. 아주 괴롭고 힘들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오크들은 껄껄 웃으면서 기꺼이 그 고난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껏 싸울 수 있음을 축복으로 느꼈다.
과연 영원한 싸움을 찾아 헤매는 광전사의 신, 오크투신 타르칸을 모시는 자들다운 선택이었다.
검신 카락취는 아직 자신의 검이 부족하다 말하며 마계로 떠났다. 그를 보며 경쟁심을 느낀 투신 바르투이도 마계로 향했다.
대스승 크뮨을 비롯한 대주술사 일부는 마계를 보통의 세상으로 만들겠다며 숲을 가꾸고 생명력을 북돋웠다.
“덕분에 마계도 그리 심심하지는 않소. 다들 의지가 대단해서 오히려 활기가 가득할 정도지.”
아이반이 웃으면서 그리 말하니 델피노가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저도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제 이곳을 쉽게 떠날 수가 없네요.”
델피노는 빛의 대리인이었다. 그는 빛의 신 아룬의 하위 신격이자 성황청을 이끄는 자였다. 이 세상이 회복하는 데 그의 힘이 꼭 필요했다.
“앞으로 영원히 얼굴을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어떻소? 앞으로 시간은 많소. 우리는 이제 초월자라 수명은 문제없으니까. 이 세상을 잘 보듬고 있으시오.”
아이반이 그렇게 대꾸하니 사브리나가 끼어들었다.
“이제 이 세상도 반쯤은 그대의 영역이다. 오래 방치하지는 말아라.”
차원 방벽이 완전히 무너지고 초월자들마저 절반이 넘게 사라졌다. 녹색 만신전도 부활할 정기를 찾아 마계로 떠나니 외부의 침략을 막을 힘이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천상은 아홉 세계에 보호를 요청했다. 이 땅이 옛 힘을 되찾고 죽어 버린 신격이 부활하여 외부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을 때까지 지켜 달라는 것이다.
아이반은 이 땅을 집어삼킬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도 상황이 흐르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비슷하게 되었다.
아스가르드 신들이 괜히 순순히 물러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아마 이리되리라고 진작부터 예상했던 모양이다.
천상은 시간이 흘러서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하면 다시 독립하고자 하겠지만, 아스가르드 신들은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아스가르드 신들은 이 땅을 무슨 가르드니, 무슨 헤임이니 하면서 제멋대로 부르고 있었다. 아홉 세계가 열 세계가 되었고, 또 마계를 삼켜서 열하나의 세계가 될 것이라며 들떠 있었다.
“마계의 온천··· 아니, 싸움이 기대된다!”
사나운 이빨이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마계로 가는 차원문 앞에서 재촉했다.
그 옆에는 달의 여신 셀룬이 서 있었다. 그녀는 어둠을 밀어내기 위해 달의 여신이 되기를 자청할 정도로 악과 싸우기를 원했다. 마계라고 마다할 리가 없었다.
세계수의 뒤를 이어 엘프를 보살펴야만 하는 이레인은 떠날 수 없었다. 델피노처럼 배웅할 뿐이다.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면서 이레인이 덧붙인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여보.”
깜짝 놀란 동료들이 고개를 휙 돌렸다.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정신이 얼떨떨할 정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건 무슨 의미인가!”
델피노는 물론이고 어서 마계로 떠나기를 재촉하던 사나운 이빨마저 소리를 질렀다.
아이반은 헛기침을 하며 변명했다.
“원래 노르드 신화에서 광명신 발드르의 아내는 난나라고 식물의 여신인데…….”
말을 하던 아이반은 그게 도저히 변명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얼른 차원문을 넘었다. 그를 어이없이 바라보던 사나운 이빨과 달의 여신 셀룬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계로 향했다.
그렇게 또 다른 신화가 만들어졌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