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35
화아아- 델피노가 서둘러 아이반의 몸에 신성력을 불어넣었으나 이번 저주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스멀스멀 그의 몸에 파고들고 있었다.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생명의 구슬을 꺼내 가슴에 갖다 대고 나서야 몸이 회복되고 지독한 저주가 조금씩 밀려났다. 스스슥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갈라지고 누군가 앞으로 걸어왔다.
푸석푸석한 머리칼, 흐릿한 눈동자, 바짝 말라붙어서 생기가 하나도 없는 피부.
그가 입을 열었다.
“네놈이었구나. 생명의 구슬을 가로챈 녀석이. 이번에는 이쪽의 일까지 방해를 하려하다니, 실로 오만하고 불쾌한 자로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하나 없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아이반은 듣기 싫은 녀석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었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몸의 회복이 우선이다.
“그 몸도 언데드로 만든 인형이로군.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자신은 없었나?”
“아직은 아니다, 어리석은 자여.”
어리석기는 씨부럴. 시체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서 되게 무게를 잡네.
대가리를 깨버릴라.
아이반은 속으로 그렇게 욕설을 내뱉다가 힐끔 델피노를 보았다.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복잡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반은 곧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갑자기 사악한 기운이 나타나서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녀석의 여유가 그곳에서 오는 것 같았다.
” 델피노. 아무래도 마을 쪽으로 가야겠소. 저걸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다행이군요.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 짧은 사이 복잡한 감정을 다 털어버리고 무섭도록 무감정한 얼굴이 된 델피노가 단검을 꺼내들더니 자신의 팔뚝을 죽 그었다. 주르륵 왈칵 쏟아지는 뜨끈뜨끈한 핏물을 사방으로 뿌리면서 그가 말했다.
“다녀오십시오. 이쪽은 제가 막겠습니다.”
“가능하겠소?”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반드시.”
아이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를 믿고 마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화아악! 아이반의 등 뒤에서 막대한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어둠이 사라지고 낮이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밝은 빛이 나타났다.
곧이어 싸우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이반은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타다다닥! 빠르게 달려간 아이반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를 한 번에 훌쩍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악한 기운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데드의 썩은 핏물과 전혀 다른, 살아있는 생명의 신선한 피 냄새였다.
” 이 새끼들이.”
아이반이 마을 광장에서 본 것은 거대한 의식이었다. 사악한 악마를 이 땅으로 불러내는 지독한 행위.
약에 취한 사람들이 멍한 눈으로 흐느적거리며 서있었다.
누구는 빵을 만들다가, 누구는 바느질을 하다가, 누구는 가구를 만들다가 그렇게 변했다.
개중에는 분명 영주의 별장을 지키고 있었을 병사들의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던 그들이 단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제정신이 아닌 눈으로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질 때마다 중앙에 있는 불꽃에서 어두운 기운이 피어올랐다. 스스스슥! 사악한 불꽃에서 거대한 눈동자의 환영이 떠올라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시선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마주했던, 잊을 수 없는 존재의 것이었으니까.
죽음의 인도자. 파멸을 부르는 사악한 대악마.
휙! 그때 광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자신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으면서도, 심지어 이미 죽어 바닥에 쓰러졌던 자들 역시도. 사악한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어두운 불꽃을 둘러싸고 있던 흑마법사들이 아이반에게 손을 뻗었다. 쾅! 아이반이 땅을 박차고 올랐다. 우레와 폭풍을 타고 단번에 거리를 좁혀 사악한 불꽃으로 다가갔다.
파삭! 앞을 가로막는 방어막이 유리처럼 부서진다. 지독한 저주는 미처 그의 몸을 파고들지도 못하고 번개에 타버렸다. 쿵! 아이반이 바닥을 내리찍는 것과 동시에 흑마법사 하나의 몸을 꿰뚫었다.
창이 녀석의 몸을 관통하고 땅에 박혔다. 치지직! 화르륵! 이미 심장을 잃어버린 녀석의 몸을 번개가 후려치고 불꽃이 핥았다. 순식간에 한 녀석이 숯덩이가 되어 흩어지자 다른 녀석들이 검은 불꽃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녀석들의 몸으로 검은 불꽃이 옮겨 붙었다. ‘뭔 미친 짓이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흑마법사들의 덩치가 폭발적으로 커지는 것이 보였다. 인간의 몸을 버리고 악마의 화신체로 변하는 중이었다.
쿵! 단번에 변이를 마친 한 녀석이 발로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땅이 갈라지고 뼈다귀만 남은 시체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검은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사악한 기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었다.
“흐읍!”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아이반이 다급하게 허리를 비틀어 창을 찔러 넣었다. 폭풍이, 불꽃이, 번개가 그의 창을 따라 검붉은 화염을 꿰뚫었다.
욱신 분명 실체가 없을 화염을 찔렀음에도 묵직하게 밀려오는 충격.
아이반이 이를 악물고 힘을 더하자 검붉은 불꽃이 마침내 사라졌다.
쾅! 검붉은 불꽃이 피워 올린 사악한 마력이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퍼졌다. 그 충격에 아이반이 몇 걸음이나 뒤로 밀려났다.
“후우 .”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숨결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순식간에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아이반의 튼튼한 육신이 추위에 살이 아릴 정도였다. 단순한 온도 변화가 아니었다.
원혼이 뭉쳐 만들어진 심령의 냉기였다. – 아아아아아!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지고 아이반은 쿨럭 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알지 못할 고통과 슬픔, 절망과 분노가 그의 감정을 유린하려 했다.
화르륵! 그때 로키의 불꽃이 타올랐다. 사방에서 침투하는 저주와 악귀를 불태우고 시체를 장작으로 삼았다. 으슬으슬 춥기만 하던 몸이 다시 온기를 되찾고 굳어있던 몸이 풀어졌다. 그러나 아이반이 미처 무언가 하기도 전에 그의 옆구리를 무언가 후려쳤다.
퍽! 아이반의 몸이 멀찍이 날아갔다.
시체 골렘의 주먹이 무척이나 매서웠다.
녀석의 손이 아이반에게 닿는 것과 동시에 로키의 불꽃이 옮겨 붙었으나, 워낙 덩치가 큰 녀석이라 태우는데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비틀거리며 아이반이 일어서려는 것을 원혼들이 들러붙어 찍어 눌렀다. 실체화된 망령의 무게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화르륵! 다시 한 번 로키의 불꽃으로 망령을 불태우며 자리를 옮겼으나 온갖 언데드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자기 스스로 가슴에 칼을 꽂고 모두 죽어버린 사람들마저 언데드가 되어 일어나 아이반을 붙잡았다.
사방에서 적이 밀려온다. 그 압도적인 광경 속에서 아이반은 자신의 신들에게 기도했다.
오딘, 토르, 로키, 헤임달. 아무나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씨부럴 존재여. 나에게 힘을.
저 개자식들을 쳐죽일 강력한 힘을.
흐흐하하하하! 어디에서 웅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천상의 신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우웅- 속에서 폭발적인 힘이 솟아오른다. 오른손에 번개를 감고, 왼손에는 불꽃을 피웠으며, 다리에는 폭풍을 담았다. 쾅! 아이반을 둘러싸고 있던 언데드들이 단번에 사라졌다.
칼날 같은 바람에 잘게 조각났으며, 번개로 지져지고, 불꽃으로 타올랐다. 시체 골렘이 통째로 불타 사라지고 악령들이 흩어진다.
계속해서 시체들을 뱉어내던 구멍이 닫히고 주변이 일순간 조용하게 변했다.
변이한 흑마법사들, 악마의 화신들을 공격할 찬스였으나 아이반은 채 두 걸음을 떼지 못하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으윽!”
사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지나치게 강한 힘이 그의 몸속에 쏟아져서 터질 것만 같았다.생명의 구슬이 품고 있던 생명력을 다급하게 토해내지 않았다면 진작 몸이 터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신들은 아이반의 몸 상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가 요청했던 대로 힘을 건네줄 뿐이다. 그 강력한 힘에 아이반이 짓눌리고 있다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신들의 전사라면 그 정도 시련은 당연히 이겨내야지.
그 정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불렀단 말이야? 그런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드득 아이반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신과의 연결을 끊어냈다.
그 강력한 힘들을 밀어내니 그제야 호흡이 돌아왔다.
실로 위험한 순간.
그때 광명을 두르고 그들이 나타났다.
신전의 적, 신앙의 적들을 쳐부수는 교단의 정예.
성전기사단이 은빛 갑옷과 신성한 빛을 휘감고 적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순식간에 주변을 정리하며 아이반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오니 그들이 거친 숨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아이반 에시르손. 구원하겠습니다.”
“밖은 어떻소? 델피노 사제가 남아있었는데.”
“이미 정리되었습니다. 저 녀석들만 처리하면 되겠군요.”
척! 수십이나 되는 성전기사단이 동시에 칼을 들어 올리자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려왔다.
그 신성한 힘이 악마의 힘을 꿰뚫고 그들을 억눌렀다.
“상태가 좋지 않아보이시는군요. 쉬고 계시겠습니까? 나머지는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럴 수는 없지. 마무리까지 함께 하겠소.”
아이반은 다시 허리를 펴고 앞으로 나왔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천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신들에게 나약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창을 다시 쥐고 당당히 앞에 섰다.그동안 악마의 화신들은 처음 등장했던 위압감이 무색하게 연신 밀리고 있었다. 사악한 마력은 계속해서 줄어들고 폭력적인 기세가 꺾였다. 하긴, 사악한 놈들을 때려잡는 것에는 성전기사단만한 베테랑들도 없겠지.
한 번 신성력이 터져 나올 때마다 놈들의 몸이 뭉텅이로 떨어져나간다.
그러다 놈들이 거세게 반항할 것 같으면 성전기사단은 얼른 자리를 바꿔가며 상대했다.
기가 막힌 합격술. 얼마 전 아이반이 보았던 엘프들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엘프들이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성전기사단의 모습은 놀랍기만 했다.
이 모든 것이 지독한 훈련으로 이루어진 성과이리라. 푸슉! – 으아아아! 아이반은 악마의 화신 하나의 팔을 잘라내면서 흘깃 성전기사단을 살폈다. 하나하나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만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둘이 된다면, 셋이 된다면, 다섯이 되고 열이 된다면 어떨까? 그들은 여럿이 모일수록 강해졌다.
결코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입이다. 꽈악 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이반은 화풀이라도 하듯 악마의 화신에게 창을 박아 넣었다. 데구르르 마지막 악마의 화신마저 목이 잘리고 바닥을 굴렀다. 그것으로 전투는 완전히 종료되었다. 아무도 죽지 않고 적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대승이라 할 법도 하건만 누구도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그러기에는 주변이 너무나 처참했다.
마을 하나가 통째로 폐허가 되고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다. ‘씨벌, 피곤해서 뒈지겠군.’ 아이반은 그렇게 속으로 욕설을 뱉으면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던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정화되었다.
생명의 구슬이 지금도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데드가 신성한 불길에 불타고 남겨진 재가 가득한 들판.
델피노가 그곳에 홀로 서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었고, 팽팽하던 피부는 탄력을 잃고 주름을 만들었다.
다친 곳은 없었으나, 과연 이것을 멀쩡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지불한 대가가 결코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