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36
“안쪽도 정리가 되었나 보군요. 의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악한 마력이 퍼지는 것을 보긴 했습니다만.”
“글쎄, 중간에 창을 찔러 넣어서 방해를 하긴 했는데, 과연 막아냈는지는 모르겠소. 그러기에는 놈들이 마지막에 뿜어낸 마력이 너무나 불길하군.”
“그렇습니까? 고생하셨습니다.”
“그 녀석은? 본체로 보이는 녀석이 안쪽에 없던데 도망갔소?”
“예. 잡지 못했습니다. 녀석이 인형으로 쓰던 몸은 되찾았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델피노의 손에는 낡은 목걸이가 들려있었다. 델피노의 목에 걸려있는 것과 아주 닮은, 그러나 훨씬 오래되고 상처 많은 봉성의 목걸이. 그는 그것을 품에 챙기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실종자가 하나 줄었군요.”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그래, 이것 역시 흔한 일이었다.
아이반은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방 침대에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이곳에 있으니 영 어색해서 침대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신전에서 잠들어보기는 처음이군.’ 신전의 방은 좁았지만 정갈했다.
딱 필요한 가구만 최소한으로 놓여있는 것이 마치 사제들의 금욕적인 삶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 하나하나 기름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힘겨운 싸움을 하고 나면 반드시 재정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장비를 손질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의 방문 앞까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이라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반이 손질하던 장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모습을 그가 보았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온갖 장비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집어넣기를 반복하는 아이반의 스타일 때문에 제대로 된 전투를 하면 들킬 수밖에 없었다.
“어서 오시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보군.”
“쉬고 계신데 혹시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칼이나 닦고 있던 참이었소.”
“그러면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델피노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아이반은 주전자와 찻잔을 꺼냈다. 그리고 마력을 움직여 불꽃을 피우고 그 위에 주전자를 둥실둥실 띄웠다. 요즘 아이반이 하고 있는 마력변환 연습이었다. 불을 피우는 것과 주전자를 허공에 띄우는 것을 동시에 유지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적당히 화력을 조절해야할 뿐만 아니라 흔들려서 물이 넘치지 않게 신경써야했기 때문이다.
쪼르르르
“맛은 어떨지 모르겠소. 차는 신전에 있던 것을 썼지만 내 실력이 그리 좋지 못해서.”
“괜찮습니다. 차는 본디 향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차가 맛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아이반은 겉으로 표가 나지 않게 시무룩한 마음으로 차를 들이켰다.
어찌된 일인지 더럽게 썼다.
한 모금 맛을 본 차를 멀찍이 옆으로 밀어 놓으면서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 밤에 무슨 일이시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내일 아침에 대신전으로 떠나야할 것 같아 이렇게 미리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델피노는 홀로 적을 막으면서 무리를 했다.
그로 인해 정신과 육체, 영혼이 상처를 입었고, 그것은 단순히 신성력을 쏟아 붓는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한적한 신전이나 수도원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양에 집중해야겠지.
그러고도 그가 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을 수는 없겠지만.
“마지막까지 보고 싶을 텐데, 이렇게 떠나게 되니 아쉽겠소.”
“그건 저에게 주어진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도 .”
“매일같이 밖으로만 나다녔으니 돌아갈 때가 되기는 했죠. 그동안 바깥물이 많이 들었으니 기도실에 앉아서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신앙을 새로 닦아야죠.”
그는 너털웃음으로 덧붙였다.
“허허, 계속 놀러 다니다가 앞으로 신전에 붙어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몸이 근질거립니다. 고행의 시작이로군요.”
과연 누가 그에게 놀러 다녔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가장 힘든 곳에서 고생하다 회복을 위해 돌아가는 것을 그는 오히려 고행이라 표현했다.
실로 강인한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 척을 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정말로 좋은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는 아이반이 아주 드물게 경험한 좋은 사람이었다.
“이제 이곳에 더 많은 교단의 식구들이 올 것입니다. 부디 그들이 무사히 임무를 수행했으면 좋겠군요.”
이곳에 악마숭배자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마약을 유통시킨 것조차 사악한 의식을 위한 제물 만들기였다는 것도 밝혀졌고.
이제 어둠속에서 움직이던 구마사제는 뒤로 물러나고 성전기사단이 활약할 차례였다. 영주와의 연결고리도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니 더욱 활발하게 움직일 수가 있겠지.
결코 좋아해서는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사실 한 발 물러나서 교단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신앙의 불모지에 단단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
명분은 충분했다.
악마숭배자들이 사악한 음모를 꾸몄다는 명백한 증거에, 영주와의 연결고리가 의심스러우니 다른 영주들까지도 압박할 수가 있고, 심지어 지역 주민의 환영까지 받을 테니.
아마 이 땅을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성황청의 다른 교단들까지 하나씩 숟가락을 얹게 될 터였다. 동쪽에서 발생한 전쟁과 남부의 혼란으로 아무리 인력이 부족하다해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사정이야 어쨌든 동료들을 걱정하는 델피노의 순수한 마음에는 아이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될 것이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탁 잠시 동료들을 위해 기도를 올린 델피노는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이것은 약속한 보수입니다.”
“처음 계약보다 조금 더 묵직한 것 같은데?”
“그만큼 고생을 하셨으니 당연합니다. 노력에는 정당한 보상이 따라야죠.”
아이반은 거절하지 않고 주머니를 챙겼다. 운동선수에게 몸값이 자존심이듯 용병에게도 몸값은 자존심이었다.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 때문에 한 푼도 깎을 수가 없다는 독기였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 값을 낮추는 일이었으니까.
아룬 교단은 부유한 편이니 조금 더 챙긴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도 받아주십시오.”
델피노는 추가로 작은 단검을 내밀었다.
겨우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으나 화려한 세공이 되어 있는 은도금 단검이었다. 이것만 해도 아이반이 받았던 의뢰비 이상의 가치가 충분히 있을 터였다.
“이건 무엇이오?”
“계약을 넘어 교단의 은인에게 주는 징표입니다.”
아룬 교단에 큰 기여를 한 외부인에게 주는 선물.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심신이 맑아지고 사악한 마귀와 악령들을 쫓아낼 수가 있다고 했다.
“대신전에서 일 년 동안 축복한 단검입니다. 대륙 어디를 가든 아룬 교단의 식구에게 그 단검을 보여준다면 호의적으로 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슬쩍 웃으면서 덧붙였다.
“조금 더 현실적인 혜택을 말하자면 교단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을 할인 해드립니다. 아룬 교단은 대륙 곳곳에 퍼져있으니 꽤나 유용하겠죠.”
교단에서 판매하는 것은 단순히 성수만이 아니었다.
교단이 직접 생산한 물건뿐만 아니라 신도들이 생산한 물품 역시 일부 교단의 이름으로 보증하여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할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마 교단의 은인에게 주는 징표라는데 찔끔 내리지는 않겠지.
아이반이 단검을 받아들자 뭔가 청명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귀한 선물이오.”
“하하, 사실 내일 성전기사들이 드릴 예정이었는데 제가 하겠다고 우겨서 가져왔습니다. 좋아해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그러고 델피노는 무심코 차를 마셨다가 흠칫 놀라 입을 뗐다.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델피노가 찻잔을 멀리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반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자신이 대접한 차를 그가 마시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용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 본론이 남아있었다.
“밤에 나를 찾아온 이유가 이것 때문인 것 같지는 않군. 괜찮으니 편히 말씀해보시오.”
인사야 아침에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상을 건네주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럼에도 그가 굳이 밤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아이반이 빤히 바라보자 델피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노르드의 신들께서 당신에게 참으로 무거운 사랑을 내려주셨더군요.”
“뭐, 그렇지. 감당하기 버거운 관심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