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38
치지직! 힘을 더 빌려줄까 놀리듯 눈앞을 스치는 번개를 억누르고 몸 안에 차오르는 신의 힘을 다시 밀어냈다. 충만하게 몸속을 채우던 천둥신의 힘이 사라지고, 대신 본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야기를 하자고 했소? 그러면 팔다리는 필요가 없겠군.”
“자, 잠깐! 잠깐만 멈추 .”
“창에는 귀가 없소, 전사.”
카악, 퉤! 바닥에 침을 뱉은 아이반이 삐딱한 표정으로 전사의 몸을 깔고 앉았다. 제대로 제압이 된 상태로 바닥에 억눌러진 남자의 입에서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이야기를 할 자세가 되었군. 왜 나를 찾아온 거요?”
아이반의 질문에 남자가 신음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으윽! 에시르손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것을 확인하러 왔소.”
아이반은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그래서 왜 나를 찾아왔느냐, 에시르손이라는 것을 확인해서 어쩌려는 것이냐. 남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쉽게 말하지 않겠다는 의미.
그러나 아이반이 창을 들어 올리자 얼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생긴 것은 용암으로 샤워를 해도 뜨끈뜨끈하다고 떠들어댈 것처럼 마초적으로 생겼으면서 태세변환은 더럽게 빠르군. 아주 마음에 들어.
“나는 수백 년만에 나타난 에시르손을 확인해야만 했소! 그게 나에게 주어진 일이니까!”
에시르손.
신들의 피가 흐르는 고귀한 혈통, 그중에서도 신들의 인정을 받은 위대한 전사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
아사 신족의 아들, 위대한 신의 전사.
그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그대 말대로 수백 년은 지난 일이오. 그런 낡은 이름에 집착할 이유가 있나?”
낡은 이름.
그 말에 남자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제압당한 상태라는 것도 잊고서 분노를 토해내었다.
“낡은 이름이라! 어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고귀한 혈통의 이름이자 위대한 전사의 증거이거늘!”
그는 진심으로 그것이 분한 듯 씩씩거리면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이반이 낡은 이름이라 말했던 에시르손이 그에게만은 소중한 의미가 있었나 보다.
‘이해할 수가 없군.’ 아이반이 노르드인을 처음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던가.
자신이 아이반 에시르손이라고 소개를 했을 때도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묘한 미소를 짓거나 오랜만에 듣는다며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럴 자격이 있냐며 비아냥거리거나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비를 걸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에시르손이라는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가 아는 노르드인들은 아무도 그렇지 않던데. 그대만이 에시르손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군. 단순히 흥미만은 아니야. 사라진 지 수백 년도 더 지난 옛 영광의 이름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아이반이 그를 깔고 있던 자세를 벗어나 한 걸음 물러서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에서는 고통이 느껴졌고 옷가지는 흙먼지로 더럽혀졌으나, 눈빛만큼은 살아있었다.
“나는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의 아들이자 오래전 위대한 전사들에게 무기를 건네주었던 자의 후손이오.”
그 말에 아이반은 피알라르의 손을 흘깃 보았다. 확실히 무기를 들고 생긴 것과는 다른 형태의 흔적이 새겨져있었다.
그는 그저 전사일 뿐만 아니라 무기를 만드는 자이기도 했다.
대장장이가 전사를 겸하는 것은 놀랍지 않았다. 원래 노르드에서는 성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무기를 가져야한다고 여길 정도로 전투적이었다.
“그래, 피알라르. 그뷔드뮌드의 아들. 당신은 어떻게 에시르손을 확인하려 했소? 그렇게 확인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소?”
피알라르는 어떻게 확인하려 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그저 목적만을 읊어놓았다.
“진정한 영웅에게 내가 만든 검을 바치려했소. 그게 선대의 임무였고, 나의 목표니까.”
그는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이 빌어먹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 같은 것이라 해도.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장인을 칭송하지 않소. 가장 훌륭한 영웅의 무구를 만든 자를 칭송하지.”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돌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자신이 만든 무구를 사용해줄 진정한 영웅을 찾기 위해.
“글쎄, 영웅이 과연 그대의 무기를 써줄까? 그만한 실력이 그대에게 있다는 소리요?”
아이반의 물음에 피알라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당신이 쓰던 싸구려 무기들보다는 괜찮겠지. 당신이 들고 있는 창은 훌륭한 녀석이지만 나머지는 형편없소.”
그 말에 아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몇몇 개는 나름 실력이 좋다는 장인에게 구입한 것인데 .’ 히드라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어 주었던 그 장인에게서 구한 것들도 있었다. 그걸 모두 싸구려라고 딱 잘라 말하니 괜히 불쾌해졌다. 더럽게 비싸게 주고 샀었는데.
“으흠 .”
피알라르는 통증으로 욱신거리는 몸이 영 신경 쓰이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병에 찰랑이는 황금색 액체.
뚜껑을 여니 상큼하고 달콤한 사과향이 가득 퍼졌다. 피알라르가 그걸 들이키자 그의 몸에 생겨났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일종의 회복 포션인 셈이다.
“이둔의 황금사과를 갈아 만든 회복약이군. 맛이 좋은 대신 더럽게 비싸서 웬만해서는 구할 수가 없는데 .”
아이반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피알라르가 황금사과주스를 하나 더 꺼내 그에게 던졌다. 휙
“그쪽도 하나 드시든가.”
아이반은 잠시 고민하다가 받아든 황금사과주스를 쭉 들이켰다.
독이 든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괜히 배포가 작은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꿀꺽 한 모금 넘기는데 입안에 화려한 맛이 번졌다. 과연 이둔의 신성력으로 키운 황금사과.
일반적인 과일을 뛰어넘는 달콤함과 상큼함이다. 솔직히 그가 평생 먹어왔던 사과주스보다 훨씬 맛있었다.
“무기가 잘 팔리는 모양이오. 이런 것을 몇 병씩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누가 만든 무기인데,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나의 이름을 역사에 남겨줄 영웅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일이오.”
그는 무척이나 자부심이 넘쳤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내 창에 그런 흔적을 남기다니, 저 무기도 평범한 수준은 아니라는 뜻이군.’ 아이반이 그렇게 자신의 창을 바라보고 있으니 피알라르가 입을 열었다.
“패배한 자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아직 당신이 영웅의 이름에 어울리는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건 함부로 내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에시르손은 노르드 전사 중 최고를 논할 만한 자가 아니면 짊어질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아니, 그들조차 부담스러워서 수백 년을 내려놓았던 이름이었다. 적어도 피알라르가 보기에 아이반은 그 자격이 부족했다.
“하지만 싹이라면 보이는군. 따라오시오. 당신의 창에 생긴 흉터는 지워야하지 않겠소?”
아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알라르의 뒤를 따랐다. 그는 손에 든 유리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스가르드에도 괜찮은 신이 있군.’피알라르는 과격해 보이는 첫인상에 비해 꽤나 신사적인 남자였다. 비록 목소리가 걸걸하고 무척이나 시끄러웠지만. 그는 길을 걸으면서 몇 번이나 강조했다.
“다시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대와 싸우고 싶은 생각이 없었소.”
“그리 거친 기세로 다가와 놓고?”
” 뭐, 다소 오해의 소지는 있었지.”
피알라르는 그래도 제대로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먼저 칼부터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작게 투덜거리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신은 그 누구보다 노르드의 전사다운 사내로군.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노르드의 정신을 잃어버렸소. 그래서 진정한 영웅이 나타나지 않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야.”
“나는 딱히 노르드의 전사답게 행동하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그게 생각해서 되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지. 그게 맞는 건데.”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는 전사가 되기보다는 모략꾼이 되려는 자들이 대부분이오. 그게 대륙의 놈들이 말하는 소위 ‘문명화’가 된 결과인 셈이지.”
대륙인들은 노르드의 사람들을 무식하고 폭력적인 야만인이라 여기지만 과연 그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앞에서 칼을 휘두르지 않고 뒤에서 휘두르는 것이 더욱 ‘문명화’가 된 일인가.
피알라르는 그것에 대해 말을 늘어놓으며 짙은 경멸과 분노를 섞었다. 노르드인이 아닌 자들, 그들이 대륙인이라 부르는 존재에게 꽤나 시달림을 받았던 모양이다.
인종차별, 종족차별, 남녀차별, 신분차별, 빈부차별.
이전 세계에 비해 이 빌어먹을 땅에서는 그런 차별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인권이란 개념은 학자들이나 떠드는 이상적인 단어였고, 현실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자신과 다른 자들을 차별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게 익숙한 세상이었다. 아이반 역시 어느 정도 힘과 명성을 쌓기 전에는 아주 지독한 대접을 받았고, 지금도 은연중에 그를 깔보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비록 그의 칼이 무서워서 대놓고 말은 못해도. 고생했던 지난 세월을 떠올려보던 아이반은 속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노르드인들도 마찬가지지.’ 노르드인이라고 그를 반갑게 맞이했던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도끼를 휘두르나, 뒤에서 칼로 찌르나 결국 당하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감성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나면 그놈이 그놈이었다. 노르드인들의 가장 큰 돈벌이가 노략질이었다.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곳에서 용병질이지.
사실 몇몇 신뢰할 만한 용병들을 제외하면 용병질이라고 해도 결국 노략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소위 문명화가 되었다는 대륙의 귀족들조차 승자의 권리라면서 당당하게 강간, 약탈, 방화를 하는 시대였으니.
‘갑자기 델피노가 그립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몇 안 되는 인격자였는데.’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짐짓 피알라르에게 공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명인들은 예의 없는 말을 해도 머리가 쪼개지지 않기 때문에 야만인보다 더 무례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