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39
옛날, 어디선가 봤던 말을 늘어놓으니 피알라르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하하! 바로 그거요! 그 말이 정말로 옳다니까!”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도착한 곳은 근처에 위치한 소도시였다. 나지막한 성벽에 한껏 풀어져서 하품을 쩍 내뱉고 있는 병사들.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훑고만 지나가는 출입심사.
어떻게 보면 나태하고, 어떻게 보면 평화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로만왕국의 동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린스킨과의 전쟁이나 근처에서 발생한 악마숭배자들의 음모 역시 아직 이곳에는 여파가 닿지 않은 모양이다.
“무기는 그게 전부요?”
“뭐, 더 있어야 하나?”
“그건 아니지. 이쪽은 좀 눈에 익은 것 같은데 . 흠, 통과!”
무장을 마친 근육질 덩치 둘이 같이 도시로 들어가려 하니 잠깐 의심스러운 시선을 주었지만 병사는 결국 통과를 외쳤다. 괜히 여기서 잡아봐야 귀찮기만 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피알라르는 성벽에 붙어있는 어느 집으로 안내했다.
내부에는 가구가 별로 없이 싸늘했지만 한쪽에 딸려있는 작업실에는 이런저런 쇳조각들이 가득했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소?”
“지금은. 곧 떠날 거요. 이 근처는 다 훑어서 썩 매력적이지 않아졌거든.”
“매력적이지 않다?”
“영웅의 씨앗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요. 나는 내 무기를 사용할 사람을 찾고 있으니까.”
화르륵! 화로에 불을 지핀 피알라르가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충 앉으시오. 창을 손질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건네주자 피알라르 역시 자신의 아공간 상자에서 도구를 꺼내 창을 다듬기 시작했다.
꽤나 겉이 낡아있는 것을 보니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물건인 듯 했다.
아이반이 그걸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피알라르가 마치 뽐내듯 말했다.
“대대로 우리 집안에서 사용하던 것이오. 이 마법의 상자 같은 경우는 이 땅으로 넘어오기 전부터 쓰던 녀석이지.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직계 혈통이 아니면 다른 이들은 열 수가 없소. 많은 어리석은 이들이 시도를 했다가 목숨을 잃었지. 그런 마법이 걸려있거든.”
“꽤나 강력한 마법인가보군. 그리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뭐, 옛 난쟁이들의 솜씨지. 지금 저기 산맥 속에 파묻혀있는 드워프가 아니라 그 난쟁이 말이오.”
신화 속에서 가끔 신들도 엿 먹였다는 난쟁이의 솜씨라면 그리 자신만만할 법도 했다.
보통의 인간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아이반은 굳이 자신의 힘을 시험해보고 싶지 않았다.슥, 슥! 피알라르는 창을 손질하면서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장비는 형편없으면서 이 창만큼은 정말로 좋군. 살아있는 녀석이오. 아주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 혹시 이것도 옛 난쟁이가 만든 물건이오?”
“글쎄, 잘 모르겠소. 내가 아는 건 그 창의 이름이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라는 것밖에는 없소.”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이라, 아주 묘한 이름이군. 이 녀석에게 무슨 사연이 있을지 궁금한데.”
그는 창에 새겨져있는 룬문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름에는 힘이 담겨져 있소. 옛 난쟁이들의 물건이라면 더욱 그러하고. 이 창이 그대를 어디로 이끌지 궁금하군.”
그 말에 아이반은 그저 쓴 웃음을 지었다.
듣고 보니 자신의 처지와 무척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창은 과연 길을 잃은 대전사에게 길을 찾아주는 녀석일까, 아니면 길을 잃게 만드는 녀석일까.
“손질은 끝났소. 별거 아니지만 이전보다는 나을 거요.”
창을 건네받자마자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잠깐 날을 갈고, 흠집을 지운 뒤에 무언가를 발랐을 뿐인데 왠지 손에 착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전보다 손에 더 잘 맞는 것 같았다. 창의 움직임도 뭔가 더 호쾌해진 듯했다. 창이 품고 있는 힘의 변화는 전혀 없었지만 손맛이 달랐다. 쉬이익! 팡!
“잠깐 손을 대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달라진다고?”
아이반이 놀라서 눈썹을 위로 올리자 피알라르가 껄껄 웃었다.
“그게 제대로 된 장인의 솜씨지. 이전의 창은 당신에게 맞춰진 물건이 아니었으니 아주 약간만 바꾸는 것만으로도 훨씬 낫다고 느끼는 거요. 수준 높은 전사들은 민감한 법이니까.”
“잠깐 손댄 창이 이 정도면 당신의 무기는 어느 정도일지 몹시 탐나는군.”
“미안하지만 무기는 줄 수가 없소. 내가 팔아봐야 그 창이 있는 이상 당신에게는 부무장밖에는 안되니까.”
“이 창보다 좋은 물건은 없는 모양이오?”
“글쎄, 있다면 그건 진정한 영웅에게 갈 물건이겠지. 언젠가 당신이 노르드의 모두에게 진정한 에시르손으로 인정받는다면 그때 기꺼이 무기를 바치겠소. 그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니까.”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아이반은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지금 내 방어구가 마땅치 않소. 괜찮은 방어구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소? 당신이 팔지 않는다면 다른 괜찮은 자라도 소개를 해주시오.”
그 말에 피알라르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구는 내 전문이 아니지만 그 정도는 해줄 수가 있지. 대신 그대가 재료를 가져와야 할 거요. 훌륭한 재료가 아니라면 결과도 훌륭하게 나오지는 않겠지.”
실력 있는 장인인 만큼 피알라르의 기준은 상당히 까다로울 터였다. 그가 훌륭한 재료라고 표현할 정도면 결코 개나 소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하지만 아이반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걱정 마시오. 귀한 놈으로 가져오지.”
“그, 이쪽으로 가면 정말로 뭐가 나오는 거요?”
피알라르가 의심스럽다는 듯 그렇게 묻자 아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그렇게 떠들어댈 거면 그냥 돌아가시오. 지금도 억지로 끼워준 것이니까.”
“아니, 당신이 그리도 귀한 재료라고 자신만만하니 뭔가 좀 의심스러워서 그렇지.”
“닥치고 따라오시오. 예민한 놈이라 계속 떠들어대면 근처에 코빼기도 안 보일 거요.”
피알라르에게 강하게 경고를 한 아이반이 허리를 숙이고 바닥을 살폈다. 은신에 용한 놈은 아니었다.
분명 찾다보면 흔적이 있기는 할 거다.
아이반은 그렇게 삼 일 동안 말 한마디 뱉지 않고 돌아다닌 끝에 겨우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커다란 짐승의 발자국, 부러진 나무, 그곳에 끼어있는 황금색 털.
“황금색 털? 도대체 뭘 추적하고 있는 거요?”
“황금 멧돼지.”
“뭐? 굴린부르스티? 그게 이곳에 있다고?”
굴린부르스티는 아스가르드의 신, 프레이가 타고 다니는 황금색의 멧돼지였다. 물속이든 하늘이든 그 무엇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신화속의 영물.
당연히 아이반이 노리는 것은 그런 놈이 아니었다.
“미쳤소? 내가 그런 놈을 어떻게 잡아? 내가 노리는 놈은 그저 황금색 털을 가진 멧돼지요. 튼튼한 가죽을 지녔지만 굴린부르스티와 비교될 만한 놈은 아니지.”
정체야 어쨌든 녀석의 가죽은 방어구로서는 무척이나 훌륭한 재료였다. 물론 사냥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이쪽으로 가봐야겠소. 이제 슬슬 녀석의 영역을 찾은 것 같으니.”
찾은 단서를 토대로 점점 범위를 좁혀간다.
중간에 겁 없는 몬스터들이 공격을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둘 다 숙련된 전사들이라 어렵지 않게 때려눕히면서 더욱 안쪽으로 들어갔다.
추적이 쉽지는 않았다. 원래 야생동물들은 생각보다 훨씬 활동 범위가 넓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금 멧돼지는 그 털빛만큼은 신화와 연결되어 있는 영물이었고.
“이쯤 되면 모습이 보일 법도 한데 더럽게 비싸게 구는군.”
“실제로 비싼 놈이잖소? 귀한 놈이니 찾는 게 어려울 수밖에.”
아이반은 녀석이 한 바가지 질펀하게 싸놓은 변을 나뭇가지로 찔러보았다.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고 수분이 남아있었다. 녀석의 흔적이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점점 흔적이 잦아지고 있었다. 이 근처에 녀석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쁘지 않군. 좀 고생하기는 해도 잘 찾아가고 있 .”
말을 하던 아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저 앞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보지 못하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짐승은 아니었다.
이족보행을 하는, 지성을 가진 자들이다.
풀이 눌린 자국을 따라가다 마침내 흐릿한 발자국 하나를 발견한 아이반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피알라르가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시오?”
“이 발자국. 신발이 좀 익숙해서. 이런 무늬가 나타나는 것은 보통 오크들의 발자국인데 .”
오크들이 이곳에 나타났다? 원래 이곳에 살던 놈들인가?
“혹시 이 근처에 오크부족이 있다는 소리 들어보신 적 있으시오?”
“흠, 나도 이 지역 출신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
피의 동맹에 합류하지 않은 독립 오크 부족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 놈들이었으면 좋겠지만 영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 그 동굴 쪽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빠르게 주변을 좀 확인해보고 갈 테니까.”
아이반은 그렇게 말하고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레인저와 암살자의 기술이 합쳐지니 숲을 달리는데도 크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동안 연습을 한 보람이 있었다. ‘흔적만 보면 열 명이 안 되는데, 혹시 한 무리만 있는 게 아닌가?’ 빠르게 움직이던 아이반이 문득 허리를 낮췄다. 멀리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