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4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던 명대사 한 구절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반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김첨지가 된 것만 같았다. 가정폭력범, 츤데레의 원조, 고등학생의 적. 아이반이 알 수 없는 말을 낮게 중얼거리자 파티원들이 모두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임무 중에 갑자기 이상행동을 하는 파티원은 언제나 경계대상인 법이다.
“느낌이 좋지 않소. 빨리 이상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거나, 포기하고 서둘러서 숲을 빠져나가야만 하오.”
그 말을 들은 다른 파티원들은 영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의뢰비로 큰돈을 받고 움직이는 처지인데 시작하자마자 불길한 소리를 내뱉는 동료라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쪽에서 히드라를 잡은 전사라고 하기에 대단하게 여겼더니, 겁이 많으시군.”
“언제는 위험하지 않은 의뢰가 있었나? 황금을 만지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지.”
“이제 막 숲에 들어왔는데요. 원인을 확인하지 않고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한 마디씩 내뱉는데,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영 곱지 않았다. 사람이 다섯 명이나 모이면, 반드시 한 명은 쓰레기가 있지.
아이반이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명언.
이번에는 청색 마탑의 마법사 에민이 그 역할을 맡을 줄 알았는데 다른 이들의 눈빛을 보니 아이반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젠장, 재수 옴 붙었군.’ 더 말을 할수록 분위기가 악화될 것 같아 입을 다물려고 하는데, 길잡이 스벤이 그의 편을 들었다. 아무래도 레인저들이나 사용할 법한 복잡한 수신호방법을 익히고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대단히 신기하게 여겨진 모양이다.
“잠깐,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거요. 보아하니 레인저 교육도 받으신 것 같던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
숲에서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 반드시 보고하는 것이 레인저들의 규칙.
한때 레인저였던 스벤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다른 이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숲의 전문가가 그리 말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이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퀘스트가 발생했으니 틀림없이 위험한 이벤트가 있을 거라고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으니까.
” 의뢰받은 내용은 숲의 몬스터들이 포악하게 변했으니 살펴보라는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숲으로 들어왔지.”
“다 아는 이야기군.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상하지 않소? 꽤 깊숙이 들어왔는데 이때까지 만난 몬스터가 겨우 칼날뿔멧돼지 두 마리 뿐이었다는 것이?”
“그거야 모두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최대한 피해갔으니 .”
아이반은 대답 대신 길잡이인 스벤을 보았다. 그라면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을 거다.
” 저 말이 맞아. 숲이 너무 조용해.”
“뭐? 스벤! 그게 무슨 뜻이야?”
“최대한 전투를 피해서 움직인 것은 맞아. 내가 그렇게 인도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흔적이 적어.”
아이반이 냉큼 끼어들었다.
“그동안 발견한 흔적은 죄다 며칠이 지난 것들뿐. 몬스터들이 포악해졌다면 당연히 있어야할 흔적들이 보이지 않았소. 오히려 이 근방의 몬스터들이 줄어버린 것 같은데 .”
저 말이 맞냐는 듯 사람들이 바라보자 스벤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지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 당신, 정말 제대로 레인저 교육을 받았군?”
“살려고 이것저것 배우다보니. 어디서 자랑할 수준은 아니오.”
거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다른 이들도 모두 알아들었다.
” 젠장. 놈들이 뭉치고 있군. 몬스터 웨이브인가?”
“호수 근처에서 몬스터 리더라도 태어났나?”
몬스터는 하나의 종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종이 모여서 사이좋게 하하호호 하고 있을 리 만무.
그런 놈들이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은 치열한 약육강식의 사투 끝에 일대에 강력한 지배력을 가진 몬스터 리더가 태어났다는 의미였다. 이번 의뢰주는 청색 마탑.
사람들의 시선이 에민에게 향했다. 이번 이상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청색 마탑에서 나왔으니 그가 결정하라는 뜻이다. 잠시 고민하던 에민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몬스터 리더가 나타났다는 증거라도 확인해야만 해요.”
아직은 모든 것이 추측일 뿐. 에민의 말은 옳았다. 돈을 받아먹었으면 그만한 값을 해야만 했다.
마탑은 호구가 아니었다.
의뢰금이 후한 만큼 철저하게 계약을 진행했다.
임무에 실패하는 것은 용납할 수 있어도,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면 서둘러야겠군. 만약 정말로 몬스터 리더라면 숲에 머물수록 위험해지는 것이니.”
그들은 해가 지기 직전까지 숲을 휘젓고 다녔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몬스터들은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몬스터와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순수하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타닥타닥. 화르륵! 모닥불이 조용히 타오른다. 아이반과 일행은 그것을 바라보며 각자 육포를 입에 쑤셔 넣었다. 싸구려 육포 특유의 거칠고 뻑뻑한 맛을 억지로 참으며 질겅질겅 씹었다. 하나를 삼키려면 한참이나 턱을 움직여야만 했다.
향신료도 적당히 써서 맛도 있고 부드럽게 만든 고급 육포라면 환장하며 먹겠지만 그런 사치를 부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젠장, 뜨끈한 국물이라도 한 숟가락쯤 먹었으면 좋으련만 .”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싸구려 육포를 씹고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중간에 그럴 듯한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다. 입구를 돌과 흙, 나뭇가지 등으로 막으면 안쪽에서 불을 피워도 밖으로 불빛이 흘러나가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작 불을 피워놓고도 그걸 요리에 쓸 수는 없었다. 숲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시각이 아니라 후각이었다. 음식 냄새가 사방으로 퍼질 테니 육포를 데워먹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꽤나 숲속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 망할, 이제는 나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겠군. 숲이 이렇게 조용했던가?”
검방 전사, 랄프가 바깥을 노려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늑대새끼 우는 소리 하나도 들리지가 않아.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걸 이제부터 우리가 알아봐야겠지. 불침번은 어떻게 하시겠소?”
“마법사 양반은 빼고 나머지가 두 시간씩 하면 되겠군.”
제비뽑기로 정해진 순서는 랄프, 율리아, 아이반, 스벤.
영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이반은 침낭에 몸을 집어넣고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빠르게 잠을 잘 수가 있다는 것은 중요했다.
그래야 체력을 유지할 수가 있으니까.
아이반은 귀중한 스킬 포인트 몇 개를 수면에 투자한 상태였다. 언뜻 멍청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웬만한 공격 스킬 하나보다 그의 목숨을 더 많이 살려주었다. 빠르게 네 시간이 지나고, 아이반은 번뜩 눈을 떴다.
율리아가 그를 흔들어 깨우기 직전이었다.
“일어났소.”
” 예민하군. 별다른 이상은 없다. 숲은 조용해. 그걸 좋아해야할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좋아해야지. 자고 있다가 칼 맞고 일어나지는 않았으니.”
아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장비를 확인하는데, 어째 율리아가 자러가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완전히 교대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정석적인 불침번 방법이지만 용병들이 그렇게 빡빡하게 행동할 리가 없었고, 대부분은 눈을 뜬 것을 확인하자마자 휙 자러가기 마련이다.
무언가 그에게 할 말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이반이 지긋이 바라보자 율리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했다. 그대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어.”
난 또 뭐라고. 갑자기 사랑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아이반은 묘한 실망감을 느끼면서 대꾸했다.
“별 일 아니군. 나는 벌써 잊었소.”
“간단하게라도 사과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신다면 얼른 자시오. 그래야 내일 잘 싸우지.”
” 그래.”
율리아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홀로 남은 아이반은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전과 똑같은 풍경, 이전과 똑같은 고요함. 나뭇가지가 부딪히고 잎사귀가 비벼지는 소리는 여전히 요란했지만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숲의 풍경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숲?’ 호숫가에서 생긴 마력반응.
청색 마탑의 의뢰, 숲속 몬스터들의 이상행동.
마력반응을 확인한 청색 마탑은 인위적인 일이 아닌지 의심했다.
메인 스토리와 연결되어 있는 퀘스트,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 숲, 숲속 몬스터들의 움직임.
아이반의 머릿속에서 착착 퍼즐이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언데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이반이 바깥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숲은 고요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곳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킁킁 코끝으로 죽음의 냄새가 스쳐지나간다. 아이반은 서둘러 일행을 깨우기 시작했다.
비몽사몽 눈을 뜬 용병들은 눈을 한번 비비고 나니 다들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 무슨 일이오?”
“숲이 조용하던 이유가 있었소. 언데드요.”
“뭐? 언데드?”
“자세한 것은 나중에 저쪽 마법사에게 들으시고, 얼른 짐을 챙기시오. 서둘러 자리를 옮겨야하오.”
언데드는 자신이 잃어버린 생명에 엄청난 집착과 증오를 보인다.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피를 다시 데우기 위해 살아있는 자들의 피를 끊임없이 탐하는 끔찍한 존재들.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언데드들이 금방 찾아내고 말거다. 언데드의 수가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포위당하는 순간 끝난다.
” 젠장, 얄궂군.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반은 자신의 검을 뽑아들고, 다른 한 손에 투척용 도끼를 쥐었다. 스스슥! 스스스스슥! 썩다만 살점, 부러진 뼈와 멈춰진 심장.
움직여서는 안 되는 자들이 움직인다. 생명대신 죽음으로 채워진 부정한 존재들. 끼기기긱! 이미 생명을 잃어 뿌옇게 변한 눈동자가 기어이 아이반을 찾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