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41
“굳이 그럴 필요가 있소? 이들이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었다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지. 그럼에도 나는 이리 해야만 하오.”
계속해서 위험을 회피하기만 해서는 결국 다가올 더 큰 위험에 잡아먹힐 것이다. 운명의 주박은 퀘스트란 이름으로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살아남아 영웅이 되거나, 실패해서 망자가 되거나. 아이반이 원치 않은 선택지가 그의 눈앞에 드리워졌지만 그는 영웅을 탐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뿐이다. 속사정이야 어쨌든 그런 아이반의 모습은 꽤나 영웅적으로 보였다. 그게 피알라르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는 챙기고 있던 짐들을 다시 풀어놓았다.
마법의 상자에서 도구를 꺼내 늘어놓고는 차갑게 식어있던 화로에 불을 붙였다.
” 사흘. 그 안에 황금멧돼지의 가죽으로 당신의 방어구를 만들어 드리겠소. 그 뒤에 나는 미련 없이 떠날 거요.”
갓 잡은 짐승의 가죽으로 방어구를 만드는데 사흘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말리고, 다듬고, 자르고, 손질하고.
그 과정들을 생각하면 일반적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그러나 옛 난쟁이들의 마법 같은 기술을 일부나마 전승하고 있는 피알라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고맙소.”
“약속을 지킬 뿐이오. 훌륭한 재료를 가져오면 방어구를 만들어준다고 했으니. 사내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는 없지.”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황금멧돼지의 시체를 꺼내놓자 피알라르는 그를 밖으로 쫓아냈다.
작업을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으면 방해가 될 뿐이었다.
아이반은 그 앞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그동안 공방에서는 끊임없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 망치를 모루에 내리치는 소리, 무언가를 찢고, 자르고, 새겨 넣는 소리.
그리고 사흘 뒤, 마침내 소리가 멈췄다. 끼익 공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피알라르는 무척이나 피곤해보였다. 그 짧은 시간 살이 빠진 듯 얼굴이 홀쭉하고 기운이 없었다. 아이반은 그가 사흘 내내 작업을 계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계속.
” 다 끝났소. 안으로 들어오시오.”
그의 입에서는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반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잠깐 쉬기를 권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아이반에게 완성품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건 당신의 물건이오. 당신이 그것을 집어 드는 모습을 나는 반드시 봐야만 하겠소. 그래야만 완성이 될 테니까.”
피알라르의 몸은 쇠약해졌을지언정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했다.
장인의 정신으로 밝게 빛났다.
“흐흐, 내 생각보다 훨씬 잘 나왔소. 당신도 만족할 거요.”
그가 장담한 대로였다. 피알라르의 작품을 확인한 아이반이 놀라움에 입을 떡 벌렸다. ‘이걸 겨우 사흘 만에 만들었다고?’황금색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가죽 갑옷이었다.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깨와 팔, 다리까지 모두 갖춰진 한 세트였다. 보통이라면 몇 달을 고생하고서도 완성을 장담하지 못할 것을, 그는 겨우 사흘 만에 만들어낸 것이다. 실로 놀라운 솜씨였다. ‘이런 자를 내가 모르고 있었다고?’ 이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장인이라면 이름이 알려졌어야 옳다.
물론, 그의 무기가 잘 팔린다고 했으니 나름 북쪽에서는 지금도 유명한 사람이겠지만 .
노르드, 장인, 영웅, 그뷔드민드손.
아이반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키워드가 재조합되었다.
그리고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가 얼핏 떠올랐다.
메마른 땅의 대장장이, 황금망치.
게임이던 시절, 당연하게도 각 지역마다 무기를 수리할 수 있는 대장장이들이 있었다. 그중 서부 메마른 땅에 있는 대장간의 주인이 바로 황금망치였다. 아주 시니컬하고 돈을 더럽게 밝히던, 그런 캐릭터.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모르고 있었지만 일단 의심을 하고보니 묘하게 피알라르와 황금망치가 닮아있는 것 같았다. ‘본인일까? 아니면 아버지나 혈족?’ 만약에 본인이라면 도대체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기에 사람이 그렇게 바뀌는 걸까.
게임은 모든 캐릭터의 과거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줬을 뿐이다.
“어떻소? 꽤나 괜찮지 않소?”
“훌륭하오. 그 짧은 시간에 .”
아이반은 그가 건네주는 황금 가죽 갑옷을 감탄스럽게 바라보면서도 조금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급하게 만든다고 어딘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당장 황금으로 빛나는 것만 해도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정작 착용을 하니 황금빛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빛을 빨아들이는 듯 검은색으로 변했고, 조금 헐렁한 듯하던 갑옷이 스스로 크기를 줄여서 아이반의 몸에 달라붙었다. 갑옷을 입었으나 무게를 느끼지 못할 만큼 가벼웠다. 퉁퉁! 아이반이 가슴을 두드려보았다.
입을 때는 그리도 부드럽던 것이 무척이나 단단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유니크급이다.
“흐흐흐, 어떻소?”
“굉장하오. 이런 걸 만들 수가 있다면 내 장비들을 쓰레기 취급할 법도 하지.”
“그 말을 들으니 기쁘군. 그건 내 선물이오. 부디 그대가 미래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아이반이 값을 치르려고 했으나 피알라르는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그는 아이반을 밖으로 내쫓았다.
“나는 이제 밥도 먹고 좀 자야겠소. 그러니 그냥 가시구려.”
아이반이 다음 날 다시 찾아갔으나 피알라르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대로 딱 사흘만 더 머물고 가버린 모양이다.
언젠가 메마른 땅으로 간다면 그를 다시 만날 수가 있을까. 어쨌든 그렇게 나흘이 지나는 사이 도시는 부쩍 소란스러워졌다. 처음에는 야만인들의 말이라면 못 믿겠다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아이반의 정체를 알고는 크게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야만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사람들과, 오크로드의 아들을 죽이고 흑마법사 무리를 해치운 업적이 있는데 과연 거짓을 말하겠냐는 사람들, 그는 아이반이 아니라 그저 사칭하는 다른 자일 것이라는 사람들까지.
사실 아이반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쪽에 더 가까웠다.수백 년을 든든하게 로만왕국을 지켜온 동부전선에 대한 믿음이 그리도 두터웠다.
그렇게 긴가민가하는 사이, 동쪽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동부전선이 무너졌노라, 마침내 동부회색성채가 놈들의 손에 떨어졌노라. 큰 전쟁 없이 평화에 물들어 있던 이 지역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 눈앞으로 닥쳤다. 이곳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 곧 전쟁터가 될 것이다. 시장에는 먹을 것이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는 버티기를 택했고, 누군가는 피난을 선택했다.
병사들은 싸우고자 무기를 들었으나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를 해본 적이 없어서 팔이 덜덜 떨렸다.
” 아주 개판이로군.”
급히 그를 초청한 경비대에서 적들에 대해 설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아이반은 한심함에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병사들은 싸우고자하는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고, 주민들에게는 전쟁을 대비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당장 전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다들 혼란에 빠져서는 적들이 들이닥치기도 전에 내부에서부터 무너져 내릴 기세였다. 바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극히 줄었다. 가게도 문을 닫고 침묵에 빠졌다. 몇몇 곳은 그래도 먹고 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열었지만 손님도 없었다. 그저 경험해보지도 못한 전쟁의 광기에 물들어 약탈을 하려는 강도 놈들만 들이닥쳤다. 전쟁이 가까워졌다는 소식만으로 이미 치안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고 있었다.
“허, 이런 와중에 돌아다니면 안 되지! 위험하다는 말 못 들었어?”
“위험함을 알려줬으니 이제 그 값을 받아가야겠군.”
“뒤져서 나오면 동화 하나에 한 대씩 .”
숙소로 돌아가는 아이반의 감각에 강도짓을 하는 놈들이 걸렸다. 제법 덩치가 큰 놈들이 셋이서 하나를 벽에 몰아넣고 겁박을 하고 있었다. 저런 힘이 있었으면 창칼이나 휘두르면서 전쟁을 준비하던지, 이런 때에도 한 푼이라도 더 털어보겠다고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다니. 부지런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한 놈들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몰랐으면 모를까 시야에 들어온 이상 나서야 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좀 쌓이던 상태였는데 좋은 샌드백을 만난 셈이다. 아이반이 그렇게 싱글벙글한 마음을 숨기고 다가가는데 누군가 나타나 녀석들을 모두 바닥에 때려눕혔다. 아주 간결하고 실전적인 동작, 그러면서도 목숨에 지장은 주지 않는 자비로운 손속.
그 움직임은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반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델피노!”
그 말에 녀석들의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던 델피노가 아이반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아이반! 이곳에 있었군요!”
“당신은 분명히 성황청으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소? 아니, 그것보다 지금 뭘 하고 있는 .”
“이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짭짤, 아니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 이들의 영혼에 묻은 때가 조금은 벗겨지겠죠.”
그러면서 빛의 신 아룬에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니 틀림없는 델피노였다. 그는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일까.
“따로 머물고 있는 곳이 있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죠.”
“그러면 따라오시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이 있으니까. 지금 도시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여관에 머물기도 힘들 거요.”
아이반은 그를 데리고 피알라르의 공방으로 향했다. 피알라르가 떠나고 난 거처에 아이반이 자리를 잡고 사용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으나 사람 둘이 머물기에는 충분한 장소였다. 아이반이 그곳을 쓰고 있다고 피알라르가 뭐라 말하지는 않으리라.
아이반이 인벤토리에서 차와 주전자를 꺼내자 델피노가 움찔하더니 얼른 그것을 받아 자신이 차를 끓였다. 과연 차에 익숙한 사람이 끓인 것은 다른지 향이 은은하면서 맛이 달았다. 그렇게 차로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자 아이반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지금쯤 성황청에 도착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요?”
“원래는 성황청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가고 있는 도중에 동부전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 몸은 어쩌시고? 후유증이 .”
“구마사제로서 싸울 수는 없겠지만, 제게 남아있는 힘으로 한 사람만이라도 더 치료할 수가 있다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빙긋 웃는 델피노의 미소가 가벼웠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치료가 필요한 곳에 사제가 있어야지요. 제 몸이 아프다고 남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어찌 찬란한 빛의 주를 모시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신의 인성부터가 차이가 나서 그런지 사제의 마음가짐이 달랐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먼저 적을 죽이면 아군이 다칠 일이 없을 것 아니냐고 껄껄 웃으면서 닥돌이나 하기를 원할 텐데.
아이반은 잠시 고민했다.
과연 그를 믿을 수가 있는가, 그에게 등을 맡길 수가 있는가, 그리하여 그를 동료로 삼을 수가 있는가.
답은 그렇다. 그를 믿지 못한다면 아마 평생 동료란 것은 구할 수가 없으리라.
한 번은 흘려보낸 인연이었으나, 이렇게 다시 만났음에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이반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델피노, 혹시 나와 함께할 생각은 없소?”
“네? 그게 무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