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42
“원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나의 앞에는 수많은 위험이 닥칠 거요. 그대가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어둠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그게 나의 운명이니까. 신들이, 망할 세상이 원하는 운명이니까.”
최대한 담담하게, 감정을 억눌러서 말하고자 했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새어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감정을 느낀 델피노가 입을 다물었다.
결코 가볍게 들을 수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아이반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이 가진 뜻이 고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나 결국은 대의로 향하게 될 거요. 내가 살아남고자 할수록 영웅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끊임없이 위험이 닥칠 것이다. 결국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
그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아이반은 그가 자신의 동료가 되기를 원했다. 그 요청에 델피노는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 ‘찬란한 빛의 주, 아룬이시여. 나는 어찌해야합니까?’ 감탄사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습관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델피노는 그 말을 듣고 저기 멀고 먼 곳, 찬란한 빛의 땅에서 그분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흐릿하던 신성의 빛이 무척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가 생명력을 불태워 아룬의 힘을 청할 때처럼. 아룬의 시선이 닿았다.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위대한 천상의 신이 한낱 필멸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반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위대한 빛의 주, 아룬조차 관심을 기울일 정도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가 성황청으로 향하지 않고 결국 발길을 돌렸던 것 역시 아룬의 뜻일지도 몰랐다. 불현 듯 그를 스쳤던 감정과 결심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 아닐까. 감동과 격정으로 몸이 떨렸다. 그 순간 델피노는 마음을 정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분이 나를 쓰시려 하니 그저 따를 뿐입니다. 하찮은 이 몸이 당신의 앞길을 밝히는 횃불이 된다면 기꺼이 몸을 불태우겠나이다.”
델피노가 그리 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삭막했던 아이반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마침내 이 험한 땅에서 진정한 동료를 만났다. 불신과 의심으로 가득하던 그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동료를 만들게 되리라. 더 이상은 홀로 외로워하는 일 없이, 이방인으로서 그저 세계를 떠돌 일 없이.
아이반은 이 땅에 떨어진 지 수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방인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 세계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저 외부에서 지켜보는 자가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이 된 느낌이었다. 비록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반은 이제야 출발점에 섰다.
스윽 아이반은 인벤토리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생명의 구슬을 꺼내 델피노에게 내밀었다.
비록 백 년이 넘게 혹사당하고 던전의 핵이 되어 많은 힘을 소모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는 강인한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건 ?”
델피노가 깜짝 놀라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아이반은 담담하게 말했다.
“영적인 그릇이 부족했던 나와 달리 당신은 육신의 그릇이 깨진 것이 더욱 큰 문제였지. 생명의 구슬이 당신의 깨진 그릇을 회복시켜 줄 거요.”
막대한 신성력을 얻기 위해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우며 아룬의 힘을 받아들였었다.
그 때문에 정신과 육체, 영혼에 상처를 입었으니 생명의 구슬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원래부터 정신과 영혼은 강인한 남자니까.
“이건, 너무 과분한 물건입니다.”
“사양할 필요는 없소. 그 물건 이상으로 당신이 고생할 것이니까.”
생명력과 회복력을 높여주는 보물이지만 그것보다 수준 높은 힐 노예, 아니 회복기가 있는 동료 하나가 훨씬 귀했다.
애초에 힐러용 장비에 들어가는 재료였고.
“좋습니다. 이제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신이 지켜보고 있다.
사제로서 이보다 더욱 고귀한 임무가 무엇인가.
델피노의 굳은 신념이 느껴지는 눈동자를 마주하면서 아이반이 대답했다.
“파밍이오.”
” 예?”
동부전선이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로만 왕국은 방어선을 크게 뒤로 물리기는 했어도 전의를 상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동부지역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전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라도 되찾기를 원했다. 마지막까지 아끼고 있던 최정예 병력이 마침내 동원되었다. 왕국마법사단이 움직이고, 적룡기사단이 움직였으며, 서부와 남부의 군단 일부가 동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린스킨은 막강한 병력들을 통해 동부회색성채를 차지했으나, 그로서 더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만했다.
게다가 그들은 로만 왕국의 동부를 차지하면서 대륙 남부에 있는 제국, 마리난과 마주하게 되었다. 갑자기 전선이 확대된 셈이니 한동안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것이다. 때문에 로만 왕국의 북부를 공격하는 무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반은 강하게 주장했다.
“이대로 버티는 것보다는 차라리 앞서 방어선을 구축해서 녀석들이 넘어오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오.”
편하기로는 당연히 수성이 편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했다.
대부분의 농지와 생활 기반은 성벽 바깥에 있었으니까. 녀석들이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약탈을 자행하고 논밭과 건물을 불태우는데 집중한다면 그 피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성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선제공격을 해서 쫓아내는 것이 옳았다. 아이반이 그렇게 한참을 떠들어댔지만 받아들이는 쪽은 영 소극적이었다.
“그, 오크들은 강병이고 동부를 무너뜨렸는데 우리만으로 가능하겠나? 병사가 너무 적은데 . 오히려 빈틈을 녀석들이 파고들면 성마저 넘어갈 수도 있어.”
로만 왕국의 북부는 오랫동안 평화에 물들어 있었다.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를 경험해본 적도 없었고. 그래서 전투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소극적으로 방어하기를 원했다.
“영지민의 피해가 클 것이오. 어떻게 당장의 목숨은 건진다고 해도 바깥이 모두 불타고 나면 식량이 부족해 결국 굶주리겠지. 세금도 제대로 거둘 수 없을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반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말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듣고 있던 영주 쪽 참관인이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소리에 움찔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참관인의 눈치를 보던 지휘관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겨울이다. 거둘 것은 다 거뒀으니 설령 밭이 불탄다고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겨울에는 일부러라도 불태우지 않는가?”
그 말에 다른 이들이 옳은 말이라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병신 같은 의견의 허술한 점을 지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씨부럴 놈들.
이미 수확한 곡식이 불탈 것은 생각하지도 않나? 집이 사라지면? 보가 무너지면? 방앗간이 파괴되면? 바깥에 있는 주민들을 다 성안에 수용할 수는 있고?’ 언제나 든든하게 그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동부 전선이 무너지고 그린스킨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이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병사들이 그들을 떠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듯했다. 아이반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병사를 움직이지 않겠다면 물자라도 지원해주시오. 내가 숲으로 들어가 오크 놈들을 조금이나마 막아보겠소.”
“뭐? 당신이? 도대체 왜?”
“나의 신께서 이 전투를 원하시니까. 명예로운 전투만이 나를 발할라로 이끌어줄 것이오. 전사는 싸움을 피하지 않소.”
“혼자서는 무리일 텐데.”
“아룬의 사제와 성전기사단의 일부가 함께 움직일 거요. 그들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다더군.”
그 말에 옆에 앉아있던 델피노가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찬란하신 빛의 주의 은총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합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밝은 법이지요.”
둘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지휘관도 마냥 거절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 지원 물량을 깎아내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물자를 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선 아이반은 지켜보는 시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차갑게 웃었다.
“이 정도면 빼먹을 만큼 빼먹었군. 빈손으로 떠나지는 않아도 되겠소.”
“그렇습니까? 저는 영 기분이 좋지 않군요. 어쩜 저리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지 .”
“원래 평화가 길면 무능한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법이오.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아서 내게는 이것도 다행스럽게 느껴지는군.”
저들이 어떻게 나오든 어차피 해야 되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조금이나마 보상을 챙겼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이런 위기 상황에도 자신들의 안위만을 챙기는 것을 보면 욕심이 강한 자들이오. 어쩌면 악마숭배자들의 유혹에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르지. 안 그렇소?”
“예? 그건 .”
“‘합리적인 의심’이지. 구마사제로서 그런 의견 정도는 교단에 보고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 말에 델피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상황이 상황이잖소? 이런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지.”
아이반은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으면서 앞을 가리켰다.
“자, 이제 창고나 털러 가봅시다.”
인벤토리에 각종 물품들이 꽉꽉 채워져 있으니 아이반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성전기사단의 몫까지 받아왔기 때문에 양이 꽤나 많았다.
“이건 신전에 맡겨 성전기사단에게 건네주도록 하고, 우리는 숲으로 들어갈 거요. 오크 녀석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챙겨야만 하는 것들이 있소.”
원래는 황금멧돼지만 챙기고 끝내려했지만 저 산맥에는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지금쯤 꽤나 오크들과 부딪히고 있는 중일 테니 한 발 슬쩍 들이밀어 보면 박대를 당하지는 않으리라.
아이반과 델피노는 산맥 쪽으로 향했다. 약간은 동쪽에 치우쳐져있는, 그래서 조금은 더 위험한 곳으로. 이틀쯤 걸어서 점점 깊은 곳으로 향하던 아이반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왜 그러십니까?”
“하늘이 심상치 않군. 곧 비가 내릴 것 같소. 겨울비치고는 꽤나 거세게 내리겠어.”
경험 많은 용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기 전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와 한 방울씩 비를 뿜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오크 놈들이 그들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겠지만 그들 역시 움직이는 것이 까다로웠다. 산에서, 그것도 비가 내리는 산에서 움직이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었다.
아이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늘을 노려보았다.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제 슬슬 속옷까지 젖어서 축축해질게 뻔했다.
“그래도 비가 내려서 시간은 벌었소. 서둘러보지.”
둘은 비를 맞으면서도 한동안 더 걸었다. 웬만큼 어두워져서 시야가 가려질 때가 되어서야 동굴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동굴은 원래 곰이 쓰던 곳인 듯 했는데, 주인이었을 녀석은 동굴 앞에 누워 숨이 끊어져있었다.
곰의 시체를 본 델피노가 크게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죽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크들이 사냥한 것일까요?”
“그건 아닐 거요. 그랬다면 이렇게 사냥감을 방치하지는 않았겠지.”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곰의 시체를 살폈다. 혹시 무슨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서. ‘고기를 다 들고 간 것도 아니고 가슴만 뜯어져있군. 심장만 빼서 가져간 거야.’ 간혹 배부른 짐승들이 사냥감의 내장만 빼먹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건 짐승의 솜씨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