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44
물론 뜻이 그렇다는 의미다. 원래의 발음은 쉭쉭거리는 소리라 아이반이 델피노에게 알려줄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가자 아이반은 욕조를 확인했다.
“이런 곳에서 옷을 벗고 씻어야 한다니 영 불안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 몸에서 쿰쿰한 쉰내를 풍기며 돌아다니면 저들이 우리를 한심하게 여길 거요.”
“으흠 .”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푹신한 침낭에서 잠을 잤지만 다음 날 델피노의 얼굴이 영 밝지 못했다. 주변에 리자드맨이 돌아다니니 편안히 잠들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아이반을 보면서 낮게 감탄했다.
“정말 심장이 크시군. 나는 도저히 눈이 감기지 않던데.”
“어느 상황에서도 빠르고 편안하게 잠드는 것 역시 나의 능력이니까.”
아이반이 귀한 포인트를 괜히 수면 스킬에다 투자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에도 편안히 휴식을 하기 위한 일이지.
불안하고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편안히 잠들 수가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장점이었다. 겉으로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이것이 그동안 아이반의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렸다고 해도 좋았다. 아침을 가볍게 먹은 뒤 그들은 길을 떠났다. 어제보다 조금은 빗줄기가 약해졌으나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겨울비는 눈보다 차가웠고, 그 속에서 산길을 걷는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고 있다가 문득 아이반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이어 리자드맨들도 무기를 들어올렸다. 안타깝게도 델피노는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리자드맨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는다는 것이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오크 같은데 . 녀석들이 이 빗속에서 움직일 이유가 있나?”
아이반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흘깃 리자드맨 대장을 바라보았다. 사나운 이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싸움을 피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 위험할 것 같지는 않지만, 조심하시오.”
델피노에게 그리 말한 아이반이 창을 뽑아들었다. 틱, 티틱! 창 위로 빗방울이 때렸다. 싸늘한 겨울의 기운이 창을 타고 아이반의 손까지 닿았으나 전투의 열기가 그것을 밀어냈다. 후우.
전투를 앞두고 뜨거워진 몸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그의 몸에 이질적이지만 상쾌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평소 느끼던 아스가르드의 호쾌하고 강렬한 힘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신성력이 그의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아이반이 힐끔 델피노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스스삭! 전투 시작을 알리는 낮은 숨소리가 사나운 이빨에게서 흘러나왔다. 리자드맨 전사들은 모두 무기를 치켜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반 역시 그리했다.
타다닥! 빗물을 가르며 달려 나간 아이반이 창을 내밀었다.
나무 틈으로 모습을 드러내던 오크 하나의 가슴을 꿰뚫고 핏물을 뿌렸다. 목숨을 잃은 오크의 시체는 차갑게 식어가지만 아이반의 몸은 더욱 달아올랐다. 치지직! 쾅! 천둥걸음.
그 폭력적인 걸음이 시작되자 또 하나의 오크가 목을 잃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녀석들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리자드맨과 싸우면서도 이쪽을 신경 쓰는 기색이었다. ‘뭐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자신의 목을 가르려는 오크의 검을 피하고 발로 후려 차 가슴을 으깨버린 후 뒤에 있던 녀석의 심장을 찔렀다. 애초에 수가 많지는 않았다. 저쪽에 마지막으로 남은 오크가 기묘한 소리를 내는휘슬을 불다가 목이 잘리는 것으로 전투가 끝났다. 삐에엑- 녀석은 죽어가면서도 아이반을 바라보았다. 아이반은 그것이 왠지 찝찝하기만 했다.
저건 무슨 의미지? 리자드맨 사이에 인간이 끼어있는 것이 이상해서 그런가? 아이반은 떨떠름한 감정을 숨기고 사나운 이빨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아이반은 지금은 외부인, 결정은 사나운 이빨이 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있는 놈들이 모두 모여들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싸우시겠소?”
“서둘러 돌아간다. 그대들에 대한 것 역시 그곳에서 처리한다.”
큰 부상을 당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명쯤 검에 스친 자가 있었으나 그는 델피노에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음, 역시 리자드맨들은 폐쇄적이군요. 사제라고 해도 인간을 경계하는 모습입니 .”
델피노가 차마 하던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이반이 어느 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땅을 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놀라운 흔적이라도 찾은 것인가 싶어 고개를 들이미니 아이반이 민망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니, 그냥 귀한 약초가 눈에 보여서.”
탈탈 약초에 묻은 진흙을 털면서 아이반이 앞을 가리켰다.
“어서 갑시다. 오크들이 오기 전에.”
주변 환경과 땅의 질감이 변했다.
풀과 나무가 짙어지고 바닥이 축축하다.
이것은 비단 비가 내렸기 때문은 아니리라.
어느새 리자드맨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흙과 풀, 나무밖에 없던 곳에 이제 문명의 흔적이 보였다. 수많은 리자드맨의 시선이 움직이다말고 낯선 이들을 바라보았다.
“인간?”
“인간이라고? 여기에?”
쉭쉭거리는 낮은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델피노는 괜히 긴장이 되어 침을 삼켰다. 그들이 딱히 적대감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곳은 적진이나 다름없었다.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일행의 리더, 사나운 이빨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반과 델피노를 리자드맨 족장에게 안내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 들어서자 리자드맨 족장이 보였다. 그는 두꺼운 갑옷과 날카로운 창을 들고 서있었다.
리자드맨은 대체로 인간보다 덩치가 컸지만 리자드맨 족장은 그 중에서도 반배쯤 더 큰 것 같았다. 인간보다 훨씬 덩치가 큰 파충류가 두발로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으니 꽤나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반과 델피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겨우 상대의 덩치가 커다랗다는 이유로 일일이 겁을 먹기에는 그들이 살면서 겪었던 수라장이 만만치 않았다. 쉭쉭거리는 리자드맨 특유의 언어가 족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그대는 우리의 말을 할 줄 안다고 들었다.”
“대화가 통할 정도라면.”
“신기한 일이로군. 조금 어색하기는 해도 듣기 거북할 정도는 아니야. 우리의 말을 그렇게 능숙하게 사용하는 인간도 있었군.”
언어가 통한다는 것은 서로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시작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찌하여 이곳에 왔나?”
“당신들이 알지는 모르지만 오크는 전에 없던 규모로 움직이고 있소. 인간의 왕국 동쪽을 공격해서 빼앗았지. 우리는 그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오.”
“그런가? 최근 들어 오크들이 조금 시끄럽기는 하더군.”
의뭉스럽기는.
오크들이 리자드맨의 영역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아이반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만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우리는 저 잔인하고 역겨운 오크 놈들이 산맥을 넘어 인간의 땅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소. 이미 동쪽에서 싸우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나는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소.”
리자드맨 족장이 아이반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세로동공을 가진 노란색 파충류의 눈이 그의 몸을 훑었다. 썩 기분이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그 사이 아이반 역시 리자드맨 족장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판단을 하는 중이었다.
‘ 싸우면 이길 수 있나?’ 누군가를 만날 때 전투의 승패를 예상해보는 것은 아이반의 습관이었다. 이 낯선 땅에서는 세상만물 모두가 그에겐 잠재적인 적이었으니까.
리자드맨 족장과 주변에 서있는 다른 리자드맨 전사, 그리고 환경까지 고려해본 아이반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못 이길 것 같은데.’ 제대로 그의 움직임이나 솜씨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기세만 보았을 때 리자드맨 족장은 대단한 실력자였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에게 힘을 빌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순수하게 개인의 역량으로만 비교하자면 아이반이 밀렸다.
엄밀히 따져서 아이반은 생존용 세팅이었고, 전투용으로 최적화된 몸은 아니니까.
버티거나 도망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상대를 쓰러뜨리기에는 결정력이 부족했다. 그동안은 그 치명적인 한 방을 신의 힘으로 채웠지만 그걸 제외한 순수한 실력은 아쉬운 점이 많았다. 결국 중요할 때는 신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자존심을 세우기엔 아이반이 너무나 약했다.
“오크들이 인간의 땅을 노리고 있다, 그게 우리와 관계가 있나?”
“사이에 끼어있지만 않았다면 관계없는 일이었겠지.”
“놈들이 우리의 영역을 피해서 돌아간다면 끼어들 이유가 없다.”
그 말에 아이반이 껄껄 웃었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간다고 하였소? 아니면 친절하게 인간들을 치러 갈 테니 길이라도 빌려달라고 한 것이오?”
인간들이 지배하는 대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패권행보를 멈추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겠다.
오크들은, 그린스킨들은 그렇게 대의를 외치며 피의 동맹을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선(善)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 인간들과의 영역다툼이지 그게 소외된 종족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들겠다는 신념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리자드맨 입장에서는 인간이나 오크나 그놈이 그놈이었다. 차라리 인간은 멀리 떨어져있기라도 한데 오크는 바로 옆에 있으니까 더하겠지.
“인간을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렇다고 오크들이 믿을 만한 놈들은 아닐 거요.”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
그래서 그게 정말로 친절한 제의였나? 조선은 그래서 길을 빌려주었나? 순순히 길을 빌려줬다면 과연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리자드맨은 영역의식이 무척이나 강한 종족이었다.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서든 아니든 오크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 견딜 수가 없겠지.
“적의 적은 동료라는 말이 있지. 같은 적을 공유한다면 우리는 힘을 합칠 수가 있을 거요.”
그러자 리자드맨 족장이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다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게 리자드맨 특유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아이반은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참으로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는군.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가?”
“이미 말하였소. 오크 놈들이 산맥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건 우리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한다는 뜻이겠지. 그 뜨거운 피의 대가를 무엇으로 치르려고?”
“뱀신 모르나의 유적을 찾고 있겠지? 나에게 그와 관련된 정보가 있소.”
그 말에 주변 모든 리자드맨의 기세가 변했다.
결코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존재가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뱀신 모르나, 리자드맨과 나가들이 모시는 여신.
잠들어버린 옛 신을 깨우는 것은 리자드맨의 오랜 숙원이었다. 적어도 이들에게만큼은 오크들이 근방에서 얼쩡거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한 일인 셈이다.
”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내뱉는 것인가?”
리자드맨 족장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면서 아이반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