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46
“따라간다. 뒤처지는 놈들은 꼬리를 잘라버릴 거다.”
일행은 오크들의 포위를 뚫으며 난폭한 호수로 향했다.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놈들의 추격에 리자드맨 전사들이 몇이나 목숨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전사들의 시체를 수습할 시간조차 없이 버려두고 움직였기에 리자드맨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모두 저 빌어먹을 인간 놈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곳에 정말로 뱀신 모르나의 제단이 숨겨져 있단 말인가? 의심과 적의, 불만의 감정이 허공을 떠돌았다.
다들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고, 무척이나 날카로워졌다.
델피노가 돌아다니면서 부상자들을 회복시키고 있었지만 여전히 분위기가 무거웠다.
그들은 원래 델피노의 치료마저 거부하려고 했었다. 인간의 호의를 도대체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그때 사나운 이빨이 끼어들어 소리쳤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싸우고 있는 자를 믿지 못하겠다니, 어쩌자는 것이냐!”
리자드맨 전사들은 사나운 이빨의 말을 듣고 억지로 몸을 맡겼다. 그러나 이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 오크들이 자신을 노리기보다 아이반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전사들을 진정시킨 사나운 이빨 역시 아이반을 곱게 보지는 않았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다.”
“해명이랄 것까지야. 동쪽에서 칼춤을 좀 췄더니 그게 인상적이었나 보지.”
아이반은 자연의 구도자 테잔과 마주했노라,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스물 몇 번째 아들인 발 어쩌고의 심장을 꿰뚫었노라 말했다.
“오크로드 카르타크가 생각보다 가정적인 남자였나 보군. 그 가정이 수십 개라 자기 아들 이름도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부하들에게 내 목을 가져오라 시켰을 줄이야.”
예상하건대, 카르타크가 정말로 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오크 군세의 선봉전사이자 자신의 아들이었던 녀석을 죽인 자를 그냥 내버려두기에는 오크로드로서의 위엄이 살지 않았겠지.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모르되, 보였다면 반드시 죽인다. 오크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설명을 들은 리자드맨들은 애써 불만을 억눌렀다. 전사가 전사로서의 임무를 다하다 생긴 원한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다만 역시 가증스러운 인간 놈들에게당했다고 여길 뿐이다. 어설프게나마 만들어지고 있던 믿음이 사라진다.
서로를 동료로 여기기보다는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했다.
뱀신 모르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계약은 계속되겠지만 아주 작은 계기만 있어도 적대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였지만 아이반은 느낄 수 있었다. ‘좋지 않아.’ 오크들이 그의 목을 노리는 상황에서 리자드맨들까지 등을 돌린다면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쯤에서 상황을 바꿔야만 했다.
“이제 곧 난폭한 호수요, 거기서 뱀신 모르나의 제단을 찾아야겠군.”
아이반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리자드맨들이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저 도마뱀 같은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델피노마저 그들이 어이없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노골적이었다.
“난폭한 호수는 넓다. 그곳에서 숨겨진 제단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유가 있다고 한들 하루 이틀 만에 가능한 것은 아니지. 혹시 그대는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나?”
“그건 아니지. 하지만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소.”
아이반은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 오히려 의아했다.
그러면 자기가 이곳에 몇 달이고 붙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당장 오크들이 공격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난폭한 호수에 제물을 바치고, 뱀신 모르나를 믿는 신도의 피가 흘러 들어가면 숨겨져 있던 제단이 반응할 것이오.”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나? 우리조차 모르는 것을 .”
“제단은 오래 전 나가들이 만든 것이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서 델피노에게 번역해 알려주자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오묘하게 변했다.
“나가들이 만든 유적이라고요? 그거, 괜찮겠습니까?”
델피노의 걱정은 당연했다.
리자드맨이 인간과 친하지 않은 종족이라면 나가는 인간에게 적대적인 종족이었으니까. 대륙 동쪽에 있는 로만 왕국에서는 그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으나, 대륙 서쪽에서는 나가의 악명이 만만치 않았다.
“유적이 위험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소. 나가들은 모두 떠났으니까.”
뱀신 모르나의 적자라 할 수 있는 나가들은 그녀의 인도에 따라 이곳을 버리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게 벌써 수백 년도 훌쩍 넘은 일이었다.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뒤에서 오크가 추격하고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유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난폭한 호수는 원래라면 아이반과 델피노 둘이서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자드맨 전사들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안에 있는 유물을 모두 챙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일부라면 어떻게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거기서 또 대박이 터질 지도 모르지.
아이반은 억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일행을 이끌었다.
난폭한 호수는 그 이름과는 달리 고요하기만 했다.
잔잔한 물결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 이름이 난폭한 호수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물론 그 이름 역시 나가가 이곳에 머물던 시절의 흔적이었다. 진지한 눈으로 호수를 둘러보던 아이반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지 않소. 얼른 제물을 바치고 뱀신 모르나의 제단을 찾아야만 할 것이오.”
그 말에 리자드맨 몇몇이 움직이려 했다.
근처에서 사슴이라도 한 마리 잡아와 바치려는 생각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오크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라 사슴을 잡는 것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럴 필요 없소. 제물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아이반은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죽을 벗겨놓아서 알아볼 수는 없겠지만 이 녀석은 황금멧돼지였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신화의 흔적이 닿은 녀석이니 평범한 사슴보다야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어울리겠지.
“이것에 당신들의 피를 뿌리시오. 신도의 피 냄새를 맡은 뱀신 모르나가 반응할 것이오.”
원래는 인신공양을 해야만 할 것이다. 신도 하나의 목숨을 바치고 신을 부르는 의식.
하지만 대신 황금멧돼지를 바치고 그 위에 신도들의 피를 뿌렸으니 대충 구색이나마 갖춘 셈이다. 이걸 못 받겠다고 뱀신 모르나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어쩌나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당신들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하오, 하고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씨부럴, 따지려면 입맛 까다로운 지들 여신에게나 따지라지.
아이반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시작하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리자드맨들은 이내 돌아가며 자신의 팔뚝을 긋고 그 피로 황금멧돼지를 적셨다. 상처는 델피노가 얼른 치료해주었으나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이 정도면 대충 리자드맨 하나 만큼의 피는 되겠지.
리자드맨들은 자신들의 피로 젖은 황금멧돼지를 들어서 호수 안쪽으로 멀찍이 집어 던졌다. 그리고 모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신을 부르기 시작했다.
뱀신 모르나, 수백 년간 침묵하고 있던 옛 신. 한참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던 리자드맨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은 전혀 느끼지 못하던 신성의 존재를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들이 감격에 몸을 떨 때, 난폭한 호수가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
잔잔하던 물이 거칠게 흔들리고 위로 솟구쳤다.
거울 같던 호수가 깨어난다.
그 이름대로 난폭한 호수가 눈을 뜬다.
솟구치는 물줄기로 생긴 하얀 물거품을 뚫고 호수 한가운데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혹은 성. 뱀신 모르나의 제단이자 나가들이 만들어놓은 신성한 뱀 굴.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나운 이빨은 한 번 더 여신의 이름을 외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아이반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분의 시선을, 그분의 숨결을.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다.”
그 말에 아이반은 흘깃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소. 신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니까.”
그가 어떻게 말하든 리자드맨들은 모두 흥분상태였다. 얼마 전까지 오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것까지 잊어버린 모양새였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침착해보이던 사나운 이빨마저도 몸이 달아올라서 뱀신 모르나의 제단으로 향했다. 자신의 신이 아니라고 해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델피노는 찬란한 빛의 주, 아룬에게 기도를 올렸다.
“잠들어 있던 뱀신 모르나가 이제 깨어나는 것입니까?”
기도를 마친 델피노가 아이반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뱀신 모르나가 잠들어 있다는 말은 옳지 않소.”
“그러면 ?”
“신의 사정이란 복잡한 법이지.”
모두가 뱀신 모르나의 제단을 신경 쓸 때 아이반은 뒤를 돌아보았다. 난폭한 호수가 자신의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을 되찾은 것과 달리 숲은 고요했다.
아직 적의 뿔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호수를 뚫고 솟아오른 길을 따라 뱀신 모르나의 제단으로 향했다. 커다란 동굴로 들어가니 얇은 막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반은 그것이 나가들의 도시를 숨기고 있던 결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계 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 느낌이 달랐다. 바깥은 요 며칠 내리던 비가 그치고 화창한 날씨였으나 이곳은 아주 차갑고 축축한 곳이었다.
무언가 그를 통째로 입에 넣고 핥고 있는 것 같은 불쾌함이 느껴졌다.
천장에는 발광석이 박혀있어 빛을 뿌리고 있었으나,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인지 너무 흐려져서 오히려 음침하게만 느껴졌다.
빛의 구슬을 띄워 시야를 밝히면서 델피노가 낮게 중얼거렸다.
“기분 나쁜 곳입니다. 마치 뱀의 입속에 있는 것 같군요.”
“그러니까 뱀 굴이지. 어울리는 곳 아니오?”
“그렇기도 하군요. 여기가 나가들이 살던 곳입니까?”
“한때는.”
아이반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커멓고 커다란 수로에 낡고 부서진 벽과 건물들. 여기저기 이끼가 끼어있었으며 축축하고 음습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짙은 냄새가 가득했다.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밝고 아름다웠을 도시였다. 그러나 버려진 지가 너무 오래되어 지금은 그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뱀신 모르나의 존재를 느끼고 한껏 들떠있던 리자드맨들 역시 흥분을 가라앉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스르륵 투두둑! 멀리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거친 물소리가 들렸다.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그저 옛 나가의 유적을 찾았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란 것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