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rep Job RAW novel - chapter 48
그의 힘이 더 강해지고, 육신이 더 튼튼해졌다. 그러나 아이반은 느끼고 있었다. 점점 균열이 커지고 있다.
신의 힘을 담은 그릇이 점점 부서지고 있다.
그토록 미루고 미뤄왔던 부작용이 점점 그를 덮치고 있었다. 저 멀리, 멀고 먼 곳. 아스가르드에 있는 신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심드렁하게, 누군가는 불안하게, 누군가는 흥미롭게.
아이반은 이를 악물었다.
쾅! 다시 한 번 녀석과 부딪혔다. 이번에는 스라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녀석의 가슴에 생채기가 생기고 갑옷이 터져나갔다. 그러나 피를 토한 것은 아이반이었다.
주르륵 진득한 피가 흘러나온다. 다급하게 그의 몸으로 델피노의 신성력이 밀고 들어왔으나 깨져가는 그릇을 붙일 수가 없었다. 육신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다. 그의 치료술은 의미가 없었다. 치지직! 그의 몸속에 차오르고 있는 힘은 여전히 강대했으나, 그것을 뿜어낼 수가 없었다. 결국 토르가 빌려주었던 자신의 힘을 거둬들였다.
“윽!”
급격하게 빠져나가는 힘에 아이반이 비틀거렸다. 치명적인 틈. 만약 사나운 이빨이 스라칸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면 방금 전 그는 죽었으리라. 왈칵 피를 뱉어낸 아이반이 창을 들어올렸다. 포기할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녀석을 쓰러뜨릴 수가 있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녀석의 창이 아이반의 옆구리를 뜯고 지나갔다. 차마 반응할 수도 없는 속도였다.
“아이반! 아이반!”
델피노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달려오고 있었으나 아이반은 차마 오지 말라고 소리칠 수도, 심지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몸에서 힘이 빠진다. 파앙! 키에에엑-
“이건 또 무엇이냐!”
무언가 커다란 것이 수로를 뚫고 솟아오르는 모습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이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아이반이 정신을 잃었다.어둡고 밝은 곳. 온 세상 소리가 가득해 시끄럽지만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아 고요한 곳. 한참이고 그 기묘한 세계를 둥실둥실 떠돌고 있었는데, 문득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딘, 토르, 헤임달, 로키, 아직은 누군지 모르는 자들까지.
신들이 아이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는 존재감을, 경이로운 기세를 흩뿌리며 지켜보았다.
아스가르드의 신들.
그중 가장 앞에 있던 존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아이반은 그 순간 자신이 위대한 신격의 손바닥 위에 올라갔음을 느꼈다. 휘이잉- 폭풍이 그를 흔들었다.
전쟁이 그를 시험했다.
마법이 그를 파헤치고, 지혜가 그를 판단했다.
위대한 신격이 가지고 있는 관념들이 아이반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동안 몇 번이나 아이반이 찢기고 재조합되고 있었다. 지금 위대한 신격, 오딘이 그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영혼을 수확하여 발할라로 데려올 것인지, 그리하여 위대한 천상의 전사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지상에서 더욱 많은 피와 죽음, 전투를 거듭하게 하여 지금보다 강인하게 만들 것인지.
그 기묘한 고통 속에서 아이반이 이를 악물었다.
“오딘이여!”
필멸자는 결코 견디지를 못하는 곳에서 아이반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영혼을 쥐어 뽑을 듯 손에 들고 있던 오딘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아이반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너무나 강한 존재감에 온몸이 짓눌리고, 위대한 신성을 마주한 눈이 타들어갈 듯이 아팠지만, 그럼에도 소리쳤다.
“아직은 아니다! 나는 너희들의 꼭두각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하하하!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두가 그리 웃고 있는 느낌이었다. 감히 이 필멸자가 뭐라고 하였나? 맹랑하고 건방진 전사가 감히 발할라의 영광을 거절한다는 것이냐? 신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것만으로 아이반은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신은 결코 아이반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았다. 수확할 곡식을, 도축할 돼지를 바라보듯 하였을 뿐이다. 이 곡식이 더욱 탐스럽게 익을지, 돼지가 더욱 살이 찔지를 고민하지 그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망할 아스가르드!’ 아이반은 고통 속에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들을 바라보며 투지를 끌어올렸다. 전사의 애원, 처절한 외침과 슬픔의 비명에는 반응하지 않던 오딘이 그 적의 어린 눈빛에 빙긋 웃었다. 끝까지 전의를 잃지 않고 싸우고자 하는 정신에 만족했다.
그는 아이반의 영혼을 거두는 대신, 다시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아직 천상에 오기는 이르다. 발할라의 영광을 받기엔 부족하다. 지상에서 조금 더 나의 이름을 외쳐라. 그곳에서 더욱 큰 시련을 경험하고 강인한 전사가 되어라. 아이반의 몸을 쥐고 있던 위대한 신격의 손이 사라졌다.
그러자 아이반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끊임없이, 바닥을 향해서. 아이반이 눈을 떴다.
온몸이 바닥으로 빨려 들어갈 듯 무거웠다.
온갖 기력을 다 쏟아낸 느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몹시 어두웠다.
아이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음에도 이곳이 나가들의 도시, 뱀신 모르나의 버려진 제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갑고 축축했다.
그리고 쿰쿰하고 답답했다.
그런 냄새가 있었다. 그런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스윽 아이반이 조심스럽게 상체를 들어 올리려고 하자 옆에 있던 델피노가 옅은 빛의 구슬을 만들면서 다가왔다.
흐릿한 빛으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피곤한 듯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이반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지 얼마나 지났소?”
“글쎄요, 아마 열 시간쯤? 어쩌면 그것에 조금 못 미칠 것 같기도 하고.”
아이반은 자신이 열 시간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보다, 그 정도 되는 시간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음에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상황이 좋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오?”
“커다란 뱀이 나타났습니다. 언뜻 보았는데 바실리스크처럼 보이더군요. 그 녀석이 날뛰는 사이 당신을 데리고 뒤로 후퇴했습니다. 나가의 도시 깊은 곳까지 들어왔죠.”
아무래도 이곳에 있던 녀석이 침입자를 발견하고 공격한 것 같았다. 뱀신 모르나의 신도인 리자드맨들과 함께 있던 아이반과 델피노는 무시했지만 차마 오크들까지 그럴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
어쩌면 뱀신 모르나가 미약하게나마 개입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결코 친절하거나 자비로운 신이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소유욕이 강했다. 자신의 것을 침범하려는 오크들을 용서할 수 없을 거다.
“그나저나 상처는 좀 어떻습니까?”
그 말에 아이반은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보았다. 스라칸의 창이 뜯고 지나갔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한데 이미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옆구리는 멀쩡하군. 고생하셨소.”
그러나 델피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상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그릇을 말하는 겁니다.”
아이반은 입을 다물었다.
과도하게 신의 힘을 담으려했기에 산산이 부서졌던 영혼의 그릇이 지금은 어설프게나마 붙어있었다. 그는 그것이 오딘이 손을 썼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르륵 갑자기 아이반의 오른쪽 눈에서 강렬한 고통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시야가 흐릿하던 것이 그저 어두웠기 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윽!”
아이반이 신음을 흘리니 깜짝 놀란 델피노가 얼른 다가와 신성력으로 그를 치료하려 했다.
그러나 아이반이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소용없소. 이건 낙인이오. 내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표식이지.”
씨부럴, 빌어먹을 오딘.
자기 거라고 침을 찍어 바르는 어린애들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야. 아이반은 그렇게 속으로 욕설을 삼키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머릿속에 신비한 지식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죽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세계의 시작과 종말에 대하여, 비밀스럽고 강력한 룬 문자와 그 힘에 대하여.
한쪽 눈으로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그는 다른 쪽 눈으로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동안 안 쓰고 모아두고 있었던 스킬 포인트가 뭉텅이로 사라져있었다.
누구의 짓인지 명확했다.
참으로 악취미였다. 본인과 비슷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
한쪽 눈을 가져간 것도, 창에 몸이 꿰뚫린 그에게 룬 문자와 마법을 새겨 넣은 것도.
탁! 길을 잃은 대전사의 창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몸에 점차 마력이 차올랐다.
신들이 불어넣어 주는 힘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이반이 바깥으로 향했다. 전투가 막 소강상태로 접어든 것인지 사나운 이빨이 돌 더미를 의자 삼아 앉은 채로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일어났나? 그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툭 하고 내뱉는 말에 반가움이 담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잃어버린 뱀신 모르나의 시선을 찾아준 은인이자 잠깐이나마 같이 싸우고 있는 전우였다. 시체를 치우는 것보다야 살아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거의 죽을 뻔 했소. 신들이 영혼을 가져가려는 것을 막으려고 발악하다 겨우 돌아왔지.”
“신의 부름을 거절하다니, 그건 좀 아쉽겠어.”
“전혀. 그리 신앙심이 투철한 편은 아니라오.”
아이반은 한쪽 눈을 몇 번이고 끔뻑거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멀리 오크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보였으나 언뜻 거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감각이 흐트러지고 영 시야가 어색했다.
‘ 망할, 엘프들의 숲에 한 번 가기는 해야겠어.’ 신이 직접 새겨 넣은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그나마 쉽게 얻을 수가 있는 방법이 엘프들의 숲에 가는 것이다. 일단 엘프들의 숲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입수 난이도는 더럽게 어려웠다.
귀한 물건이니 귀쟁이 놈들이 쉽게 내어주지는 않으리라.
결국 아이반은 또 다시 제 발로 시련을 향해 걸어가야만 했다.
어쩌면 오딘은 그것을 노리고 눈을 앗아갔는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용케 지금까지 버텼소.”
“모두 신께서 보낸 왕뱀 덕분이다. 신성한 뱀이 신의 적을 공격했다.”
보통은 바실리스크하면 공포의 상징이었으나 이들에게는 신성한 영물로 느껴지는 듯했다. 하긴, 뱀신을 섬기는 자들이니 커다란 뱀이 그리 보이겠지.
본인들도 비슷하긴 하고.
“바실리스크는 어찌 되었소?”
“큰 상처를 입고 다시 물로 돌아갔다. 스라칸이 강하긴 강하더군. 과연 오크로드 카르타크의 아들이다. 명성이 거짓은 아니었다.”